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어려운 다문화 목회입니까?"
"왜 이리 어려운 다문화 목회입니까?"
  • 성현경
  • 승인 2009.12.15 14: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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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경 목사의 '다문화 목회' 이야기(1), "저는 브롱스 출신입니다"

"미국에 가면 일단 주소록을 보고 가까운 교회에 전화하세요. 그러면 목사가 와서 아파트도 얻어주고 필요한 것들을 도와줄 겁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일요일에 1시간씩 예배에 참석하시면 됩니다."
 
88올림픽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던 1988년 겨울, 나는 미국에 오기 위해 이민 수속을 밟고 있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외국으로 이주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라는 게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강사는 스스로를 미국에서 살다온 재미 교포라고 소개했다. 처음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온 강사가 미국 생활에 대해 말해 준 지혜는 내게는 별로 믿고 싶지 않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강사의 말은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이민 교회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준 슬픈 예고편이었다.

1983년 먼저 미국에 온 나의 어머니는 여성의 몸으로 뉴욕의 브롱스에서 목회를 하고 계셨다. 교회 이름은 부활선교교회, 당시 브롱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포담매너개혁장로교회(Fordham Manor Reformed Church)에 세 들어 있었다.  

최초의 정착민이었던 화란인들이 300년 전에 세운 포담매너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 라티노와 흑인 그리고 백인과 아시아인이 뒤섞여 있는 다문화 다인종 교회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 덕분에 나는 이 유서 깊은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물론 내게는 미국에서의 첫 번째 교회 경험이었다.

   
 
  ▲ 나를 다문화 목회로 이끌어준 포담매너교회. (출처 : nycago.org)  
 
당시 어머니가 하던 이민 목회는 내가 해외 이주자 교육에서 들었던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더 심한 면이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뉴욕 시에 거주하며 힘들게 생활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교인의 대부분이었던 까닭에 어머니의 목회는 고상한 목회를 꿈꾸던 내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주일은 그야말로 어머니에게 중노동의 시간이었다. 차량 운전부터 예배 인도 그리고 식사 준비까지, 내가 생각했던 목사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어머니의 목회를 보며 나는 한숨이 나왔다.

이러한 열악한 목회 속에서 큰아들의 등장은 어머니 입장에서는 하늘이 주신 써먹기 쉬운 공짜 노동력의 선물 그 자체였다. 속절없이 운전과 짐꾼 노릇 그리고 통역 역할을 하면서 나는 이민 목회에 대한 절망감을 느꼈다. 점점 이민 교회에 대한 오만정이 다 떨어져가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당시 포담매너교회 담임이었던 어빙 리베라(Irving Rivera) 목사와의 만남이었다. 그의 친절한 인도 덕분에 나는 미국 생활을 그런대로 잘 배워갈 수 있었다. 추천서를 한 장 받을 요량으로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려는 내 생각을 얘기하자마자 그는 내게 주일 설교를 부탁했다. 물론 영어 설교였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진학을 위해 나름대로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설교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찾아낸 대답은 이랬다. "I will think about it. 생각 좀 해보구요." 물론 완곡한 거절을 전제로 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다음 주 나의 이름은 큼지막하게 주보 광고란을 채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전도자 성현경이 다음 주 설교를 합니다." 미국인들을 상대하는 나의 첫 번째 영어 설교는 이렇게 엉겁결에 이루어졌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음을 깨달은 나는 비장한 기도를 드리며 설교를 준비했다. "하나님, 망신만 면하게 해주세요." 마침내 주일 아침, 떨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나는 포담매너교회의 강단에 섰다. 거기에 펼쳐진 모습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눈에 선하다. 거기에는 라티노, 흑인, 백인, 아시아인 남녀노소 300명이 앉아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해할 수 없는 평안함이 나를 감싸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새로운 지류를 발견한 기쁨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기꺼이 포담매너교회의 자랑스러운 일원이 되었다. 다인종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몸소 체험하며 한국 교회에서 느껴보지 못한 영적인 채움을 맛볼 수 있었다. 한인 회중의 예배와 영어 예배를 오가며 나는 미국을 새롭게 느끼며 배우고 있었다. 각박한 생존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에 목맬 수밖에 없는 이민 교회의 독특한 영적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은 포담매너교회의 지나간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포담매너교회는 1970년대에 이르러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밀려오는 흑인들과 라티노들 때문에 백인들 특히 화란인의 후예들이 급속히 브롱스를 이탈하게 된 것이다.

몇 명 남지 않았던 연로한 화란인들이 브롱스를 떠나자 개혁장로교단은 포담매너교회의 문을 닫을 것을 결정한다. 이때 개혁장로교단의 문을 두드린 사람이 바로 프에토리코 이민 2세인 30대 초반의 어빙 리베라 목사였다. 그는 무너져가는 교회를 다시 살려보겠다는 당찬 꿈과 열정을 가진 젊은 목사였다. 1979년 불과 10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리베라 목사는 새로운 다인종 다문화 교회를 시작했다.

1996년은 포담매너교회가 3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이 날 당시 뉴욕 시의 시장이었던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은 포담매너교회가 뉴욕의 살아있는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교회라는 축사를 남겼다.

주차장도 없고 오래된 아파트 숲에 둘러 싸여 있는 전형적인 도시 교회인 포담매너교회는 뉴욕 시의 지나간 역사의 압축판이다. 먼저 미국 땅을 밟은 화란 이민자들이 세웠고 또 떠나간 이 교회는 새로운 이민자들에 의해 그 생명력이 계속 유지 되고 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한인 이민자와 다를 바 없는 선배 이민자들의 애환의 흔적이 남아있는 포담매너교회를 보며 나는 오히려 이민 교회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가질 수 있었다.

브롱스의 죽어가는 교회를 새롭게 세운 어빙 리베라 목사는 2005년에 보수적으로 소문난 개혁장로교단(Reformed Church of America)의 총회장이 된다. 그의 이름은 최초의 비화란계 총회장으로 개혁장로교단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어빙 리베라 목사와 나는 서로를 친구라고 부른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20년 전 나의 설교를 기억하며 자신의 인생을 바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20년 전 그와의 만남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내게 파사데나장로교회에서의 다문화 목회가 있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뉴욕에서 포담매너교회와 어빙 리베라 목사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단하고 힘든 한인들을 섬기는 목회를 마다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헌신적인 이민 목회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싫었던 브롱스에서의 어머니의 목회가 내게 실상 가장 큰 선물이었다.

"목사님은 왜 이런 어려운 다문화 목회를 하려고 합니까"라는 질문을 가끔 받곤 한다. 솔직히 말해서 다문화 목회는 나의 선택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선택을 초월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나는 분명히 믿는다.(솔직히 그렇게 믿고 싶다.)

누가 내게 스스로의 소개를 부탁한다면 이렇게 나를 소개하고 싶다.

"저는 파사데나장로교회라는 다문화 목회에 부름 받은 목사입니다. 참 그리고 저는 브롱스 출신입니다."

성현경 / 파사데나장로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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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 2011-07-20 08:21:47
그런데 왜 여기 댓글은 모두 관리자에 의해 삭제되었는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