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쌍욕을 먹으면서도 글을 쓰는 이유
내가 쌍욕을 먹으면서도 글을 쓰는 이유
  • 최태선
  • 승인 2018.12.09 04:46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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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글이 파격적이라고 하는 분이 있다. 어떤 분은 글의 흐름은 온건하지만 내용은 가장 지독하다고 말한 분도 있다. 그러니까 내가 쓰는 글이 다른 사람이 쓰는 글과 다르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맞다. 나는 다른 글을 쓴다. 파격적이고 지독한 글을 쓴다. 그런데 내 글을 파격적으로 느끼고 지독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내가 오늘날 주류 기독교의 이해를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오정현과 관련된 글을 쓰면서 나는 지독한 욕을 많이 먹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지적은 ‘도대체 하나님은 늙은 창녀이신가.’하는 수사의문문 하나 때문이다. 구차스럽지만 해명을 좀 해보겠다. Who but know it?(누가 그걸 모르겠는가)의 의미는 Everybody knows it.(모두가 다 그것을 안다)이다. 수사의문문은 강조용법이다. 그러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늙은 창녀이신가,’라는 수사 의문문은 하나님의 결코 늙은 창녀와 같은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수사적 표현이다. 그리고 오정현이도 오정현을 추종하는 이들도, 그 반대파들도 모두 하나님을 거론하며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변인이나 된 듯 처신하는 행동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 지기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욕망대로 하나님을 내세우는 것이 하나님을 늙은 창녀처럼 대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게 쌍욕을 해댔다.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졌다는 것이다.

나는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화가 난 이유는 수사의문문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것들, 내가 지적한 것들이 자신들의 이해와 다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뉜다. 오정현을 지지하는 더 많은 사람들과 오정현을 축출하려는 그보다 적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대부분 그 두 부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하게 된다. 그러나 내 글은 두 부류 모두를 싸잡아 지적한다. 그러니까 내가 쓴 글의 내용이 자신들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내가 쓴 글의 내용과 자신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늙은 창녀이신가.’라는, 내가 아니고 기자가 단 제목에 천착하는 것은 전형적인 우회로이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선지자의 개인적 행동을 문제 삼았다. 선지자의 차림이나 용모 혹은 그를 지지하거나 추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문제 삼은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선지자들은 대부분 혼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그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착고에 묶이거나 웅덩이에 갇히곤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은 다수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선지자들이었다. 나는 내가 당하는 수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아전인수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사도들은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선지자들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그린 영화 '폴리캅'(Polycarp)

내가 애통해 하는 것은 내가 쌍욕을 먹고 조롱거리가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토록 무례한 무뢰배들이 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그토록 폭력적이 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이 되었는가. 여기서 나는 초기교회의 세례이야기를 하고 싶다.

밀라노 칙령(313) 이전의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예비사형수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라도 잡히면 사형을 당했다. 그러니까 밀라노 칙령 이전의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짜는 없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다가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말을 해도 그는 자신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에게 친구나 후견인을 연결시켜주고 안내에 따라 교사들을 만나야 했다. 물론 교사들과 만나 교제하기 이전에 친구나 후견인의 안내와 설명을 들었다. 그 설명을 듣고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경우 교사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환영의 분위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의 포기, 직업의 포기, 행동의 변화 등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엄정한 답을 해야 했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해야 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해야 했고 실제로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요구받는 것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하나, 하나를 깊이 생각하고 고민한 후 자신의 결심을 밝혀야 했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을 확인받아야 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과정을 지나야 비로소 본격적인 몇 년 간의 교육과 실습과 확인과 다짐을 한 후에야 그들은 입교의 관문으로서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하나님도 예수님의 이름도 함부로 거론하지 않았다. 입만 열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들먹이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과는 거리가 먼 길을 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랐다는 말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거론하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자신들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 나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집행이 유예되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쌍욕을 먹으면서도 글을 계속해서 쓰는 이유는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되려는 분들과 만나 이 시대 한복판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통치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도 예비사형수가 되는 길이다.(이 말을 과장이나 허투루 듣지 마시라. 자본이 신이 된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돈을 무력화하고 기꺼이 가난해지기로 결단하는 일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결기를 가지고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눈에 그것은 파격적이고 지독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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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석 2018-12-09 17:04:11
목사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자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분명 힘들고 어렵지만
그 길이 옳은 길이므로 좁고 험해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묵묵히 따라갑시다.

잘났네 2018-12-10 16:45:22
참 잘났네. 그대는 창녀인가? 늙은 창녀인가? 아! 그대는 정말 늙은 창녀인가?
그대는 창녀는 아니겠지. 창녀가 아닐거야? 남자는 창녀가 될 수 없으니까? 남창도 아니겠지. 그대가 몸을 팔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그대는 창녀가 아닐거야.

BOAZ 2018-12-12 01:14:54
목사님의 글을 통하여 참으로 은혜를 받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모르지만 오늘날 심히 썩어 문드러지는 교회와 교단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낍니다. 용기를 내시고 결코 승리하시는 인생 되어 주십시요. 감사!

epark 2018-12-14 19:07:43
자기의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된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두운 영을 뒤집어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어두운 영에 속하지 않으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욕된 이름으로 성호를 표현 할수 없다.
하나님이 쓰신 성경의 선지자 그 누구도 하나님의 성호를 욕으로 표현한 적이 없다.
어떠한 표현을 위해서라도 그 거룩하신 성호는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며 마음대로
표현 되어서는 안 된다.

epark 2018-12-14 19:18:42
창조물이 창주주의 이름을 욕으로 비유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가증스럽다.
만약 누가 비유하기 위하여 최태선 이놈이 아주 나쁜 놈이라 할 수 있나 하는 비유를 쓸 적에 최태선씨 본인이 들으면 과연 기분이 무관할까? 욕이니까 최태선 이놈이라 하는 것은 피합시다라고 쓴다고 하여도 본인은 기분이 나쁘지 않을까?
사람 대 사람일지라도 좋지 않음을 아는데 하물며 창조물이 창조주를 욕에 비유할 수 있다함은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고 할 수도 있다할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른다함은 구원에 이를수 없다고 할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