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최근의 십일조 논쟁은 적어도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가 아닌, 신약교회시대에 해석학적으로 십일조가 성서적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으로 압니다. 최 목사님의 주장은 이제껏 "뭐 성경에 나왔으니 하는 것도 무방, 안 하는 것도 무방, 그걸 논제로 삼지말고 다른데 신경써라" 뭐 그런 말로 들립니다. 십일조와 황금률이란 짝맞추기가 어색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십일조논란은 결국 많다고 생각하는 자와 적다고 생각하는 자와의 끝날 수 없는 논쟁이라 생각합니다. 십일조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십분의 일이나 가져가냐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일부만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십분의 구를 가질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자의 경우는 성경에 나옵니다.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주인님은 주시지 않은 곳에서 가져가시는 분이라서..." 하며 해명합니다만 결과는 주인의 분노였습니다.
십일조를 논란으로 삼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고 지금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척도인 것 같습니다.
십일조... 성경에 나와 있고 상당수가 아름답게 따라온 전통이 있으니, 다른 사람 신경쓸 거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는 거이 '황금률'을 이루는 거이다, 좀더 말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목적이 좋으면 성경적이냐 아니냐 복잡하게 짜질 거 없이, 괜시리 마음을 평안을 깨는 고민을 할 거 없이 깨끗하고 산뜻하게 십일조를 하라, 그러면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즉 교회에서는 넘치는 기쁨, 넘치는 소망, 넘치는 친절, 넘치는 관대함, 넘치는 용서를 체험케 된다', 뭐 그런 권유인 것으로 읽혀지네요.
그런데, '십일조와 황금률'이라... 짝이 되기에는 여전히 억지 연결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율법적인 복음'과 같은 형용모순의 주장 같은.
다시 덧붙이면, 십일조 문제와 (계급화된) 직분 문제는 한국교회를 타락시킨 주범이라는 일반 인식 이전에, 십일조가 과연 황금률 이라는 단어로 짝을 이룰 만큼 성경적이냐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집니다.
십일조... 성경에 나와 있고 상당수가 아름답게 따라온 전통이 있으니, 다른 사람 신경쓸 거 없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하는 거이 '황금률'을 이루는 거이다, 좀더 말하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목적이 좋으면 성경적이냐 아니냐 복잡하게 짜질 거 없이, 괜시리 마음을 평안을 깨는 고민을 할 거 없이 깨끗하고 산뜻하게 십일조를 하라, 그러면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 즉 교회에서는 넘치는 기쁨, 넘치는 소망, 넘치는 친절, 넘치는 관대함, 넘치는 용서를 체험케 된다', 뭐 그런 권유인 것으로 읽혀지네요.
그런데, '십일조와 황금률'이라... 짝이 되기에는 여전히 억지 같은 참 안타까운 연결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율법적인 복음'과 같은 형용모순을 묘사한 비슷한 안타까운 주장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십일조 문제와 (계급화된) 직분 문제는 한국교회를 타락시킨 주범이라는 일반 인식 이전에, 십일조가 과연 황금률 이라는 단어로 짝을 이룰 만큼 성경적이냐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