'필요의 함정'에서 벗어나라
'필요의 함정'에서 벗어나라
  • 고영근
  • 승인 2010.01.2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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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장 위한 필요'가 '진정한 필요'인가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성장을 위해 밀어붙이고 있는 각종 사업들과 사랑의교회가 추진하고 있는 예배당 건축에는 모두 '필요'와 '성장'이라는 강력한 논리가 사업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필요가 있으면 그 필요가 어떤 필요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충족되어야 하며,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필요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논리는 '모든 수요는 충족되어야 한다'는 시장 만능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즉 소비자가 왕이며 소비자의 필요와 욕구는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신고전학파 경제학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경제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그러나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는 두 가지 전제에서 시작한다. 즉 인간 욕망의 무제한성과 재화의 희소성이다.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데 어떻게 한정된 재화로 무한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사실상 근대 이후의 경제학은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이러한 문제를 수요와 공급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정해 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재화의 희소성은 곧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부족함에서는 반드시 두려움과 탐욕이 나온다. 미국의 사회사상가인 헨리 조지는 "탐욕은 빈곤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고 정확히 설파한 바 있다. 무언가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더 가지고, 더 커지고, 더 강해지려는 인간의 욕망을 성경은 죄라고 말한다. 하지만 근대경제학에서는 그러한 인간성을 제거할 수는 없으니 인간의 욕망을 오히려 역이용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따라서 시장 만능주의 사회에서 모든 필요는 정당한 것이며 충족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과연 모든 필요는 당연히 충족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특별히 시장 만능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라면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신앙적으로 또 성경적으로 옳은 것일까?

'필요가 곧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우상숭배

위르겐 몰트만의 제자인 더글라스 믹스는 <하나님의 경제학>(God the economist: The Doctrine of God and Political economy)에서 하나님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관념이 신앙의 내용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의 핵심을 결정한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사실상 모든 이데올로기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의 이론을 떠받칠 수 있는 하나님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의 이론조차도.

믹스는 "시장 사회에서는 필요 자체가 하나님의 말과 형이상학을 대체해 왔다"고 갈파한다. 사실상 근대 이전에는 교회와 국가가 세상을 양분해 왔지만, 근대 이후로 교회는 종교라는 일부분만을 담당하고 시장과 국가가 지금까지 세상을 지배해 왔다. 교회는 국가주의 시대에는 독재와 같은 모습을 답습하고, 현재의 시장 만능주의 시대에는 맘몬의 논리를 답습하면서 은밀히 공존하고 있다. 즉 교회도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바탕 위에서 교회에서도 필요가 있으면 당연히 충족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논리가 나온다. 믹스는 "필요에 관한 이들 이데올로기 속에는 하나님 관념들이 내재되어 있는데, 교회는 여기에 포로가 되어 공공 사회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계 수단을 얻는 것을 방해하고 또한 교회라는 집에 속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에 '필요'가 사용되는 방식을 인식하지도 비판하지도 못한다"고 지적한다.

교회가 필요라는 시장의 논리에 압도되어 자신들도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알지도 비판하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믹스에 따르면, 일상의 삶과 도덕성은 필요들에 의해서 조직되고 지배될 수 있으며, 사회는 이 필요들의 하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사랑의교회 건축대책지역교회협의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황영익 목사는 사랑의교회 예배당 건축은 필요를 넘어 전형적인 '마케팅 교회'라고 한마디로 요약 설명한 바 있다. 사랑의교회 예배당 건축은 기존 예배당을 두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필요는 충족되어야 하며,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필요(시장)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시장 논리와 사실상 같은 것이다.

믹스는 '새로운 필요는 항상 창출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을 본성상으로 충족 불가능한 존재로 그림으로써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필요는 제한되고 충족 가능한 것이 아니라 원칙상 무제한적이고 충족 불가능한 것이며, 무제한적인 성장에 대한 기초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는 게 막스의 설명이다.

성장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시시포스 신화'

사랑의교회가, 만약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꽉꽉 차서 예배당이 또 필요하다는 욕구가 발생하면 과연 또 다른 예배당 건축을 멈출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는, 만약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 4만 달러가 된다고 하더라도 성장이라는 이념을 멈출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장 만능주의 세상에서 필요와 성장은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가 추구하는 성장이나 한국 교회가 추구하는 성장은 필요라는 함정에 빠진, 도저히 충족 불가능한 '시시포스 신화'에 불과하다. 신의 저주를 받아 무거운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 올리지만, 바위는 다시 밑으로 굴러 내려가 또 다시 바위를 굴려야만 하는 영원한 심판에 처해진 상황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탐욕)이 아닌 자족과 코이노니아를 통해 자신의 기본적 필요와 함께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면서, 희소성(부족함)이 아닌 모든 것을 주시고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엡 1:23)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의 시장 논리를 따라가면서부터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믹스는 희소성에 대항하여 성령님의 플레로마(pleroma, 충만)를 이야기한다. 이 지구상에는 세상의 모든 인구를 두 번 먹이고도 남는 식량이 항상 있다고 한다. 빈곤이 발생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과 두려움에 있지 자연과 하나님의 부족함에 있지 않다. 믹스는 결론적으로 "하느님의 의는 광야에서 만나를 가져다 준다. 충분함이 있다. 희소성의 가장(假裝)은 경제학의 출발점으로서 용납될 수 없다"며 "인간의 삶의 목적은 소비하거나 축적하는 것이 아니고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모든 필요는 그런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고 일갈한다.

이명박 정부와 사랑의교회는 공동체를 생각해야

기독교 정부라는 이명박 정부가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사업들과 사랑의교회가 추진하는 예배당 건축이 과연 하나님의 충만을 믿고 정의를 행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재고해 봐야 할 것이다. 즉 '욕망과 성장을 위한 필요'인지, 아니면 '진정한 필요'인지 진지하게 질문해 봐야 한다. 믹스는 "하나님은 철저한 개인이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필요는 우리의 개체성을 통해서는 규정될 수도, 만족될 수도 없다. 우리의 필요는 우리의 공동체적 존재의 함수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의교회는 한국 교회 내에서 철저한 개체적 교회가 아니다. 사랑의교회의 필요는 한국 교회의 공동체적 존재의 함수이기도 하다. 또한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각종 사업들이 단지 소수의 성장과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국가 공동체 속에서 얼마나 필요하고 또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요와 소비에 대해 더글라스 믹스가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으로 결론을 대신할까 한다.

"필요와 소비에 대한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은 성령 하나님이 모두가 살아가는 데, 그것도 풍족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충분히 공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근대경제학의 가장 뿌리 깊은 가정인 희소성을 의문시하는 일에 파괴적인 법이다.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그리고 사회주의에서도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의 충분한 것이 없다는 믿음은 뿌리 깊다. 그러나 교회는 성령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과 전체의 피조 세계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공급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살아가고, 교회 자체를 조직하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고영근 / 희년토지정의실천운동 협동사무처장·수원성교회 사회선교사 

* 이 글은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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