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토론 공화국을 꿈꾸며
기독교 토론 공화국을 꿈꾸며
  • 정재영
  • 승인 2009.06.10 2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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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자살, 분향소···'시대의 아픔을 안고 토론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우리 국민 모두에게 큰 충격을 준 사건이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였던 분조차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다.

우리 사회는 이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동정을 넘어 분노를 표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 더하여 기독교인들은,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을 들며 설왕설래하고 있다.

이슈 1. 자살에 관하여

물론 어떤 이유로든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기독교의 관점에서나 사회의 관점에서나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자살은 명백히 성경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자살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신성한 부르심에 대하여 거역하는 것이므로 매우 큰 범죄이다.

사회의 관점에서도 자살은 바람직하게 여겨질 수 없다. 자살은 한 개인이 극도의 절망감에 쌓여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극단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사회 안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그 사회가 올바른 규범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률은 우리 사회 규범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거나 관철할 목적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신성함을 저버리는 행위로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사람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존속마저도 위태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것은 생명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개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회에 속한 개인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규범을 갖도록 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살에 이르게 한 구조적 조건을 개선하지 못한 사회 전체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자살이라는 행위를 비난한다면, 동시에 우리의 동료가 자살에 이르게 한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도 그만큼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데 더 익숙하다. 자신의 생각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에게도 이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이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도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경우, 자살이 기독교 전통 안에서 부정적으로 여겨져 온 것을 도구 삼아 망인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흔히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 이러한 말이 생긴 것은 자살한 사람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자살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논리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조차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말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권한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이보다는 기독교의 관점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아픔을 겪지 않도록 사회의 조건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슈 2. 기독교 대학 내 분향소 설치에 관하여

이번 일과 관련하여 또 하나 이슈가 된 사건은 기독교 대학을 표방하는 한 대학에서 대학 교정에 분향소를 설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어 기독교인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외부인의 관점에서 가타부타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특정 공동체가 내부의 의견을 수렴해 어떤 합의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외부인들은 그것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 누구보다도 당사자들이 더 많이 고민하고 함께 씨름해서 합의에 이르렀다면, 외부인이 자신의 견해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를 비기독교인들이 (공공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든가, 또는 어떤 외국의 저명한 신학자라고 해도 우리의 정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제로 한국에 온 많은 신학자들은 한국 교회의 문제에 대하여 논평하기를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분향소를 설치하든, 분향소를 설치하는 대신에 우리 사회를 위해서 기도를 하든 어느 것이 명백하게 옳고 그른 행위라고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영화 '미션'에서 멘도자 신부와 가브리엘 신부 중 누구의 행위가 옳은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들 모두 각자의 삶의 정황에서 옳다고 생각한 방법을 통해서 신앙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전통에서 고민하고 토론하며 합의에 이르렀다면 어느 쪽이든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 충분한 논의와 적절한 의사소통 과정을 거쳐 합의에 이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재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해당 대학 내부에서 협의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이의가 제기된 것은 해당 공동체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합리적인 토론 과정을 거쳐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진지하게 토론할 때

문제는 시대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며 남의 일인 양하는 태도다. 아무리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사망하면 동정이라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전직 대통령이 서거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조문하며 슬퍼하는 마당에 자신의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다며 이런저런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의 아픔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입장에 따라 편을 가르기보다는 한 시대를 사는 이들과 함께 고민하며 그들과 교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을 모색할 때에는 상대방 눈 안에 있는 티끌을 섣불리 지적하기 전에 자신의 눈 안에 있는 들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윽박지르기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대화하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땅을 사는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토론은 강단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강단에서 선포되어야 하지만, 인간의 생각은 강단 아래서 지위의 높낮음 없이 동등하게 개진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목회자와 평신도가 아니라 그저 기독교인들만이 있을 뿐이다. 강단에서조차 주장이 난무하고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양 강요하는 이때에,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고민하며 토론에 참여하는 진지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그립다.

정재영 교수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종교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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