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여, 설교의 남용과 중독에서 벗어나라'
'교회여, 설교의 남용과 중독에서 벗어나라'
  • 김성한
  • 승인 2010.10.17 22:37
  •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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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예배와 하나님나라⑩ 예배 가운데 설교의 자리

얼마 전 “나를 거역하면 10년 안에 알거지”가 된다는 어느 대형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런 식의 협박과 저주에 가까운 이야기가 강단에서 선포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다들 꺼리는 것 같다. 감히 하나님 말씀에 이런저런 토를 다는 것 같고 말씀을 선포하는 분의 지엄한 권위에 도전하는 것 같아서 불안한가 보다. 그러나 강단에서 저런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쏟아 놓고 있는데 한번쯤 설교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설교의 바른 자리는 어디일까? 예배 가운데 설교의 자리를 생각해 보자.

설교를 둘러싼 신화

이제는 절판되어서 찾기조차 어려운 <복음과 커뮤니케이션>(IVP)이라는 오래된 책이 하나 있다. 저자인 찰스 크래프트는 ‘의사 전달에 관한 열 가지 신화’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이 책의 6장에서 이야기를 풀어 간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커뮤니케이션의 열 가지 신화 중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신화가 설교에 관한 것이다.

먼저 다섯 번째 신화는 ‘설교는 하나님이 정하신 복음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찰스 크래프트는 이러한 신화가 초대 교회가 설교를 통해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역사적 오류와 ‘설교하다’와 ‘선포하다’라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케루소’에 대한 부적절한 번역으로 인해 생겼다고 설명한다. 설교라는 커뮤니케이션 방식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 자신은 설교보다 대화의 방법을 더 선호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여섯 번째 신화는 ‘설교는 삶을 변화시키는 효율적인 의사 전달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교자와 청중들은 설교가 성도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설교가 전해지는 환경이나 설교라는 일방적인 소통의 방식이 갖는 한계로 인해 그런 기대는 잘 실현되지 못한다.

설교자와 청중의 삶이 나누어지지 않고 양 방향의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상황에서 설교라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만으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기대는 설교에 대한 지나친 낙관일 수 있다. 크래프트는 “예배 의식의 일부로 이루어지는 설교는 실제로는 ‘통합 의식’(ritual consolidation)의 하나로서 중요한 기능을 할 뿐이다”라고까지 주장한다. 설교는 예배 가운데 자리매김하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찰스 크래프트의 문제 제기는 매우 상식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조가 설교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고 말씀의 권위가 설교자들의 권위로 등치되는 순간 이런 상식은 사라지고 설교와 설교자에 대해 무한한 권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새로운 신화가 등장한다.

설교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이 글을 읽는 누구도 설교 없는 예배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도대체 설교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나를 거역하면 10년 안에 알거지가 된다”는 막장 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인격뿐 아니라 설교라는 매체, 커뮤니케이션의 방식 자체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 있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의 통찰을 빌려 오자면 “우리는 설교라는 것을 만들었고 (사실은 헬라와 로마의 철학자들에게 빌린 기술로) 다시 설교는 우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전적으로 설교 의존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회의 주일 아침 예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점유하는 순서가 무엇인가? 찬양 시간인가? 아니면 성도들의 나눔 시간인가? 설교에 배당된 시간이 가장 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설교가 예배의 전부는 아니다. 아무리 말씀을 강조하는 전통에 서 있다 하더라도 2000년 동안 교회가 형성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설교를 예배의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문화의 웅변과 수사학이 교회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이미 초대 교회 시대부터지만 개신교가 미사 대신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부각시킨 것은 종교개혁 때의 일이었다. 예를 들어서 처음 300년 동안 교회에서 드려진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설교가 아니라 성찬식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설교는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나누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설교는 예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예배가 설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 이야기 안에서 온전해지는 설교

예배에서 우리가 나누고 기억해야 할 이야기는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다. 예수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나라에 관한 것이었듯 예수의 뒤를 따라 나선 이들이 함께 기억해야 할 이야기도 하나님나라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설교는 교회보다 큰 하나님나라와 그 이야기 안에서만 온전히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저주와 축복의 이야기가 '설교'로, 설교자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생각이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되는 시대에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 전체가 들려주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이야기이다. 잃어버린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책임은 설교자뿐 아니라 회중들에게도 있다. 설교의 남용과 중독으로부터 벗어나 함께 기억하고 미완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완성해야 할 책임은 회중들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에서 예배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오직 한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캠퍼스 간사로 사역을 처음 시작하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매주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매주 설교를 통해 학생들을 확실히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다. 바르지 않은 동기로 설교를 남용했던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설교는 회중들을 설교자에게 중독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그 위험을 극복할 방법을 찾을 것인가? 강단에서 다양한 설교자들을 보는 것은 왜 어려운 일일까?

일주일에 한 번 뵙는 어머니는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보는 목사님들의 설교 이야기를 가끔 하신다.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좋더라, △△ 목사님은 재미있기는 한데 좀 그렇더라.” '하이퍼 리얼리티(극사실주의)'를 경험하는 시대에 기독교 방송에서 HD급 고화질로 보여 줄 것이 설교 방송뿐이라는 것도 슬프지만 인격적인 사귐과 쌍방향의 소통 없이 예배의 한 부분만 칼로 도려낸 듯 따로 포장되어서 소개되는 많은 설교들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설교와 예배는 분리되지 않는다

말과 삶은 분리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며 따르는 성자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설교와 예배는 분리 되지 않는다. 설교의 자리는 예배 가운데 있으며 예배는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함께 기억하는 시간과 공간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이야기가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 함께 예배하는 자매들과 형제들에게 들려지기 바란다. 어느 위대한 설교자도 아닌, 그 이야기만이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지난 몇 주 동안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마음 상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예외 없이 큰 고통 가운데 있었다. 화려한 수사와 웅변술로 포장된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 이제 그만 들었으면 한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막말하지 않고 소리 지르지 않으셨다. 한국 교회는 설교를 통해 부흥하며 성장해 왔다는 이야기를 기억한다. 이제 그 설교 너머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김성한 / 한국 IVF MEDIA 총무

* 월간지 <복음과상황>(http://www.goscon.co.kr/)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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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사랑 2010-10-21 07:46:09
우선 저는 님에게 오역(잘못 번역)했다고 말씀드린 적 없답니다. 오용(잘못 적용)했다고 하였지요.. ^^
그리고 성경번역에 관하여는 님 말씀처럼 개역개정 역시 완전히 순수하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교회에서는 개역한글 성경만 인정하고 있다 미리 말씀드렸었지요.

성경번역의 역사를 잠시 관찰하다보면 개역한글 이후의 모든 번역사업은 상업성에 의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외람스럽지만 바두기님이 보신다 한 새번역성경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읽지 마시라 권유드린 것입니다)

개역한글이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 하셨나요...
성경은 말 그대로 경전(經典), 즉 변하지 않는 법식과 도리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처음부터 설탕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어 읽혀질 수 있겠습니까..

대신 성령의 감동으로 읽히우면 그 맛이 너무 달아 꿀송이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경전의 묘미입니다. (시119:103)
이는 마치 거센 파도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바다와도 같지요.

저마다 그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들어가지 않으려 하나 만일 누구든지 이를 뚫고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자는 예상외로 물결이 잔잔하여 크게 고요한 것과, 또한 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영원한 생명의 보고(寶庫)가 바다에는 가득하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어려운 것은 세월이 지나 고어(古語)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함부로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를 최소화 하기 위한 종교적 특성일뿐이지요.
(불경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경전이 어렵습니다. 쉬울수록 그 깊이가 얕아지게 되니까요)

그리고 지난번에 현재의 개신교 예배의식은 교회의 타락과 목회자 우상화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추가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협소하군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는것이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좋은 예배의식이라 평하셨는데, 꼭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자가 많았었고 또 듣는자중에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자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 말씀을 행하는 자라 하겠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좋은 예배의식이라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늘사랑 2010-10-20 13:19:29
우선 저는 님에게 오역(잘못 번역)했다고 말슴드린 적 없답니다. 오용(잘못 적용)했다고 하였지요.. ^^
그리고 성경번역에 관하여는 님 말씀처럼 개역개정 역시 완전히 순수하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교회에서는 개역한글 성경만 인정하고 있다 미리 말씀드렸었지요.

성경번역의 역사를 잠시 관찰하다보면 개역한글 이후의 모든 번역사업은 상업성에 의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외람스럽지만 바두기님이 보신다 한 새번역성경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읽지 마시라 권유드린 것입니다)

개역한글이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 하셨나요...
성경은 말 그대로 경전(經典), 즉 변하지 않는 법식과 도리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처음부터 설탕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어 읽혀질 수 있겠습니까..

대신 성령의 감동으로 읽히우면 그 맛이 너무 달아 꿀송이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경전의 묘미입니다. (시119:103)
이는 마치 거센 파도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바다와도 같지요.

저마다 그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들어가지 않으려 하나 만일 누구든지 이를 뚫고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자는 예상외로 물결이 잔잔하여 크게 고요한 것과, 또한 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영원한 생명의 보고(寶庫)가 바다에는 가득하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어려운 것은 세월이 지나 고어(古語)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함부로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를 최소화 하기 위한 종교적 특성일뿐이지요.
(불경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경전이 어렵습니다. 쉬울수록 그 깊이가 얕아지게 되니까요)

그리고 지난번에 현재의 개신교 예배의식은 교회의 타락과 목회자 우상화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추가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협소하군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는것이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좋은 예배의식이라 평하셨는데, 꼭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자가 많았었고 또 듣는자중에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자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 말씀을 행하는 자라 하겠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좋은 예배의식이라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늘사랑 2010-10-20 13:18:35
우선 저는 님에게 오역(잘못 번역)했다고 말슴드린 적 없답니다. 오용(잘못 적용)했다고 하였지요.. ^^
그리고 성경번역에 관하여는 님 말씀처럼 개역개정 역시 완전히 순수하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교회에서는 개역한글 성경만 인정하고 있다 미리 말씀드렸었지요.

성경번역의 역사를 잠시 관찰하다보면 개역한글 이후의 모든 번역사업은 상업성에 의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외람스럽지만 바두기님이 보신다 한 새번역성경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읽지 마시라 권유드린 것입니다)

개역한글이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 하셨나요...
성경은 말 그대로 경전(經典), 즉 변하지 않는 법식과 도리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처음부터 설탕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어 읽혀질 수 있겠습니까..

대신 성령의 감동으로 읽히우면 그 맛이 너무 달아 꿀송이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경전의 묘미입니다. (시119:103)
이는 마치 거센 파도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바다와도 같지요.

저마다 그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들어가지 않으려 하나 만일 누구든지 이를 뚫고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자는 예상외로 물결이 잔잔하여 크게 고요한 것과, 또한 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영원한 생명의 보고(寶庫)가 바다에는 가득하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어려운 것은 세월이 지나 고어(古語)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함부로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를 최소화 하기 위한 종교적 특성일뿐이지요.
(불경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경전이 어렵습니다. 쉬울수록 그 깊이가 얕아지게 되니까요)

그리고 지난번에 현재의 개신교 예배의식은 교회의 타락과 목회자 우상화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추가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협소하군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 듣는것이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좋은 예배의식이라 평하셨는데, 꼭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자가 많았었고 또 듣는자중에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자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 말씀을 행하는 자라 하겠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좋은 예배의식이라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늘사랑 2010-10-20 13:15:45
우선 저는 님에게 오역(잘못 번역)했다고 말슴드린 적 없답니다. 오용(잘못 적용)했다고 하였지요.. ^^
그리고 성경번역에 관하여는 님 말씀처럼 개역개정 역시 완전히 순수하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교회에서는 개역한글 성경만 인정하고 있다 미리 말씀드렸었지요.

성경번역의 역사를 잠시 관찰하다보면 개역한글 이후의 모든 번역사업은 상업성에 의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외람스럽지만 바두기님이 보신다 한 새번역성경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읽지 마시라 권유드린 것입니다)

개역한글이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 하셨나요...
성경은 말 그대로 경전(經典), 즉 변하지 않는 법식과 도리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처음부터 설탕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어 읽혀질 수 있겠습니까..

대신 성령의 감동으로 읽히우면 그 맛이 너무 달아 꿀송이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경전의 묘미입니다. (시119:103)
이는 마치 거센 파도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바다와도 같지요.

저마다 그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들어가지 않으려 하나 만일 누구든지 이를 뚫고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자는 예상외로 물결이 잔잔하여 크게 고요한 것과, 또한 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영원한 생명의 보고(寶庫)가 바다에는 가득하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어려운 것은 세월이 지나 고어(古語)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함부로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를 최소화 하기 위한 종교적 특성일뿐이지요.
(불경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경전이 어렵습니다. 쉬울수록 그 깊이가 얕아지게 되니까요)

그리고 지난번에 현재의 개신교 예배의식은 교회의 타락과 목회자 우상화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추가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협소하군요.

마지막으로,
설교를 성도와의 교통으로 보는것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하셨는데 성도와의 교통을 처음 언급한 분은 제가 아니고 Pittsburgher님이십니다.
다만 저는 이러한 기능을 부정치는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예배의 메인이 될 당위성은 부여되지 않는다 말했던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 듣는것이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좋은 예배의식이라 평하셨는데, 꼭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자가 많았었고 또 듣는자중에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자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 말씀을 행하는 자라 하겠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좋은 예배의식이라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늘사랑 2010-10-20 13:13:32
우선 저는 님에게 오역(잘못 번역)했다고 말슴드린 적 없답니다. 오용(잘못 적용)했다고 하였지요.. ^^
그리고 성경번역에 관하여는 님 말씀처럼 개역개정 역시 완전히 순수하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교회에서는 개역한글 성경만 인정하고 있다 미리 말씀드렸었지요.

성경번역의 역사를 잠시 관찰하다보면 개역한글 이후의 모든 번역사업은 상업성에 의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외람스럽지만 바두기님이 보신다 한 새번역성경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요. (그래서 읽지 마시라 권유드린 것입니다)

개역한글이 어려워서 읽기 힘들다 하셨나요...
성경은 말 그대로 경전(經典), 즉 변하지 않는 법식과 도리가 담긴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처음부터 설탕처럼 입에 착착 달라붙어 읽혀질 수 있겠습니까..

대신 성령의 감동으로 읽히우면 그 맛이 너무 달아 꿀송이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경전의 묘미입니다. (시119:103)
이는 마치 거센 파도로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지 않는 바다와도 같지요.

저마다 그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여 들어가지 않으려 하나 만일 누구든지 이를 뚫고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자는 예상외로 물결이 잔잔하여 크게 고요한 것과, 또한 뭍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영원한 생명의 보고(寶庫)가 바다에는 가득하고 있음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어려운 것은 세월이 지나 고어(古語)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함부로 가치가 훼손되는 경우를 최소화 하기 위한 종교적 특성일뿐이지요.
(불경을 포함한 세상 모든 경전이 어렵습니다. 쉬울수록 그 깊이가 얕아지게 되니까요)

그리고 지난번에 현재의 개신교 예배의식은 교회의 타락과 목회자 우상화를 필연적으로 불러온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추가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너무 협소하군요.

마지막으로,
설교를 성도와의 교통으로 보는것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하셨는데 성도와의 교통을 처음 언급한 분은 제가 아니고 Pittsburgher님이십니다.
다만 저는 이러한 기능을 부정치는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설교가 예배의 메인이 될 당위성은 부여되지 않는다 말했던 것이고요.

하나님의 말씀 듣는것이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좋은 예배의식이라 평하셨는데, 꼭 그렇다고만은 말할 수 없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자가 많았었고 또 듣는자중에 오히려 주를 대적하는 자가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존경을 나타내는 것은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 말씀을 행하는 자라 하겠습니다.
설교를 듣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좋은 예배의식이라 단정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