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에 빠진 신학
실용주의에 빠진 신학
  • 정용섭
  • 승인 2008.05.2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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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신학 교육이 당면해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 시대가 요청하고 있는 '실용성'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목회의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만을, 또는 그런 기준에서만 신학적 담론이 운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신학대학의 교육 과정은 이론 과목보다는 실천 과목에 집중되며, 이론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현장의 쓰임새라는 관점에서 주로 접근되고 있다. 신학대학의 고급 과정에 있는 학생 대부분이 목회 상담을 전공한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확인시켜준다. (대구에 있는 모 종합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그렇다.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이 대부분 목회 상담을 전공으로 한다).

물론 신학이 실용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의 요청에 귀를 막고 고고하게 비현실적인 관념의 세계에 빠져버리거나 '고담준론(高談峻論-뜻이 높고 바르며 엄숙하고 날카로운 말)'에 머물러 있는 게 능사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당연하게 물(物)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게 교회의 사명이며, 그리고 기본적으로 신학이 교회의 기능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실용적 가치를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런 실용성이라는 게 과연 '참된 것(reality)'인지 아닌지에 대한 충분한 반성 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그것에 휩싸여버리는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값싼 '대중추수주의(populism)'에 불과하다.

이 시대의 실용주의적 치우침 현상은 일반 대학의 교육 과정이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개론 과목이 교양 필수에서 교양 선택으로 바뀌고 대신 영어나 컴퓨터에 연관된 과목들이 교양 필수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이 학생들조차도 대학 공부를 단순히 취업의 기회로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런 실용주의적 치우침 현상은 극으로 치닫고 있다. 대학(大學, University)은 동양의 틀에서 볼 때 '큰 배움'이며, 서양의 틀에서 '보편적 가치'인데도 어느 사이에 하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신학대학도 역시 목사 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한 학원 기능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실용주의가 참된 진리 제공할 수 있나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全)지구적인 문제라 할 수 있는데, 그 밑바닥에는 '경제만능주의'가 뿌리를 박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0여 년 동안 지속된 이데올로기 경쟁 구조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허물어지고 순전히 경제 일원론적인 경쟁 구조로 전환되었다.

특히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가 완전히 몰락한 이후 자유 시장 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독주 체제가 형성되자 모든 세계가 경제적 가치만을 최우선으로 삼게 되었다. WTO, FTA,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경제 전문 용어가 촌부와 아낙네들에게도 일상어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이 세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경제 중심의 일방적 구조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경제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지구의 단일 경제체제 구상이 본격화되면서 이런 경쟁 구도는 우리의 현실 삶에 훨씬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이런 전반적인 경향을 '신자유주의'라고 하는데, 민족, 이데올로기, 종교 같은 차이를 넘어서서 온 세계를 자유로운 경쟁 체제 안에서 새롭게 구축하자는 말이다. 이는 나쁘게 볼 때 토끼와 거북이를 같은 조건에서 달리기 경주를 시키자는 것이며, 좋게 해석해서 지구 전체의 복지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이런 자유 경쟁 구도를 견인해나가고 있는 선진국들의 구상대로 흘러갈지,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나게 될지 우리는 전혀 예단할 수 없다. 다만 이런 시대정신은 물적 토대를 확대시킴으로써 인간의 복지를 꾀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와, 그리고 자본의 횡포로 인하여 벌어진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산자 계급이 주도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에 내재하고 있는 일종의 물신주의가 그 역량을 지속시키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결국 물적 토대의 확립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모든 학문이 실(實)과 용(用)의 범주 안에서만 작동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외면상 서로 상반된 이념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  구원을 유물론적 토대에서 확보한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걸었던 사상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그 방식으로 채택하는 반면에 공산주의는 상당히 통제된 국가 경제를 채택했다는 것이다. 시장 경제와 국가 경제라는 경제 용어가 여기서 바르게 사용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경제를 시장 논리에 완전히 맡겨 두는가, 아니면 국가가 통제하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구분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에서 사라진 현실 사회주의인 공산주의와 현재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서로 접근 방식만 달랐을 뿐이지 인간 삶과 역사를 물질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점에서는 이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물적 토대에 근거한 일원론적 실용주의가 과연 우리의 삶에 참된 내용을 채워주고 있는지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이 좁혀질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주장들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구구한 논의를 벌일 필요가 없다. 다만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런 현상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신의 부재로 인한 인간의 허무주의가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격동의 20세기가 끝나면서 더 이상 자신의 열정을 불사를만한 대상(이념 논쟁)이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영원한 욕망 대상이었던 경제적 만족감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설교 조의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아마 이런 현상은 그렇게 길게 가지 못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경제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대우 다양한 글로벌 이벤트를 생산해내겠지만 그것도 제한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빵'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문제의 해결은 인간 자체만의 힘으로는 결코 가능한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가 또 다시 역정을 내겠지만 인간에게 있는 '삶에의 의지'는 그것이 아무리 본질적이고 강렬하다고 해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식에 관해 집중해야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신학은 이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들의 실용주의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인식에 관해 집중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물적 토대보다 훨씬 실제적인(real) 사태다.
 
여기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신학이 하나님의 존재론에 관한 질문과 대답에 그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의 연관성이 간과되어도 괜찮다는 말은 아니다. 흡사 사막의 수도승들처럼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만이 참된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 영적인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일단 이 세상과 저 세상, 즉 차안과 피안을 이원론적으로 차단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신학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을 이식한 미국 선교사의 신앙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늘나라에 갈 테니까 아무런 걱정 근심을 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그런 노예와 주인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시키는(status quo) 신앙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즉,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의 삶을 추상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적인 삶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힘으로 어떤 절대적인 세계를 끌어내거나 더 나아가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도 역시 기독교적인 태도는 결코 아니다.

신학은 이 두 영역을 경계로 삼고 있다. 신학은 '차안적 현상'과 '피안적 본체', 또는 물(物)과 영, 구체성과 보편성 사이의 경계에서 참된 리얼리티를 확보하려는 작업이다. 이를 위해서 신학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초월과 내재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인식 사이에 벌어지는 변증법적 작용이 바로 신학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정용섭 / 샘터교회 목사·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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