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상을 향해 소위 '순기능'과 '역기능'이라는 2가지 기능을 해야 한다. 순기능은 교회의 존재가 사회와 세상에 유익하다는 것을 말한다. 국가와 민족에 충성하는 그리스도인, 직장에서 거짓되지 않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이기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세상을 멋진 세상, 아름다운 곳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반면 역기능은 불의한 사회적 악과 타락에 맞서 구별되게 살아서 세상을 바로 잡고자 갈등하고 대결하는 기능을 말한다. 정권과 갈등하고, 권력의 핵심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이라는 서슬이 퍼런 표현을 쏟아서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는 위험한 기능을 말한다.
교회는 이 두 가지 기능을 함께 가진 존재로 '호미'와 '곡괭이' 같은 기능뿐 아니라 '창'과 '칼'의 기능을 함께 가진 존재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회가 순기능이 가지고 있음을 사회적으로 시위해왔고 설득해왔다. 하지만 사실 그 시작에서부터 태생적으로 가진 역기능으로 인해 죄악된 세상과는 깊은 긴장을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교회의 역기능과 안티 기독교?
▲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의 로고. 그 걸쭉한 비평 사이에 그들의 눈에 분노와 실망이 가득한 것을 보아야 한다. | ||
수많은 안티 기독교인의 악의에 찬 공격 앞에서도 싸우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예수와 예수쟁이들은 그래서 오히려 세상에 감동을 주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행16:21)”는 비난을 들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한 안티 상황에 있었지만, 그들의 구별된 삶의 태도와 들개와 굶주린 사자들의 포효 앞에서도 찬송을 드리던 아름다움은 안티 기독교를 외치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히려 감동과 흠모의 마음을 낳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변적 변증이 아닌 실천적 변증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어나는 안티 기독교 현상을 과연 그때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교회의 '악기능'과 안티 기독교!
이 시대의 교회에서 우리는 순기능도 아니고 역기능도 아닌 '악기능'이라고 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부딪히는 안티 기독교 현상은 분명히 역기능의 결과가 아니라 교회의 '악기능'의 결과이다. 초대교회와 달리, 권력화 된 종교와 강력한 논리 체계를 가진 죄악 된 기득권 세력의 모습은 이제 안티 기독교 세력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한 이 시대의 교회에서 발견한다. 교회는 기득권화 되고 죄악 된 세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안티 기독교인은 오히려 의로운 해방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초대 교회에서 교회의 역기능으로 인한 안티 기독교의 발생은 교회의 면류관이며, 우리가 진리대로 살고 있음이 증명되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순기능도 아니고 역기능도 아닌 '악기능'으로 인한 이 시대의 안티 기독교의 발생 앞에 우리는 회개가 필요함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쟁이들은 지구를 떠나 천국이나 가라”고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소망은 우리가 두고 살 테니 이 땅에 소망을 안 두고 있는 너희들은 빨리 저 땅으로 '꺼져' 하며 외쳐대고 있는 것이다.
뱀처럼 사악하고 비둘기처럼 멍청한 그리스도인
▲ 로마를 바꾼 것은 논리적 변증에 의지한 지적 혁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적 변증이 로마를 바꾸는 변혁의 힘이었다. | ||
로마의 변화는 탁월한 기독 철학가의 변증으로 모든 로마의 철학을 굴복시킴으로 인해 지적 혁명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로마를 변화시킨 힘은 삶의 실천적 변증, 곧 십자가의 삶에 동참하는 '신비'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실천적 삶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회는 '신앙은 있지만, 윤리가 없는' 신앙의 시대를 보이고 있다. 순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수구적인 몰상식에 빠지고 딴에는 좀 똑똑하다는 기독인들은 사악하다고 한다면, 이런 교회 현실에 대해선 나도 '안티…'이고 싶다.
기독교 옹호를 위한 논리의 만리장성 쌓기를 멈춰라
필자의 마음이 위와 같을진대 안티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많은 고민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안티운동을 심각한 고뇌와 함께 생각해야 한다. 많은 기독인들이 안티 사이트를 쉽게 여긴다. '논리와 억지 감정적인 쌍욕이 난무한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쉽게 평한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을 쉽게 훈계하려고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럴만한 성질의 것인가?
낙서와 루머와 비논리적인 감정 표현은 한 회사와 정권의 존망을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의 도전에 심각한 고뇌를 해야 한다. 감정적인 욕설과 지저분한 조소와 희롱 속에 담긴 그들의 언어를 들어야 한다. 때로 오해가 있고 미시적인 면이 있고 비논리적인 감정풀이라 하더라도 그 비논리의 비평을 가슴 시리게 들어야 한다. <데카메론>은 신학 서적도 아니고 개혁 교과서도 아닌 걸쭉한 이야기 모음집이지만, 칼빈의 <기독교강요> 만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치다 할 수 있을까?
기독교 권위와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의 만리장성 쌓기를 멈춰야 한다. 그 걸쭉한 비평 사이에 그들의 눈에 분노와 실망이 가득한 것을 보아야 한다. 서릿발 같은 수많은 눈들이 교회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학적인 문제를 평가하지 않았다. '회칠한 무덤 같고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설을 쏟았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주관적이고, 비논리적이고 피상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욕설 속에 담긴 '복음'의 의미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안티 기독교의 비판적 언어 속에 백성들의 마음을 들어야 한다.
가증스런 말잔치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들을 향한 논리를 운운하고 오해라느니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언젠가 필자가 많은 논쟁 끝에 모두를 설득하고 이긴 끝에 들은 말이 있다. '네 말 다 맞고 논리적으로 옳다. 좋다. 잘 해봐라. 나는 못하겠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날 밤을 고민으로 지새운 기억이 난다. 소위 말 잘하는 예수쟁이들에게 질린 사람들에게 '역시 말은 잘하는구나' 하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말잔치가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겨질지 생각해야 한다. 지금은 자성이 필요한 때다. 그리고 우리는 비난받고 욕먹을 자격과 의무가 충분히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송병주 목사 / LA 선한청지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