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니 시다바리가?
내가 니 시다바리가?
  • 성기문
  • 승인 2009.11.13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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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라고?

"내가 니 시다바리가?" 요즘 우리 영화 <친구>에 나오는 걸죽한 경상도 사투리가 장안의 화제다(이 글은 지난 2001년 <뉴스앤조이>에 실린 글입니다-편집자 말). '시다바리'라는 말은 속어로 졸병과 유사한 뜻이라고 한다. 교회에는 섬기는 종은 없고 군림하는 종님밖에 없다는 말은 이미 굳어진 상식이요 이념(?)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교회직분론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는 차원에서 본 논의가 작성되었다.

(1) 장로가 목사 '시다바리'가?

   
 
  ▲ 장로는 목사의 종이 아니다. 장로교에서는 오히려 동급이다. 다만 기능이 다를 뿐이다.  
 
택도 엄따. 장로는 목사의 종(졸병)이 아니다. 장로교 전통상 장로는 목사와 동급이다. 다만 기능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하늘에 달이 두 개일 수 없고, 해가 두 개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이미 그러한 전통은 폐기처분된 지 오래다. 우리의 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두 가지 예화를 들어보자.

지금은 장로가 되신 전직(?) ㅇ여자 권사님(장로교에서는 여자만 권사가 될 수 있다)께서 나와 토론을 했던 일이 떠오른다. '장로가 더 높은가? 목사가 더 높은가?' 그분의 말씀은 '목사가 더 높다'였다. 그 이유는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란다. 떠도는 이야기로, 모 장로교단은 장로가 기(氣)가 쎄서 교회가 문제가 많고, 모 장로교단은 목사가 기(氣)가 강해서 교회가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말이다.

이 정도 이야기를 하면, 문제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목사와 장로는 기능이 다를 뿐이라고 말했는데, 좀 부연하자면, 목사는 가르치고 설교하는 장로(preaching and teaching presbyter)이며, 장로는 치리하는 장로(ruling presbyter)를 의미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군대도 아니고, 직장도 아닌데, 계급사회처럼 말한다는 게 바보 같은 일이지만, 계급주의가 교회에 침투한 지는 오래되었다. 현재 집사, 권찰/사, 장로는 아무리 일을 잘하고 교회를 섬기더라도 평신도(laity)고, 목사는 아무리 잘못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종, 성직자란다.

이러한 성직주의(혹은 사제주의, sacerdotalism)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요즘의, 소위 '평신도교회'도 간과하는 점이 있다. 사실 목사가 없는 교회가 '평신도'교회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대부분 장로(들)이 치리(治理)와 교육, 설교를 겸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명칭은 잘못이다. 그들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장로를 목사라고 한다는 점을 잊고 있는 듯하다.

물론 기존의 용어를 사용하여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기존의 사제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평신도'교회는 교회도 아닌 것이다.

사실 교인들의 모임을 건물로 바꾸고 사역자들을 계급으로 만들고 성직과 세속직을 나누기 시작한 것은 주후 300년경의 일이다. 마치 한국 교회의 평범한 신자들은 한국 교회의 제도가 성경의 제도이겠거니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는 무식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왜곡은 가톨릭교회의 교리의 개신교식의 부활일뿐이다.

장로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많이 나오지만, 목사(牧師)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단 한 번, 엡 4:11에만 나타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자 및 교사)로 삼으셨다.'

사실 목사지상주의의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통계는 충격일 수 있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목사라는 말은 목자(양치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엡 4:11에서의 '목자 및 교사'라는 말은 이 부류의 사람들이 양(교인)치는 자들인데, 가르치는 임무를 통하여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직무'를 맡은 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모든 일이 성도를 섬기고 봉사하고 세우는 일이라는데 우리는 우선 주의해야 한다. 성경 그 어느 곳도 목사직에 군림하고 억압하고 협박하는 권한을 주신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성도를 섬기는 사역을 맡겼을 뿐이다.

   
 
  ▲ 많은 사람이 장로는 목사의 아래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한 교회의 장로 임직식. 목사들이 장로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칼뱅은 장로 제도를 부활시키면서 장로를 '치리'장로와 '교육하고 설교하는' 장로로 구분을 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올 것이다. 장 칼뱅(Jean Calvin)은 교회 정치는 자신이 신봉하던 공화정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겠다. 물론 그는 절대군주제하에서 살아왔지만, 그는 공화체제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한 체제와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장로교체제였다. 물론 그의 이상과 제네바교회의 현실상의 괴리를 부인하자는 것은 아니나, 필자가 보기에, 칼뱅에게, 장로직도 권한을 몰아주기보다는 분할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칼뱅은 그의 딤 3:13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구절로부터, 두 종류의 장로들이 있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가르치도록 임명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명백한 의미는 잘 그리고 영예롭게 다스린 사람들도 있지만, 가르치는 직책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진지하고 잘 단련된 자들을 선출하였으며, 이들은 공동의회에서 목자(사)들과 함께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규율을 내리고 기강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감독자로 행동했다.'

그러나 칼뱅의 이러한 극단적인 구별은 이후에도 장로교 전통 속에서 갑론을박되어왔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여전히 있다는 말이지, 장로는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리라거나 목사가 장로보다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제기되는 의문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목사만 설교할 자격을 갖는가? 그렇다면 장로는 설교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목사는 교회의 치리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인가? 한국 실정에서 보았을 때, 목사가 주로 교회의 치리에도 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장로교의 전통에서 합당한 것인가? 장로는 예배를 인도할 수도, 설교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다는 말인가?

한국 교회의 목사 장로 문제는 설교, 예배인도, 축복권 등에 대한 목사의 독점, 안수에 따른 기능의 영속성과 성직과 평신도의 구분 등의 문제와 맞물려서 혼란을 자아내고 있다는데 있다. 설령, 기능을 달리하는 칼뱅의 말이 맞다 하더라도, 교회가 장로와 목사를 우열의 차원에서 등급을 매기고 군림하고 지배하는 영적인 군주로 여겨지는 한은, 그 해결책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칼빈의 주장과 아울러 한국 장로교회 정치에 대한 교회적인, 학적인 토론이 활발히 있어야 하며 지금처럼 억압하거나 감추는 식으로 기존의 교회 정치 체계를 고수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Westminster 신앙고백은 하나의 표준일 뿐 정확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어쨌거나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며 장로는 교인들의 대표일 뿐이라는 생각은 비성경적이다.

성기문 /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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