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적 설교를 복음이라고 외친 죄
실용주의적 설교를 복음이라고 외친 죄
  • 송태근
  • 승인 2008.06.03 16: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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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의 죄악 앞에 선 교회, 참된 회개와 십자가 영성 회복해야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이 노래는 70~80년대 개발 독재 시대에 어린 노동자들의 고달픈 삶을 노래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노래Ⅱ집에 나오는 가사이다.

꽃이 피고 봄이 와도, 뭉게구름 짧은 셔츠 여름이 와도, 찬바람 소슬바람 가을이 와도, 흰 눈이 온 세상 소복이 쌓여도……. 이렇게 풍요로운 4계절이 바뀌어도 노랫말 중 바뀌지 않은 후렴 같은 가사가 있다.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빠른 박자의 가사이다.

칙칙하고 암울했던 개발 독재 시대에 우리의 어린 누이들과 딸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는지도 모른 채 차가운 기계인 미싱 앞에 앉아서 수출의 첨병이 되어 부지런히 페달을 돌렸다. 그때 우리는 그들을 ‘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렀다.

그 공순이 공돌이라 불리던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과 피를 거름삼아 이 나라는 어느새 국민총생산(GNP) 14,000불을 넘는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그런데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나? 거리에서 독재 정권과 맞서 최루가스 마시고 돌멩이를 던지던 이들이 힘과 권력의 한복판에 서 있다. 가히 세상의 축이 바뀌는 대변혁을 맞았건만, 빈부의 격차는 ‘양극화'라는 이름으로 더욱 뚜렷한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못 사는 사람은 더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고, 잘 사는 사람은 더욱 잘 사는 구조적 모순의 한계 앞에 교회나 정부나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신앙

오늘날 이러한 구조적 모순의 한계 한복판에는 강대국 또는 힘을 가진 자의 일방적 논리가 신자유주의 경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 사상은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고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F.A 하이에크가 주장한 이론으로, 시장은 정부의 개입이 최소화 되었을 때 훨씬 더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소위 무한 경쟁으로 시장의 질서 그대로 두라는 뜻이며,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믿으라는 사상이다.

그들의 논리는 시장을 자생적으로 두면 시장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단순한 경제 이론을 넘어서 시장주의에 대한 일종의 근본적인 종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교회와 정부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의 무서운 오류와 함정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사상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경 속의 이웃의 개념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발전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낳는다. 그 결과는 전 세계 인구의 상위 5%가 전 세계 부의 90%를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강대국의 경제 논리에 약소국들을 줄 세우고 있다. 경쟁도 안 되는 약자를 상대로 온갖 경제적 팔 비틀기를 통해서 굴복시킨다. 이러한 양극화는 많은 사회적 문제와 국제적인 테러와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유 시장 경제 원리 아래 무한 경쟁의 시대를 외치는 신자유주의 권력 앞에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순전한 기독교로 돌아가야 할 때

지금은 우리 교회는 양극화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양극화 사회의 문제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극히 일부분의 문제라고? 아니다! 한국 교회는 적어도 이러한 양극화된 조국의 현실을 정부의 책임만으로 돌리는 몰염치함과 뻔뻔함을 회개해야 한다. 어쩌면 교회가 이러한 문제의 진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 말은 결코 심한 말이 아니다. 첫째는 물질 만능주의적인 실용주의적 설교를 우리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외쳐 왔다. 이것을 먼저 회개해야 한다. 둘째는 회개와 함께 한국 교회는 새로운 복음의 기초를 다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영성을 새롭게 학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 교회의 자폐적 세속주의를 고칠 수 있다.

과시와 허세의 유혹으로부터 순전한 기독교로 돌아가는 길이 양극화를 극복하는 길이다. 교회가 십자가의 참된 정신만 회복해도 양극화는 저절로 없어진다. 기독교가 말하는 종말론적 역사관을 회복할 때 그 가치에 맞는 삶을 회복할 수 있다. 그 새로운 기초 위에 이제는 개 교회주의의 우상을 버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웃 사랑’에 대한 사랑의 전사가 되어서 개 교회의 이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눔의 혁명적 실천을 해야 한다.

결국 ‘양극화 극복'이라는 사회적 거대 담론은 경제적인 접근의 논리나 정치적인 논리로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차원에서 영적인 질서와 성경의 근본적인 실천의 회복으로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송태근 / 강남교회 목사
* 이 글은 2006년 1월 쓴 것이므로 시제에 차이가 약간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가 강화되고 교회가 이에 밀착하는 현상이 짙어지는 요즘 필요한 글이라 판단되어 저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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