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에 묵상하는 한미FTA
대림절에 묵상하는 한미FTA
  • 김기대
  • 승인 2011.12.07 17:3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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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몇 알 싸다고 악마의 제도 칭송할 텐가

예레미야 35장에는 레갑 부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레갑 사람들을 성전에 데려다가 포도주를 한 잔 권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갑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에 데려다가 포도주를 한 잔 대접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상당한 예우였습니다.

성전에서 파티가 열린 방도 고관들의 방 옆에 있는 아주 화려한 방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 파티에 초대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에게 포도주를 권합니다. 이 때 레갑 사람들은 단호하게 포도주를 거절합니다. 자신들의 조상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한 명령을 대대로 지키고 있기 때문에 마실 수 없다는 것이 거절의 이유였습니다. 

레갑 사람들이 포도주를 거절한 이유?

   
 
  ▲ 정부는 한미FTA가 체결되면 "개방을 통한 생산성 향상"되고,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등을 통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져 미국과 한국 간의 경제 고속도로가 생긴다고 주장하고 있다. (FTA종합포털지원 사이트 화면 갈무리)  
 
보통 사람은 초대 받기 힘든 성전의 영광된 파티에서 레갑 사람들이 조상의 전통을 따라 포도주를 거절한 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들이 돌아간 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굳은 의지를 보았느냐. 그들은 조상의 전통도 그렇게 진지하게 지키는데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말도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레갑 사람들을 축복하시어서 그 후손들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구약 성서에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것을 자주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레갑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됩니다.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자신들의 조상인 요나답의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불순종을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이런 모순 때문에 레갑 가문의 이야기는 해석이 다양합니다.

특히 음주문제에 유난히 엄격한 한국 교회 전통에서 레갑은 철저하게 금주의 모범을 지킨 사람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받아들인다면 술을 안 마시는 것은 하나님의 대접을 거스르는 것만큼 의미가 있는 것인데 과연 그럴까요? 만약 안 마시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어떻게 성전에서는 포도주 파티가 열릴 수 있었을까요?

레갑 사람들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은 예레미야 35장 7절 이하의 본문과 연결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는 집도 짓지 말고, 곡식의 씨도 뿌리지 말고, 포도나무도 심지 말고, 포도원도 소유하지 말아라. 너희는 언제까지나 장막에서만 살아라. 그래야 너희가 나그네로 사는 그 땅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와 우리 아내와 우리 아들과 딸이 일평생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거처할 집도 짓지 않고, 포도원이나 농토나 곡식의 씨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조상 요나답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모든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실천하면서,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이나 농토를 소유하지 않았고 곡식의 씨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직접 수확한 포도로 포도주를 담그는 그런 일들을 할 수 없었습니다. 땅이 없으니까요. 그러므로 이 본문이 말하는 것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레갑 가문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터전이 되는 어떠한 재산도 소유하지 않은 레갑인의 이야기입니다.

레갑의 이야기의 주제는 금주가 아닌 착취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를 시험해 본 것이 아니라 레갑인들의 마음이 여전히 농토나 포도원에 욕심이 없는가를 알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보십시요. 7~10절 사이에는 레갑 부족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켰다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조상의 가르침만 지켰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엄청난 교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칭찬하신 것은 그 전통의 내용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레갑인들에게는 지켜서 어떤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지켰기 때문입니다. 땅을 소유하지 않아 손해 보는 인생을, 포도주 한 잔의 여유도 즐길 줄 모르는 재미없는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포도주는 본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예언자들은 이것을 경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경작하고 함께 나누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포도원을 가진 사람과 안 가진 사람으로 나뉘게 됩니다. 포도주는 착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사야서 5:10이하에서는 “열흘 갈이 포도원이 포도주 한 바트 밖에 내지 못하며, 한 호멜의 씨가 겨우 한 에바 밖에 내지 못할 것이다. (중략)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주님께서 손수 이루시는 일도 거들떠보지를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아모스 6: 6에는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포도원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많은 포도원을 소유한 사람들은 노비들이 10일씩 농사지어서 짜낸 포도주를 아침부터 즐기며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요나답은 바알신앙에 물들어 착취의 구조 속에 편입된 정통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 싫었을 것입니다. 광야 초기 히브리인들이 이방 족속에게 그렇게 냉혹히 대한 것도 바알종교의 해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이스라엘 귀족들은 오히려 그 해악에 물들어 착취의 구조 속에서 인생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레갑 부족의 조상 요나답은 이 모순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후손들에게 그런 전통을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실히 그 전통을 따른 후손들은 포도재배를 반대했고, 그 결과물인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갑의 이야기는 금주가 주제가 아니라 착취가 주제입니다. 수백 년 동안 착취의 구조 속에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그 레갑 사람들이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금속 공예를 담당했던 기술자 가문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돈 벌어서 집짓고 포도원사고, 종들 부려가면서 포도원의 수확물로 짠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이것이 가져올 착취의 문제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 구조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전통을 지켜 살아갔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이들에게 이제 그만 조상의 유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떠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리타분한 전통을 지켰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유가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런데 욕망을 다 표출하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자신을 맡겨 사는 것이 자유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면서도 기뻐하는 것, 세상 사람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진리를 따르면 우리는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의 삶은 세속적으로 보면 결코 자유로운 삶이 아니었지만 그분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분이었습니다.

레갑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조상의 명령에 매여 인생을 사는 사람들 같지만, 포도주 한 잔의 여유도 즐길 줄 모르는 꽉 막힌 사람들 같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물질로부터 자유롭고, 자기의 집도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포도원 사고 집짓고, 아래 사람들을 부리며 사는 인생을 목표로 향해 달려갈 때 그들은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자유와 경제가 결합하면?

인류는 그 동안 자유를 찾기 위해 참 수많은 피를 흘렸고, 힘든 노력을 해왔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흑인들이나 원주민들은 자유를 위해 길고 긴 세월 피와 눈물을 흐렸습니다.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지만 우리 소수계 아시안들이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도 흑인들과 원주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고국 역시 해방 이후 오랜 독재를 거치면서 마침내 자유를 획득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라는 것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아닙니다. 미국에 사는 대학 교육 이상을 받은 백인 중산층 남성이 생각하는 자유와 이민자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다릅니다. 멕시칸  노동자와 우리 아시안의 자유도 다릅니다. 미국은 자유로운 나라인데,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지금 이 시대가 자유롭지 않은 시대라고? 물으면 그것은 자유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자유의 통제는 멀리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자유로운 미국에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를 누리지 못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유는 소중한 것이지만 모두에게 다르게 다가옵니다. 특히 이 자유라는 말이 경제에 적용되면 참 요상한 것이 되고 맙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사는데 누가 뭐라고 말할 때 그것은 맞는 말 같지만 내 능력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든지, 시간적인 것이 잘 맞았든지, 백인으로 태어났든지, 모든 것은 자기의 능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아무런 불편 없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 자유로운 시대는 아닙니다.

독일의 사상가 슈타이너의 사회 삼층론은 매우 유명한 주장입니다. 그는 “경제에는 우애를, 법과 정치에는 평등을 정신생활에는 자유를”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자유는 좋은 말이지만 그것이 아무데나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하지만 세상의 법을 어겨가며 자유롭게 살아갈 때 그것을 우리는 범죄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과 표현에는 자유가 있어야 하지만 우리 고국은 아직도 사상을 통제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에는 나눔의 우애가 있어야 하는데 난데없이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이것은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짝이 된 것입니다.

자유무역협정 통과된 고국,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란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우리의 고국 사이에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것이 비준되었습니다. 경제 블록이 무너지고 있는 세계화의 시대에 관세라는 장벽을 없애고 자유롭게 경쟁하자는 것이 기본 취지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품질 좋고 값싼 물건을 구입할 수 있으니 당장은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현상이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대형 마켓 때문에 동네에 작은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을 것입니다. 사는 사람이 있어야 파는 사람이 있는데 소비자 층은 점점 얇아지고 궁극적으로 작은 나라의 경제는 큰 나라에 예속되고 작은 기업은 대기업에 예속되게 됩니다. 당장 싼 값에 혜택을 보던 서민들의 장바구니는 다시 원위치가 되고, 그들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미국의 대규모 농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한국의 농촌은 피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FTA 반대 목소리는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에 관계된 것이 아닙니다. 경제라는 분야에는 자유라는 말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가져올 파국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며 우리 모두 지금 당장 얻게 되는 가벼운 혜택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무엇입니까. 지금 당장 내가 혜택을 보기 때문에 자유 무역이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닙니다. 오늘 고린도 전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자유란 항상  봉사와 같이 가는 개념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전서 9: 19-23)

   
 
  ▲ 한국의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미자유무역협정 반대 집회. (ⓒ 한겨레 사진마을 열린사진가장소, 촬영자 : anna8078)  
 
자유란,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이 되어주는 것

자유란 모든 사람을 위해 모든 사람이 되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나와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자유이기는커녕 나에게 책임을 지우고 얽어매는 귀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자유와 짝을 짓게 될 때 끝없는 욕망을 향해 달려가게 되고 그 끝에서 모두에게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낙관입니다. 레갑 사람들은 이 착취의 구조 속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오랜 세월 참 재미없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은 이 땅에 오셨던 아기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기에 우리에게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평화도 자유와 마찬가지로 나 혼자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굽었던 길을 평탄케 해서 예수님이 오시도록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점점 굽은 길로 가는데 나는 세상의 욕망에 도취해서 굽은 길이 바르게 보인다고 바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점점 가시밭길이 되어 가는데 혼자서 착취의 구조 속에 비교적 상위에 속해서 자유롭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당장 사과 몇 알이 싸졌다고, 외제차를 관세 없이 싸게 탈 수 있게 되었다고 욕망의 제도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진정한 자유인을 찾고 계십니다. 대림절 기간 나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 좋은 일이 과연 무엇일가를 고민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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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희 2011-12-10 20: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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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수호 2011-12-08 12:32:41
이글을 쓰신 분께 묻습니다.

1. 레갑 족속이 성전파티에 초대되었다고 했는데, 예레미야 35장은 그 어디에도 파티, 연회, 잔치와 같은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5절에 보면, “내가(예레미야) 레갑 사람들의 후손들 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 권하매”(한글개역개정)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어로도 “bowl”의 뜻인 “가비야”(한글개역성경은 “종지”로 번역)와 “cup”의 뜻인 “코우스”(한글개역성경은 “술잔”이라고 번역)를 사용합니다. 그릇에 담긴 술 한잔과 컵 크기에 담긴 술을 앞에 두고 마시라고 하는 것이 파티입니까? 혹시 “고관들의 방곁(고관들의 방도 아님)이요 문을 지키는 살룸의 아들 마아세야의 방 위”(4절)에서 예레미야가 술을 권했다고 해서 파티라고 함부로 해석한 것인가요?

2. 레갑족속이 하나님의 명을 어겼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레갑 족속들에게 무슨 명을 내린 것이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레갑족속들을 불러다가 술을 권해 보라는 명령만 내렸습니다. 레갑족속이 술을 마셔야 한다는 명령은 그 어디에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명을 어긴 것인가요? 조상들의 명을 잘 따른 것밖에는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간접적으로 굳이 더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술을 멀리한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더 합당한 경건의 삶이 아니었을까요?

3. 레갑 족속 이야기의 주제가 “착취”라고요? 예레미야 35장에 나오는 레갑 족속의 이야기를 눈을 닦고 읽어보고 또 읽어봐도, “순종과 불순종”이 주제인데, 어떻게 착취가 주제입니까? 레갑 족속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말에 그 만큼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유다 사람들(14-16절)에게 빗대어 보여준 현장감 있는 생생한 예인데 어떻게 착취가 주제가 되나요?

5. 그리고 이런 레갑 족속의 이야기를 어떻게 FTA와 연결 시키나요? 그리고 어떻게 “자유”와 연결을 시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