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크기가 문제의 핵심이다'
'교회의 크기가 문제의 핵심이다'
  • 신광은
  • 승인 2009.11.0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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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 핵심 키워드] ① '크기'

'개독', 현대 한국 개신교회를 일컫는 말이다. 경멸에 찬 이 신조어가 암시하듯 한국 교회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교회의 추락을 근심하고 슬퍼하는 많은 예언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마치 예레미야처럼 이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조국 교회의 범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교회의 크기'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알주의, 맘몬주의, 성장주의, 영웅주의, 세속주의, 엘리트주의, 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안주의 등 허다하게 많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신랄하게 공격을 가하면서 이상하게 교회의 크기에 대해서는 함구한다.

더러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있다. 'OO교회가 무슨 싸움을 한다더라,' '대형 교회 OO목사가 간음을 했다더라,' '지나친 대형화는 건강하지 못하다' 등등…. 그럼에도 이들은 크기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마치 '건강한' 메가처치(Megachurch)가 존재할 수 있는 양 생각한다. 그래서 메가처치를 꿈꾸고 지향하는 자들에게 면죄부를 제공한다.

문제는 바로 교회의 크기다. 이는 한국 교회의 허다한 문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소수의 메가처치와, 대다수의 잠재적 메가처치(메가처치를 지향하는 중소형 교회)가 만들어 낸 ‘메가처치 현상’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범죄이다. 이것이 필자의 졸저, <메가처치 논박, Against Megachurch>(정연)의 주된 논지다. 진정 한국 교회의 갱신을 원한다면 바로 이 메가처치 현상에 대해서 정직하게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소수의 메가처치와, 메가처치를 지향하는 중소형 교회를 만들어 낸 '메가처치 현상'이야말로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범죄이다.  
 
메가처치는 성장병에 걸린 교회

교회의 크기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겉으로는 크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크기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크기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교회의 크기를 가치중립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옥성호는 그의 책,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세속적 마케팅 기법까지 동원하는 교회의 맹목적인 성장주의를 향해 융단폭격을 가한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크고 작은 것은 옳고 그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368)라고 단정해 버린다. 교회 갱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ider)는 누구보다 교회의 크기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교회 DNA>를 보면 메가처치의 문제와 함께 소형 교회의 문제를 동시에 지적함으로써 교회의 크기 문제를 상대화시키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88~97). 이들은 교회의 크기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교회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고 말았다.

크기를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항상 메가처치를 상대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본질론이나 역할론을 들먹인다. 본질론이란 이런 것이다.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살리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지 크기는 비본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본질과 비본질에 대해서 다룰 때 우리는 자주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차용한다. 그에 의하면 어떤 것이 빠지면 더 이상 그 사물일 수 없는 것은 본질이고, 어떤 것이 빠져도 그 사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비본질이다. 예컨대 영혼(만일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은 사람의 본질이고, 피부색은 비본질이다. 이렇게 본다면 키도 사람에게 비본질이라고 할 것이다. 키가 크거나 작다고 해서 사람이고 아니라고를 말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어디까지나 일정한 한계 내에서만 가능한 설명이다. 변증법적 철학자들이 '양질전화'라는 개념(양질전화(量質轉化)란 양(量)이 쌓이다 보면 임계점에 도달하게 되고, 이 선을 넘어버릴 때 새로운 성질을 획득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이때 이 임계점을 한정량(限定量)이라고 한다. 예컨대, 물에 열을 가열하면 100°C에서 물(액체)이 수증기(기체)로 바뀌게 된다. 이때 100°C의 열은 물이 수증기로 양질전화가 일어나는 한정량이라고 할 수 있다)을 통해서 설명했듯이 양이나 크기는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사람의 키는 2미터를 넘지 않는다. 그 한계 안에서 키는 사람 됨과 무관한 비본질인 것이다. 그러나 10미터나 100미터 되는 인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이를 쥐와 코끼리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생쥐는 생쥐로서 존재할 수 있는 적정 크기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적정 크기가 있다(<교회 DNA>, 53~54).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유기체는 모두 적정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교회 성장학자들이 종종 모든 생명체는 성장한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들은 또 한 가지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는 성장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의학박사 이희대는 <희대의 소망>에서 암세포를 '통제되지 않는 성장'(uncontrolled growth)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통제되지 않는 성장은 병이다. 멈추지 않고 키가 크는 사람을 거인병 환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메가처치는 정확히 통제되지 않는 성장병에 걸린 병든 교회다. 더욱 나쁜 것은 마치 암세포처럼 메가처치가 주변 교회에 자신의 암적 본성을 전이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모든 교회는 잠재적인 메가처치가 되고 말았다.

역할론이란 이런 것이다.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달란트의 비유도 이러한 관점으로 해석한다. 그러니까 큰 교회는 다섯 달란트 받는 교회이고, 중형 교회는 두 달란트를, 소형 교회는 한 달란트를 받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자 자신에 맞게 맡겨주신 대로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물어보자. 만일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메가처치만이 할 수 있다면 그 일을 이루는 힘은 하나님의 힘인가, 아니면 메가처치의 힘인가? 신구약성서를 이 잡듯이 뒤져 보아도 작은 이가 할 수 없는 일을 큰 자가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큰 자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장면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큰 자에 대해서 항상 적대적이시다. 하나님의 은총은 언제나 작은 자를 향한다. 하나님만이 홀로 크시다!

메가처치의 이교적 영성

이처럼 겉으로는 크기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다들 큰 교회가 되고 싶어 안달이다. 심지어 교회 성장학자들은 교회의 성장을 그 자체로 세계 선교의 성취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교회의 성장은 그 자체로 선(善)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크기를 선으로 보는 관점은 대단히 이교적이다.

   
 
  ▲ 바벨탑 이후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과 건물을 세워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싶은 욕망은 아직까지 그대로다. (Tower of babel, 1866, Gustav Dore)  
 
고대인에게 있어서 크다, 혹은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함'과 '신성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게라르투스 반 델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에 따르면 폴리네시아(Polynesia)인들은 보통의 사과나무보다 훨씬 더 많은 사과를 맺은 나무를 '마나(mana) 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매우 많은 수(數)'의 열매를 보면서 '신성한'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반 델 레에우, <종교현상학 입문>, 37). 이와 비슷하게 고대인들은 엄청나게 큰 산이나 나무, 바위, 폭포 같은 것을 보면서 신적인 기운을 느꼈다. 종교 현상학에서는 이러한 산이나 나무, 바위, 폭포를 가리켜 역현(力顯)이라고 한다. 즉 신적인 기운을 중개하는 매개라는 뜻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인간이 성스러운 것(das Heilige)과 만날 때 누미노제(das Numinöse)라는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데 오토에 따르면 이 누미노제라는 신적 감정은 직간접적으로 크기와 강한 연관이 있다. 누미노제는 뭔가 거대하고 숭고한 것에 압도당하는 느낌과 어마어마한 것 앞에 서는 피조물적 감정을 포함한다. 때문에 오토가 분명히 지적했듯이 장엄한 크기는 대단히 근원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촉발한다. 그래서 거대하고 장엄한 마스타바(Mastaba)의 방첨탑과 피라미드는 신적인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4, 7, 9, 11장). 그러니까 고대인의 의식 속에서, 그리고 현대인의 의식의 심연 속에서 크기는 결코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다. 크기는 거대함, 숭고함, 위대함, 장엄함, 그리고 신성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메가처치는 이교적 영성을 가지고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이교적이라 함은 신학이나 설교의 이단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메가처치의 그 거대한 크기와 장엄한 외형이 암시하는 이교적 영성을 뜻한다. 거대한 회중이 모여 연출하는 웅장하고 장엄한 '몹씬'(mob scene)은 그 자체로 강력한 신성과 종교성을 발산한다. 메가처치 교인은 그 거대한 군중 속에 왜소한 한 점으로 축소되어 오토가 말하는 '피조물적 감정'을 느낀다. 불행히도 예배자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누미노제의 감정을 성령의 감동으로 착각하며 예배를 드린다.

크기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성서는 여러 곳에서 크기의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앞서 말했듯이 크기는 단순히 연장(extension)의 문제가 아니다. 크기는 위대함 및 신성함과 불가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크다는 것은 왕(王) 및 신(神)의 속성이기도 하다. 성서에서 큰 사람은 왕이며, 나아가 신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세기 3장을 읽어 보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담이 야훼의 시종이 아니라 홀로 왕이고자 했으며, 신의 크고 높은 영광을 탐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의 반역 이후, 인간은 늘 크고자 했고, 왕이 되고자 했으며, 신이 되고자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것을 미워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왕의 제도를 미워하셨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크시고, 참된 왕이시며, 홀로 유일하신 분이시다. 이것이 성서의 일관된 주장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이 크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경합하려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항상 큰 것을 미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웅장한 바벨탑을 미워하셨으며, 하나님과 맞선 애굽의 바로를 징벌하셨고, 장엄한 계단이 있는 웅장한 신전을 미워하신다. 도리어 지극히 작은 천막 안에 이스라엘과 함께 동거하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큰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이신다. 부자는 빈손으로 돌려 보내시고 가난한 자는 먹이신다. 방백들은 진토에 던지시고 비천한 자들을 그 자리에 앉히신다.

스스로 큰 체하고 강한 체하는 자를 심판하시고, 그들에 의해서 억압받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은 야훼의 전쟁 방법이다. 야훼의 전쟁은 큰 자를 쓰러뜨리시고 작은 자를 일으켜 세우심을 통해 진정 하나님만이 홀로 크신 분이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이다. 때문에 야훼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반드시 작고 적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300명, 열방 중에서 가장 수가 적은 이스라엘, 그리고 사울, 다윗을 택하신 이유는 언제나 동일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작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에서 중심 주제는 크기였다. 즉 이 이야기의 주제는, 하나님께서는 큰 자를 버리시고 작은 자와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만군의 야훼이심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관점은 유지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의미하는 바는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작고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자가 되셨다는 것이다. 성육신은 큰 자가 작은 자가 되어 작은 자를 섬긴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불학무식한 자들 중에서 제자를 택하셨으며, 제자들을 '소자,' 혹은 '아이들(얘들)'이라고 부르셨다. 또 주님은 병자, 세리, 창녀 등 낮은 자들을 섬기셨다. 이러한 예수의 섬김은 십자가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십자가는 이 세상의 관원과 지혜 있는 자, 능력 있는 자, 문벌 좋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하다. 곧 십자가는 작은 자를 향한 섬김이요, 큰 자를 향한 심판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소리 지르거나 고함을 치지 않으셨으며 이웃집 담장 너머로 그 소리가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로 전하셨다. 천국 복음은 가장 작은 겨자씨로 뿌려지며, 작은 누룩 한 점처럼 전해진다. 천국 복음을 맡은 교회는 비천한 자들의 모임이었으며, 최소한 3세기 동안 그들은 멸시받고 천대받는 외톨이들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모임 속에 뿌려진 작은 천국 복음의 씨가 마침내 로마 제국을 굴복시켰다. 이것이 천국 복음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지만 교회가 크고 강해지면서 이러한 천국 복음의 능력은 급속히 감소하고 만다.

다시 묻자. 만일 작은 교회가 할 수 없는 일을 메가처치가 했다면 그 일을 이룬 능력은 하나님의 권세인가, 메가처치의 권세인가? 자끄 엘룰은 말한다. 진정 신자의 힘은 무력(武力)이 아니라 무력(無力)이라고. 마르바 던(Marva Dawn)도 같은 말을 한다. 교회와 신자의 참된 권세는 작음과 약함과 무능력의 권세라고. 하나님은 약함 가운데 거하신다. 우리의 작음과 약함과 무능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야훼의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작은 자들이라야 한다. 큰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큰 자를 멸시하시고 작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크기가 본질도 바꾼다

교회가 커지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구조와 질서가 필요해진다. 이와 함께 새로운 의미와 가치가 생겨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구조와 질서, 의미와 가치가 변한다. 결국 교회의 본질이 왜곡되는 것이다. 그래서 크기가 중요하다. 예컨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의 패자(覇者)가 된 로마가 그 크기에 걸맞은 구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위기에 빠졌음을 간파했다.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의 말마따나 "육체가 먼저 성장해 버린 탓에 내장의 발달이 그것을 미처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카이사르식 로마 개조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규모는 그 자체로 그에 걸맞은 구조와 질서를 요구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생시키며, 본질마저도 뒤바꾼다.

메가처치도 마찬가지다. 메가처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범하게 커진 규모 때문에 새로운 구조와 질서, 의미와 가치를 지닌 교회이다. 이와 함께 교회의 본질에 심각한 왜곡이 생겨난 교회이기도 하다. 즉 교회의 크기 때문에 신학과 신앙의 왜곡 및 변질이 초래된 것이다. 구원관, 교회관, 예배관, 설교관 등이 크기 때문에 변화되었다. 그래서 최근 몇몇 학자들은 신학적 동질성이 교단이나 교파보다는 교회의 크기에 더 많이 좌우된다고 보고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크기가 새로운 신학을 조성하고 있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렇게 크기에 의해서 조성된 신학을 '메가처치 신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문제는 이러한 메가처치 신학이 메가처치를 지향하는 중소형 교회에까지 유통됨으로써 모든 교회를 잠재적 메가처치로 만든다는 데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의 크기가 중요하다. 메가처치 현상이 휩쓸고 있는 지금 한국 교회의 지성인들은 메가처치가 성서의 가르침과 신학적 진리에서 얼마나 큰 변화를 겪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것이다.

신광은 / 열음터교회 목사

   
 
   
 
신광은 목사는 건국대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했고 침신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했다. 침신대 대학원에서 종교철학으로 석사학위(Th.M) 받았으며 박사과정(Ph.D)을 수료했다. 한국 <뉴스앤조이>와 <미주뉴스앤조이>에 썼던 글들을 역어 <메가처치 논박: 교회여, 크기에서 자유하라>(근간)라를 최근 펴냈으며, 김기현 목사와 함께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을 번역했다. 현재 열음터교회를 섬기고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저서 <메가처치 논박>(정연)의 일부와 제2회 기독소장파연구자컨퍼런스에서 발표했던 '교회의 크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내용을 정리한 글이며. <복음과상황>에도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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