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남조선에만 산단 말입네까?"
"예수는 남조선에만 산단 말입네까?"
  • 김학현
  • 승인 2008.11.25 2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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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내가 본 [크로싱], '말하는 예수쟁이서, 손 잡는 예수쟁이로'

“예수는 남조선에만 산단 말입네까? 이렇게 불공평해도 되는 겁네까? 하나님도 잘 사는 나라에만 사는 거 아입니까? 아니면 왜 북조선은 저렇게 내버려두는 겁네까?”

주인공 김용수(차인표 분)가 가슴을 두들기며 울분에 차서 내뱉은 말이다.

▲ 영화 <크로싱>의 포스터. (출처 : 캠프B)
함경도 탄광촌에서 살던 세 식구는 가난하지만 단란하고 행복했다. 용수는 아내 용화(서영화 분)이 폐결핵에 걸리자 약을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벌목장에서 일하다 중국 공안의 추격으로 피해 다닌다. 인터뷰에만 응하면 돈을 준다는 말에 기획 탈북단에 들게 되고 독일 대사관 담을 넘어 들어가 남쪽으로 오게 된다.

남한에 정착한 용수는 브로커에게 줄을 대 가족의 안부를 알아낸다. 아내는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아들을 남쪽으로 데려오기 위해 열심히 돈을 모은다. 한편 아들 준이(신명철 분)는 아버지를 찾아 강을 건너다 잡혀 강제 수용소에서 노역을 한다.

천신만고 끝에 도망치고 아버지의 노력으로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의 황량한 고비 사막에 이른다. 아버지 용수 또한 몽골로 간다. 아들 주려고 비타민을 가져갔는데 아둔한 몽골 공항에서는 불순한 약으로 여겨 그를 가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을 때 이미 준이는 굶주림으로 죽고 만 싸늘한 주검이 된 후였다.

엇갈림, 이 참혹한 현실을 어이할까?

용수는 그렇게 축구라면 죽고 못 살던 사람이 축구 경기 중계도 안 볼 정도로 아들만을 생각한다. 그렇게 하여 모은 돈으로 브로커를 사고, 결국 몽골 국경을 통해 아들을 탈출시키게 된다. 그들이 만날 전날 아버지와 아들의 전화 통화 내용이다.

“준이야, 준이야!”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 잘못했슴다. 잘못했슴다. 약속을 못 지켰습니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일 없다. 일없다. 준이야.”

“아버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너무 보고 싶습니다.”

“준이야, 아부지도 우리 준이 많이 보고 싶다. 하루 밤만 지나면 아부지 만날 수 있다. 아부지가 준이 줄라고 축구 볼도 샀다.”

“아부지, 아부지, 너무 보고 싶습니다. 너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었다. 아들의 주검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것이 전부. 살기 위해 헤어졌던 사람들이 죽어서야 만난다. 이들의 운명은 이렇게 크로싱, 엇갈리고 만다. 감독은 도저히 해피엔딩으로 결말지을 수가 없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58년 동안 우리는 그런 엇갈린 운명으로 꺼억꺼억 울고 있다. 용수만 우는 게 아니다. 아직도 많은 우리 동포들이 그 질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저쪽에서 운다. 남자에게 눈물은 무엇인가. 나는 장면들이 저질러놓은 무참함에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을 안 흘리면 그들에게 죄를 짓는 것처럼만 생각되어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 영화 <크로싱>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출처 : 캠프B)
예수쟁이의 힘은 말에 있지 않다

하지만 눈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한겨레 됨의 의무, 아니 예수쟁이의 의무를 다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니다. 분명 아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진보와 보수라는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이들은 사사건건 대치한다. 촛불을 들자면 촛불을 끄자 한다. 촛불을 끄자 하면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북을 도와주자 하면 퍼주기는 안 된다고 한다. 퍼주기는 안 된다고 하면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 한다.

이 두 진영의 질펀한 싸움이 벌어지는 순간에도 북에서는 한 아이, 한 아이 죽어 널브러진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린도전서 4장 20절)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소원한다면(모든 그리스도인이 고백하는 신앙신조다)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게 무슨 유익인가. 또 이런 말도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야고보서 2장 16절)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우리는 왜 말싸움만 할까.

▲ 영화 <크로싱>에서 아들 준이와 축구를 즐기는 아버지 용수.(출처 : 캠프B)
그들 진영에만 사는 예수

진보 진영은 말한다. 자신들이 예수 편이라고. 보수 진영 또한 지지 않고 말한다. 자신들이 예수 편이라고. 그러나 예수는 그들을 보며 머리를 흔드신다. 그 누구 편도 아니라고. <크로싱>의 대사가 다시 가슴을 후벼 파고 들어온다.

“예수는 남조선에만 산단 말입네까?”

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예수는 남한에도 안 삽니다. 다만 보수 진영엔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예수가, 진보 진영엔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하나님이 존재할 뿐입니다.”

자, 이제 예수쟁이들만의 예수 말고, 예수쟁이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갇혀버린 하나님 말고, 저쪽에서도 ‘남한과 북조선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들이밀 때가 아닐까. 그러자면 말싸움이 아니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만 할 필연성 앞에 섰음을 알아야 한다.

참 다행인 것은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이 영화는 봐야 한다고들 말한다. 함께 보며 말하는 예수쟁이의 탈을 벗고, 손을 잡는 예수쟁이로 바뀌면 어떨까. 행동하는 예수쟁이들의 참맛을 보여주면 어떨까?

김학현 / 안디옥교회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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