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 길희성
  • 승인 2009.01.16 10:2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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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7 : 22 ~ 29

가을이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됩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시인의 기도대로, 모두가 또 경건하게 되고 기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 같습니다.

잎으로 무성했던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누구나 시간의 무상함과 생명의 유한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봄이 생명의 탄생과 환희를 노래하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생명의 소멸과 덧없음을 의식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도대체 이 모든 생명의 나고 죽음은 무엇 때문이며, 끝없이 되풀이되는 생명의 순환 과정이 어떤 의미나 목적 같은 것이 있는 것인지 우리는 묻게 됩니다.

▲ 표준새번역은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나고'는 문자 그대로 '그로부터'라고 해야 하며, 마지막 구절 '그를 위하여 있다'는 번역은 정말 문제가 많은 번역입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이 그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이러한 되풀이 되는 계절의 순환과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우주만물의 존재의 뿌리가 되며 생명의 근원이 되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장 36절에서 '만물이 그로부터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향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 안에서 존재와 생명을 유지하다가 종국에는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자 나중이며 또 중간이라는 말입니다.

최근의 표준새번역은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나고'는 문자 그대로 '그로부터'라고 해야 하며, 마지막 구절 '그를 위하여 있다'는 번역은 정말 문제가 많은 번역입니다. 명백한 오역입니다. '만물이 그를 위하여 있다'는 말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이 그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간단히 전치사 3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ex, 즉 from, dia 즉 through, 그리고 eis 즉 to, toward 혹은 into라는 전치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 우주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을 통해서 존재와 생명을 유지하다가 하나님을 향해 혹은 하나님 안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의 알파와 오메가일 뿐 아니라, 현재 잠시 존재하는 것들도 모두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아침 봉독한 유명한 그의 아테네 설교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을 위해 있다'는 표준새번역의 번역은 정말 한심한 번역입니다. 바울 사도는 아테네 설교에서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통쾌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아쉬운 것이 있어서, 어떤 필요가 있어서, 다시 말해 자신의 무슨 필요나 영광을 위해서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아닙니다. 더욱이 만물 위에 군림하면서 홀로 섬김을 받고 홀로 영광을 받는 우주의 전제군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을 할 때 툭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마치 종이 주인을 섬기듯,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종처럼 필요로 하거나 부리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헌금 몇 푼 내면서, 교회 봉사 좀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일,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돕는 것처럼,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허위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 종종 '당신 홀로 영광 받으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좋지 않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나누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것을 독점하는, ‘홀로 영광 받기를’ 즐기는 이기적 존재로 오해하게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모독하기 쉬운 기도입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는 뜻에서 그렇게 기도하지만, 정말 하나님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즐기시는 분인지, 우리가 정말 그런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인지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 음악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가사, '당신 홀로 거룩하시도다'(tu solus sanctus)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좋습니다. 피조물들이 아무리 아름답고 좋다 해도 거룩하지는 않고 하나님 홀로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자기 혼자만 섬김을 받고 자기 혼자만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이기적 존재, 독재군주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도처럼 '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님의 나라가 임하시며 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는 훌륭한 기도지만, '주님 홀로', '당신 홀로' 식 기도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비그리스도교적인 기도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낳은 자식과도 같은 피조물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도대체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 우리의 존재와 생명과 호흡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빌린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일뿐입니다.

오늘 인용한 바울 사도의 두 말씀, 즉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존재한다는 로마서의 말씀과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다' 혹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아테네 설교 말씀은 현대 신학적 술어로 표현하면 이른바 범재신론(panentheism), 즉 만물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이 만물 안에 존재와 생명의 근원으로 계신다는 신관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만물 그 자체가 신이라는 범신론과 구별되고, 그렇다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자를 엄격하게 존재론적으로 구별해서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 계시는 존재처럼 여기는 전통적 신관을 거부하는 제3의 신관으로 최근 많이 거론되는 제3의 신관입니다. 범재신론은 바울의 말씀대로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는 신관입니다.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 만물의 자궁과 같이 그 출처가 되며 존재와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하나님,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그리로 돌아갈 고향과 같은 하나님, 그리고 현재도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뿌리이신 하나님, 그래서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우신 하나님, 이런 내재적 하나님을 오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높이 계시는 하나님, 벌벌 떨면서 복종하고 섬겨야 되는 하나님, 우주 만물을 지배하고 통치하시며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를 좋아하는 우주의 독재자 같은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나누어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지극히 가까이 계시는 분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주의 독재자 같은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나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나누어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지극히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사진은 에반올마이티의 한 장면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배우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하나님과 세계, 창조주와 피조물, 무한자와 유한한 사물들을 이분법적으로 구별하고 이원적으로 분리해 온 전통적인 신관,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해온 하나님신앙은 크게 네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가부장적 권위주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배자, 통치자, 어머니 하나님처럼 친근하고 자애로운 존재이기보다는 엄격한 가부장적 아버지 하나님으로, 섬겨야 할 주인 혹은 주님으로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격절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며, 셋째는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도외시함으로써 만물의 신성성을 박탈해서 오늘날 환경위기의 이념적 주범이 되었다는 비판입니다. 네 번째로, 무엇보다도, 신을 자연 밖에서 자연을 움직이거나 자연에 개입하는 이른바 '초자연적'(supernatural)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신앙을 낳음으로써 자연 이외의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근대 과학적 자연주의 세계관과 충돌하면서 서구세계에서 무신론이라는 것을 낳게 되었다는 심각한 문제점입니다.

최근 영국의 한 사람이 광고 운동을 펼쳤는데 '하나님은 없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인생을 즐겨라'는 문구가 적힌 광고물을 런던의 시내버스에 부착하는 운동을 벌였다는 뉴스가 해외토픽에 실렸습니다. 문제는 어떤 하나님, 그가 부정하는 하나님이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인데, 답은 뻔합니다. 서구 문화를 지배해온 대중적 신관, 즉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자기 스스로 만들어놓은 자연의 질서를 어기고 기적을 행하시는 초자연적 신, 가부장적이고 독재 군주 같은 하나님,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세세히 간섭하고 감찰하다가 사후에 벌을 내리는 심판주 하나님, 뭐 대충 이런 것이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이 그런 존재인지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무신론 광고 운동에 동참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 가부장적 신관이 자기 자신을 잡아먹는 무신론을 처음부터 잉태하고 있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제가 인류의 종교사를 공부하면서 깨달은 하나의 중요한 진리가 있다면, 우리가 서양에서 빌려와서 사용하고 있는 무신론(atheism)이라는 개념은 비서구 문화권, 혹은 적어도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이라는 3대 유일신 신앙이 지배하지 않는 문화권, 가령 인도나 중국이나 동아시아 문화권이나 아프리카 문화권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별 의미가 없는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서구 무신론자들이 제창하고 있는 엄밀한 의미의 무신론은 성서적 유일신관, 초자연적 신개념이 낳은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 신관에 따라 본의 아니게 자연으로부터 신성(divinity)을 분리시킨 다음 신을 몰아냄으로써 자연을 철저히 세속화시킨 서구 역사와 문화는 실로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지극히 예외적 현상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가 지배했던 서구 문화에서 제일 먼저 무신론적 세계관, 기계론적 자연관, 유물론적 자연관이 일반화되게 되었고 자연은 성스러운 힘이나 신성성을 상실한 채 아무 제동 없이 인간의 탐욕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여 인간 마음대로 정복하고 착취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지구적 환경 위기의 이념적 원천이 되었다는 비판은 현대 그리스도교가 반드시 귀담아 경청하고 철저히 반성해야만 하는 지적입니다.

다신신앙, 혼령이나 신령을 믿는 신앙, 우리가 애니미즘, 샤머니즘이니 혹은 원시 신앙이라고 곧잘 폄하하는 소박한 신앙이 지배하는 문화에서는 무신론은 없습니다. 다양한 사물들의 배후 혹은 그 바닥에 하나의 근원적 실재가 깔려 있다는 내재적 신관 내지 철학적 일원론이 지배하는 인도나 아시아, 중국 문화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막연하나마 자연에 어떤 성스러운 힘이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신비한 실재 내지 영적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딱 부러지게 신을 부정하고 철저히 세속화된 세계에서 세속적 삶을 살기를 주장하는 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 신관과 부단히 싸움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온 서구의 세속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며, 결국 그 뿌리와 원인 제공은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적 신관이 한 셈입니다.

▲ American Humanist Association이 워싱턴 DC 일대를 운행하는 로컬 버스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광고문을 게재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서구 무신론자들이 제창하고 있는 엄밀한 의미의 무신론은 성서적 유일신관, 초자연적 신개념이 낳은 부산물입니다. 
무신론은 하나님을 일방적으로 우주만물과 멀리 떨어져서 저 하늘 높이 계시는 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세계나 물질계 그리고 육체를 지니고 사는 이 현세에서는 만나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오직 사후에 영혼 홀로 하늘나라로 가서 만나는 초월적 존재로 간주해온 서구 신학의 잘못된 신관이 낳은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과 풍토에서 발달한 과학 기술과 근대  산업 문명은 지금 세계 어디서나 자연계로부터 철저히 하나님을 추방해버렸습니다. 말로는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라 주장하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라 말하지만, 실제상 세계를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근대 세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근본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바울 사도의 신관에 의하면, 세계와 하나님, 유한한 사물들과 무한자는 상호 대립적이거나 배타적일 수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유한한 사물들을 감싸고 있으며 지탱하고 있고, 유한한 것들은 무한자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과 단 한 순간이라도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것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유한한 것들은 무한자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그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잠시 존재와 생명을 누리다가 결국은 그에게로 되돌아갑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가 되고 모든 생명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문자 그대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라는 표현 자체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즉 공간적으로 이해하면 문제가 많습니다. 무한한 하나님을 마치 어떤 하나의 유한한 사물처럼 생각해서 이 하나님과 만물과의 관계가 마치 공간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무한자 하나님에게 안과 밖이라는 공간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굳이 '안'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면,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만물 안에 있다는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한한 사물들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밑바닥에 자리하고 계시면서 동시에 모든 유한한 것들을 감싸고 품고 계시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이해할 때, 하나님을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이상한 방법이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유한한 사물들과 생명들의 근원이고 뿌리이고 힘으로서, 그야말로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무소부재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유한한 것들에 현혹되어 그 한 가운데, 그 존재의 근저에서 생명의 힘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무한자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만물과 우리 존재로부터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with)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사물들을 사랑하고 거기에 사로잡혀서 존재 자체이고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보고 만나신 분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들에 핀 한 송이 백합화나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에서도 하나님을 만났으며, 만인에게 내리는 비와 햇빛에서도 조건 없이 은총을 베푸시는 무차별적 사랑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불에 던져질 하잘 것 없는 들풀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무화과나무 한 그루, 농부들이 뿌리는 씨앗이나 돌 짝 밭에 떨어지는 씨앗, 그리고 겨자씨 한 알, 머리카락 한 올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와 현존을 느꼈습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먹을거리를 신성하게 여기시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악할지언정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성스럽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인간을 보는 예수님의 눈은 어떠했습니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의로운 사람이나 죄인이나, 건강한 자나 병이 든 자, 유다 사람이나 사마리아 사람, 남자와 여자,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신성한 존재로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그의 권능과 사랑을 의식하며 사신 분입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만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을 소홀히 해온 그리스도교 사상은 동양 종교들에서 배울 점이 많이 있습니다. 동양 사상에서 하나님과 같이 무한한 실재, 절대적 실재를 가리키는 말은 도(道) 혹은 천(天)이라는 개념입니다. 도나 천은 모든 존재의 뿌리며 원천이며 생명력입니다. 하늘과 땅과 인간의 근원적 기, 원초적 기, 즉 원기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순간이라도 떨어져 있을 수 없는 근원적 실재입니다. 도는 어디에도 있고 심지어 똥에도 있다고 합니다. 적어도 우리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나쁜 물건들, 예를 들어 살상무기 같은 것 말고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도의 산물이며 하늘이 낸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비롭고 신성합니다. 도와 자연, 천과 이 세계는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도나 천은 자연 안에 내재하는 무한한 창조적 힘이고 생명력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한없는 깊이와 넓이이며, 자연의 다양한 변화와 얼굴이 도와 천의 얼굴입니다. 동양 사상에서는 따라서 도와 천을 알고 경험하고 깨닫기 위해서 자연 세계 밖에서 이른바 '초자연적'(supernatural) 으로 하나님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 자체가 초자연이고 신비롭고 성스러운 만물의 고향이고 인간의 구원의 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동양의 자연주의적 영성을 가장 잘 구현하는 종교가 우리 한국의 자생 종교인 천도교, 즉 동학사상입니다. 천과 도라는 두 단어에 이미 그 근본정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천도교의 제2대 교주 해월 최시형에게 3경사상이라는 멋진 가르침이 있습니다. 첫째는 경천, 즉 하늘을 경외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해월은 '천'은 모든 진리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경천할 줄 알아야 나와 남이 하나이고 인간과 자연이 한 동포임을 알 수 있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안다고 해월은 말합니다.

다음으로, 하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인 즉 사람을 경외해야 한다고 해월은 가르칩니다. 하늘을 경외하면서 인간을 경외할 줄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해월의 스승이자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 수운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모신 시천주의 존재입니다. 해월은 이러한 사상을 이어받아서 ‘사인여천’ 즉 사람을 하늘처럼 받들고 섬기라는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시천주이기에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해월은 "도인의 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하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였다"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19세기 말 조선조 사회상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사상은 가히 혁명적 가르침이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경물 사상입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만물 모든 것을 경외하라는 경물사상입니다. 해월신사에게 하늘과 땅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부모입니다. 곡식은 땅에서 나는 어머니의 젖입니다. 문자 그대로 땅은 어머니 대지입니다. 하루는 해월이 나막신을 신고 딱딱 소리 내면서 걷는 아이를 보고는 마음이 아파서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고 합니다. 또 해월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땅에다 침을 뱉거나 코를 풀지 말도록, 또 난폭하게 물을 뿌리거나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정도로 그는 땅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월에게는 모든 것이 하늘의 신성한 기를 타고 난 성스러운 것입니다.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만 우리는 삶의 어느 드믄 순간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그의 손길을 느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삶의 어느 드믄 순간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그의 손길을 느끼며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들을 볼 때, 자연의 엄청난 위력이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접하고 넋을 잃을 때, 해맑은 어린이들의 웃음 속에서, 혹은 초인적 희생이나 사랑과 용서의 감동적 이야기에 눈물 흘릴 때, 또는 거짓으로 포장된 껍데기 나를 벗어나서 참 나를 찾도록 촉구하는 내면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 올 때, 우리는 이 세계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며, 삶이 잔인한 생존경쟁 이상임을 느낍니다. 우리가 유한한 것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한자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는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자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의 존재와 생명이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것임을 자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우주 안에 하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로서, 우리의 출처이며 본향이며 원형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품을 그리워하고 갈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고 우리를 자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비록 유한한 존재이지만 바로 우리의 유한성을 의식하는 순간 무한자를 동경하게 되는 것 자체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모상이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신성한 하나님의 모상은 우리의 죄와 탐욕으로 인해 은폐될 수는 있어도 결코 지워질 수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행복, 우리의 욕망과 사랑의 최고의 대상인 최고의 선은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우리는 사랑 자체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것들은 우리가 저절로 사랑하지만 정작 선 자체이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4장의 말씀도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 영혼의 원형이며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하는 모든 선의 근원이기에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참다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우리의 원형인 하나님을 만나 진정한 자기 자신을 실현하기 전에는, 우리에게 궁극적 행복, 완전한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인간관이며 근본적인 가르침입니다.

올 가을은 유난히도 날씨가 좋은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천고마비의 아름다운 계절이었고 태풍 한 번 지나가지도 않아 농사도 대풍년입니다. 오히려 농작이 너무 잘 되서 농민들이 걱정거리가 될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이 우울한 것은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배불리 먹고 태평성대를 구가한다 해도, 인간 영혼의 깊이에는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어서 항시 허전하게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 빈 공간은 바로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 영혼의 원형인 하나님만을 위한 공간이며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하나님만이 거하실 거룩한 성전이라고 영성의 대가들은 말합니다. 다른 어떤 욕망이나 사랑, 다른 어떤 좋은 것, 이런저런 선으로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성스러운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외면하고 멀리한다 해도, 우리 영혼 깊이에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도장과 흔적이 새겨져 있습니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도록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으며,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거세게 우리 영혼을 흔들어서 이런저런 거짓 하나님을 찾아 우리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게 합니다. 올 가을에는 만물 안에 계시는 하나님, 바로 우리 곁에 아니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나 자신보다도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시는 생명의 하나님을 만나는 풍성한 영적 열매를 맺는 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 존재의 근저에서, 영혼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서 거부할 수 없는 음성과 손짓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이 오늘 바울 사도의 증언입니다.

길희성 / 서강대 종교학교 교수

이 기사는 길희성 교수가 2008년 11월 16일 평신도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길교회에서 설교한 내용 전문입니다. 새길교회는 담임목사가 설교하지 않고, 평신도가 한주씩 돌아가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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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fsky 2009-02-05 09:50:27
이분이 말씀하는 내용이 다원주의인것 같은 인상이 있기도하지만 정확하게 그렇다고 볼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견을 쓰신 분들 대부분이 뉴스앤조이를 비방하는데 저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언론이 이미 자신만의 색을 갖기 시작하면 공정성은 잃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아래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 모두 자신만의 신앙의 색이 나타나 있음을 모르시고 주장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이신론과 범신론을 운운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생각을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견주는 것이고 이단이라는 것을 말하시는 분은 이단이라는 단어가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만든 신학 이론과 교리에 비교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쪽 교단에서 이단이라고 할 때에 이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쪽은 상대를 보고 이단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이단은 없고 단지 선과 악만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신앙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아무말도 마시고 당신의 악을 없애는데에 노력하십시요.

passra 2009-01-19 13:50:13
다른것은 모르겠지만 이 기사의 내용은 착각이 심한것 같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