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래,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얼래,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 김명곤
  • 승인 2008.12.10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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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다섯 그루 아래서 '간첩'이 되었던 친구 이야기

올해 추수감사절에 맛본 터키 고기(칠면조)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평소 맛도 없고 퍽퍽한 느낌만 있던 '터키 맛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져본 적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반나절 정성들여 터키를 구운 대학 2학년생 딸에게 "아가야, 너 시집가더라도 터키는 집에 와서 구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추수감사절에 포도주를 곁들여 터키를 맛있게 먹고 기분 좋게 소화시킨 것은 딸애가 터키를 잘 구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 한인 동포들이 그렇듯 저도 터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20여 년 간을 미국에 살면서도 추수감사절에 터키 고기를 먹어본 적이 드물고, 어쩌다 미국 문화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먹긴 했지만 뒷맛이 '영 아니다'는 느낌을 갖곤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올해도 '그 맛이 그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팔짝팔짝 뛸 정도로 기분 좋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여러 번 포크질을 한 것 같습니다. 20수 년 묵었던 체증이 한꺼번에 쑤욱 내려간 느낌을 받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아니, 엄청난 빚더미에 가위눌려 있다 한꺼번에 탕감 받은 기분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며 서두를 길게 늘어놓는지 궁금하시지요?

   
 
  ▲ 5공 시절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이었던 오송회 사건. 관련자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소식을 담은 <오마이뉴스>.  
 
버스에서 들은 '간첩단 일망타진' 뉴스

추수감사절 하루 전날 고교 시절 짝꿍이었던 친구가 26년 전 억울하게 '오송회' 간첩단으로 몰려 오랫동안 낙인이 찍혀 살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저는 미국 추수감사절인 11월 27일 저녁 부엌에서 터키가 막 익어가던 시간에 인터넷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하고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1982년 어느 날, 서울의 버스에서 친구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디오에서 간첩단이 '일망타진'되었다는 소식이 나왔는데, 거기에 친구 이름이 끼어 있었던 것입니다. 긴가민가하다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을 보고서야 '간첩'이 된 친구를 확인했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친구의 제자 네 명이 같은 학교에 근무하며 친하게 지내던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빌린 월북 시인 오장환이 쓴 '병든 서울'과 김지하의 '오적' 등이 실린 시집을 엉겁결에 버스에 놓고 내렸습니다. 이를 본 신고 정신이 투철한 버스 안내양이 경찰서로 달려갔고, 시집은 '간첩단'을 엮어내고 '일망타진'하는데 결정적 단서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날 오후, 장래에 장인어른이 될 분이 남녘에서 "혹 오늘 붙잡힌 '간첩'이 자네 친구가 아닌가 걱정 된다"며 사귀던 여자 친구를 통해 제게 전해왔습니다. 저는 마치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처럼 "친구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전해 달라"고 그랬습니다. 잘 보여야 결혼이 보장될 상황에서 찍히기는 싫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후로 친구의 소식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들었습니다. 임신한 부인이 푸석푸석한 얼굴로 면회를 다니고 있는데, 가족들이 이혼을 종용한다는 소식도 들었고, 고문 때문에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가슴 아프면서도 겁나는 얘기더군요.

1975년 대학 재학생 시절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에 항의하는 데모를 하다 붙잡혀 두들겨 맞고 14장짜리 조서 쓰고, 각서 쓰고 풀려났습니다. 그 뒤, 한여름 농활 끝에 군대에 끌려갔다 '2개월 면제 혜택'도 받지 못하고 제대한 경험이 있던 저로서는 면회를 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중고 시절 통학을 함께하며 노작거리다 "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면서 호떡도 나눠먹고 삼각 비닐 오렌지 주스로 물총 장난질도 치고 패싸움도 함께 했던 친구였지만 '간첩'을 면회 가기에는 꽁꽁 얼어붙은 겨울 공화국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너무 매서웠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어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 고3 시절 어느날, 하숙집에 찾아온 친구(뒷줄 가운데)와 필자(뒷줄 맨 오른쪽), 그리고 함께 지내던 친구들은 '고3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소주를 몇 잔 나누고 얼큰한 기분에 월명공원에 올라 수시탑 앞에서 잔뜩 폼을 잡고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이후로 20수 년이 지나며 어딘가에서 중학교 교사를 한다던 친구 소식을 얼핏 접하면서 명치끝이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만 쌓여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머나먼 이역 땅에서 '무죄' 판결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너무 반가운 마음에 인터넷 기사에 '친구, 축하한다'는 제목으로 편지 형태의 댓글을 올렸습니다.

그날 정오 뉴스였지 아마 서울 어느 모퉁이 버스에서 간첩단이 '일망타진' 되었단 소식을 들었던 게 내 고삐리 통학 구역 짝꿍이 간첩이라네, 빌어먹을. 허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이시. 껄렁패로 욕먹던 그 무슨 클럽 멤버랍시고 으쓱대던 친구가 간첩이라네, 허허. 다음날 아침 신문 ‘간첩단 계보'에 시푸르죽죽한 친구 얼굴 올라있는 걸 보고 어, 정말 내 친구가 간첩이 되었네. 빌어먹을.

다섯 성인이 소정방에게 죽었다던 오성산 칙 뿌리 할미꽃 진달래 고사리 지천으로 널려있던 높은 산 오성산 옆구리에 놔두고 하필이면 야산 소나무 밑에서 다섯 명이 모여 앉아 '병든 서울'에 울분을 토하고 울컥거리는 가슴으로 소주잔 기울이며 5·18 광주학살 4·19 영령들을 달랬다지 아마. 그래, 이름도 그럴싸한 '오송회' 간첩단이 되었다지. 빌어먹을.

얼마 뒤 친구가 수감되었다는 소식, 아내가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면회를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네. 얼어붙은 땅에서 나는 숨죽여 웅얼거리곤 했지. 석탄 냄새, 군고구마 냄새, 풀풀 나는 군산 공설운동장 모서리를 돌며 호떡 나눠먹고 세모난 비닐 오렌지 주스로 물총 장난을 치며 시시덕거리던 친구가 간첩이라네, 빌어먹을. 그리고 20수 년 종종 친구를 생각할 때마다 왜 이리 명치끝이 답답할꼬 머리를 흔들었지

그래, 이 저녁에 머나먼 땅 석양빛 속에서 친구의 무죄 소식을 들으니 이제야 가슴이 뻥  뚫리는 구나 난 왜 이렇게 뒷북만 칠까. 근데 하도 억울해서 반미치광이로 살다 죽었다던 시인 친구는 원통 절통해서 어쩐다냐. 귀밑머리 희끗희끗할 나이에 무죄라니. 그나마도 얼마나 감지덕지냐. 에라이, 빌어먹을. 그래도 '푸른 혼'의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하네. 만세, 만세, 흑흑흑. 친구 축하한다, 축하한다, 축하한다, 미안하다.

저는 다소 감상어린 투의 이 편지를 친구에게 쓰면서 얼마 전 읽었던 김원일의 실화 장편 소설 '푸른 혼'이 떠올랐습니다. 그 소설은 소위 말하던 인혁당 간첩 조작 사건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재심 청구 기회도 없이 처형된 8명의 삶의 궤적을 그린 것입니다. 인혁당 판결은 재판 절차의 초법성 때문에 세계 사법사상 '가장 추악하고 치욕스러운 판결'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들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미 민청학련 사건과 연계된 인혁당 사건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여름에 그 소설을 읽으며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상이 좋아지고서야 '완전 조작'이라는 판결을 받았지만, '푸른 혼'이 된 8명과 그 가족들은 우리 땅에서 천형과 같은 간첩 누명을 쓰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친구는 다음날 저의 편지를 발견해 읽고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온갖 고문으로 반병신이 다 됐다던 친구는 이제 제법 혈색도 좋아지고 구속될 당시 새색시 뱃속에 있던 딸아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더 반가운 소식은 조용술(작고), 오충일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에서 장로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전언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편지 끝머리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반갑다, 반갑다, 고맙다"

   
 
  ▲ 고3 시절 친구(왼쪽)와 학교 교정에서 찍은 사진.  
 
친구가 좋긴 좋은 모양입니다. 면회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전화 한 통도 하지 않은 제게 "반갑다, 고맙다"고 하다니.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친구의 무죄 판결과 관련하여 추수감사절 터키를 맛있게 한 또 하나의 소식이 있습니다. 재판을 맡은 이한주 부장판사(52)라는 분이 판결문에서 사법부의 이름으로 오송회 관련자들에게 절절하게 사과한 일이었습니다. 부장판사의 판결문 가운데 이례적으로 긴 사과문의 뒷부분만 옮겨봅니다.

재판부 내 3인의 법관은 한 치의 이견 없이 확신을 갖고 무죄를 선고한다.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사법부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피고인들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앞으로도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 이것을 통합 조정해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할 것을 다짐한다. 어떠한 정치권력이나 이익단체로부터도 간섭받지 않고 독립해,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할 것을 다짐한다.

재판부는 내부적으로 관료화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개인 안위가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재산 보호 책무에 충실해야 함을 이 사건을 통해 깨달았다. 법대에서 그 누구,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정의의 실현에 매진할 것을 스스로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는 이 판결문을 읽고 또 읽으면서 "아, 아직도 세상은 살 만 하구나" 그렇게 읊조리며 제 빚의 일부를 덜어준 판사님들에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할 것"과 "법대에서 그 누구,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정의의 실현에 매진할 것"을 다짐한다는 구절이 적어도 이들 세분의 판사님들에 의해 '굳게, 그리고 계속' 지켜지는 기쁨을 누리기를 기대하기로 했습니다.

이래저래 이번 감사절은 정말 기분 좋게 보냈습니다. 해묵고 해묵은 가슴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 좋은 감사절, 저는 팔짝팔짝 뛰는 기분으로 이 기쁨을 바보처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편집인

오송회 사건이란?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이다. 버스 안에서 월북 작가 오장환 씨의 시집 <병든 서울>의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시작이 됐다. 버스 안내양에 이 시집을 경찰서에 갖다줬고, 경찰은 이를 추적한 결과 군산제일고 교사들의 모임을 포착했다. 경찰은 이들을 간첩단으로 엮기 위해 5명이 소나무 숲에서 모였다며, '오송회'라는 이름을 만들고, 군산제일고 교사 고정 간첩단'으로 몰기 위한 로드맵을 작성했다. 이로 인해 조성용 씨 등 관련된 사람 9명이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하고 불온 유인물을 탐독한 혐의로 많게는 징역 1년에서 적게는 7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지난 12월 26년 만에 '오송회' 사건에 대한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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