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메가처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건강한 메가처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 김성회
  • 승인 2009.11.25 15: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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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광은 목사, ‘교회의 크기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 신광은 목사(열림터교회) <메가처치 논박>의 저자  
 
문제는 규모가 아니라 교회의 건강함이라고 항변하는 세태에 <메가처치 논박>의 저자 신광은 목사(열림터교회)는 “건강한 메가처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지난 11월 22일 LA평화의교회(김기대 목사) 선교관에서 열린 <메가처치 논박> 강연회에서 신 목사는 ‘교인 간의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코이노니아 회복’과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미주뉴스앤조이>와 <기독교연구실천아카데미>가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강연회에는 30여 명의 청중이 참석했다.

모든 한국 교회가 메가처치 양산의 공범

“세계 10대 메가처치 중 5개가 한국에 존재한다. 대한민국은 나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에 비해 메가처치가 많은 편이다. 반면 기독교의 위상은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개독교’, ‘먹사’ 등의 호칭을 사용하며 기독교를 깔보는 것이 일상화 되어있다. 이런 상황이 가슴 아파 해결책을 찾아보고 싶었다.”

처참한 한국 교회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던 신 목사는 ‘성장 만능주의’에 빠진 이들과 마주하게 됐고, "그들의 변명을 깨뜨릴 논리를 만들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고 저술 동기를 설명했다. 그는 "교회의 크기를 문제로 보아야 한다. 교회도 장사라는 인식이 퍼진 것에 메가처치의 역할이 컸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메가처치의 숫자는 5퍼센트지만 95퍼센트의 나머지 교회들도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는 공범이고, 이것은 죄악"이라고 비판했다.

기존에 출간된 교회 비판서는 'A라는 메가처치의 B라는 목사가 문제라는 식의 지적’으로 마치 건강한 메가처치가 존재하는 것처럼 논점을 흐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건강한 메가처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자고 했다.

대중의 출현과 테크놀로지가 메가처치라는 괴물 만들어

신 목사는 "19세기에 폭발적 인구 증가로 인한 ‘대중의 출현’을 메가처치 태동의 첫 번째 이유로 꼽았다. 두 번째는 ‘도시화’다. "현대의 도시는 확장이 가능한 격자형으로 단기간에 형성"되었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적으로 60퍼센트의 인구가 도시에 거주하면서 메가처치의 출현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메가처치를 만드는 실체적 파워로 그가 지목한 것은 ‘테크놀로지’였다. “교통, 통신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지역성과 교회의 연관성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했다. 마지막 이유로 든 것은 ‘자본주의와 시장주의’였다. 이런 이데올로기가 성장 만능주의와 ‘수요가 있으니 대형화해야 한다’는 논리의 이론적 받침이 되었다는 것이 신 목사의 설명이다.

메가처치의 역사적 기원

신 목사는 대부흥 운동과 세계 선교 운동이 가져온 성과를 먼저 언급하며, 이 운동들과 메가처치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조심스럽게 설명을 이어갔다.

“메가처치는 대부흥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대부흥 운동의 큰 오류는 성령의 역사를 규모로 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부흥을 위해 시청각적 자극이 동원되고 언론의 힘을 빌리고 대규모의 집회를 열면서 축적된 노하우가 메가처치의 모범이 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세계 선교 운동이 가져온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영혼을 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던 대부흥 운동에 비해 세계 선교 운동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게 된 교회들이 성장주의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이 1950년대 이후 교회와 교인의 숫자로 선교의 결과를 계량하는 풍조로 이어졌다. ‘개별 교회의 성장이 세계 선교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라는 논리로 귀결된 것이다.”

과연 교회의 규모는 가치중립적인가?

교회 본질론은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는 것이 본질이지 교회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반론을 세운다. 이에 대해 신 목사는 "하나님나라의 가시적 현존으로 교회를 본다면 크기는 매우 중요해진다"고 했다. "교회를 무한 성장 가능한 기계 공학적 관점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며 유기체론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200미터짜리 인간이 가능하겠는가? 유기체는 개체의 크기가 어느 정도 커지면 군집이 커진다. 하나의 개별 교회가 적정 크기를 넘어가면 살아있는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 성경을 보면 크기가 커야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비판하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항상 작은 자들에게 가 계시다.”

코이노니아와 톨레랑스

신광은 목사는 이어서 메가처치가 잃어버린 교인 간의 친밀감에 대해 "300명 이상으로 넘어가려면 텃세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교인 모두가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친밀한 관계의 포기"가 수반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코이노니아가 존재하지 못하는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 강연을 마친 후 참석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의 교회는 구원받는 사람을 만드는 게 목적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마치 대입을 위한 입시 학원이랑 비슷한 곳이 된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나라의 가장 유사한 형태로 교회를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나라에 모인 교인들은 이 교회라는 틀 밖의 사회에 나가서 잘 싸우고 이기자라는 결의를 다지는 곳이었다.”

신광은 목사는 "근본적으로 기독교 혁명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며 다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예수의 본을 받자. 예수는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다. 이것이 첫 번째 원리이다. 나의 현존으로 설교해야 한다. 곁에 있어 줘야하는데 메가처치는 이것이 안 된다. 현존이 안 되니까 말씀으로 추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몸으로 왔기 때문에 삶을 살아야 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친밀하게 함께 살았다. 바로 예수의 이 삶에서 우리는 세상을 가까이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친밀감과 친근함,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를 목격한다. 진리는 말보다 앞서, 삶을 통해 먼저, 그리고 진실하게 증거되었다.

세 번째는 말이다. 방언은 덕을 세우지 못한다고 바울이 말했다. 따라서 예수가 직접 설교하지는 않았지만 바울과 사도들이 하지 않았나? 말씀은 몸과 삶의 각주가 되어야한다. 내 안의 존재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어야 은혜가 되는 것이다."

신광은 목사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메가처치 현상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직하게 보면서 아픔을 가지고 함께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해보자.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며 강연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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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er 2009-11-27 11:39:54
다만 건강한 교회냐, 아니냐만 존재할 뿐이다. 개척교회, 작은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교회는 그 크기에 상관 없이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지 못한 교회는 언젠가는 그 문제점이 폭로될 수 밖에 없다.그런데, 신 목사의 글은 그 전제부터가 잘못되어 있다. 그는 숫자를 전제로 하여 잘잘못의 판단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순간, 바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일까? 도대체 대형교회의 기준은 무엇인가? 천명? 혹은 만명? 자의적일 수 밖에 없는 근거를 내세워 비판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성경 어디에도 교회의 크기를 제한하는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초대교회가 시작될 당시에 베드로의 설교에 한꺼번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고 한다면, 그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그보다, 예수님이 설교할 당시에 수만명의 군중이 따랐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메가처치의 원조인가? 한마디로 잘못된 전제 위에 쓰여진 글은 스스로의 논리적 모순을 드러 낼 뿐이다. 뿐 만 아니라, 오늘날, 메가처치의 기원으로 보는 근대의 대부흥운동에 대한 자의적인 역사해석에 이르러서는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이 성령의 특별한 역사였다고 평가하는 데 반해, 저자는 숫자를 지향하는 인위적인 대중집회였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는 객관적인 학문적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한마디로 필자는 신목사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대형교회에 문제가 있다면, 정당한 객관적 자료와 기준(성경적)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에 정확한 평가와 대안이 제시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에 대형교회가 비교적 많이 생기게 된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원인은 한국적 사회환경을 들수 가 있다. 한국은 국토가 매우 좁고, 수도권 밀집현상이 세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나라이다. 그러다 보니 인구밀집도가 매우 높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대형교회가 쉽게 형성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다. 반면에 인구 밀도가 낮은 지방이나, 시골에는 오히려 대형교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최근에는 아파트 밀집지역인 신도시를 중심으로 대형교회들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개신교에만 국한 된 현상이 아니다. 수도권이나 신도시의 카톨릭성당들도, 등록 교인들이 수만명이 넘는 곳이 수두룩하다. 말하자면, 신학적 분석 외에 사회학적 분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제 결론을 짓고 싶다. 교회개혁도 좋고, 비판도 좋다. 그러나 올바른 분석과 바탕위에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바람직한 대안도 나오고, 건강한 토론도 기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