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로 본 개신교인의 품격
댓글로 본 개신교인의 품격
  • 최태선
  • 승인 2015.01.10 15:24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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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우선하는 법 배우기

한 신부님이 제가 쓴 글을 천주교 관련 매체에 올리셨습니다. 자연스럽게 그곳에서 달리는 댓글들과 개신교 관련 매체들에 달리는 댓글들이 비교되었습니다. 우선 천주교 분들이 댓글을 훨씬 더 많이 달아준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개신교 분들이 다는 댓글에 비해 매우 훌륭했습니다. 동의를 하건 안 하건 비교적 글의 태도가 정중했고 무엇보다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의 주관적인 판단이 되지 않기 위해 제 글이 아닌 다른 글들에 달려 있는 댓글들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판단의 자료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개신교인으로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신교 매체에는 거들먹거리는 댓글이 많은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누군가 읽을만한 글을 쓰는 사람은 그래도 무언가 아는 것도 제법 있고, 경험 또한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글에 담긴 내용이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를지라도 최소한의 존중이나 배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댓글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상대방을 깔보는 태도를 쉽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댓글을 다신 분이 목사님이나 신학자이시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댓글을 다시 읽어 보면 그런 분들은 글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파악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댓글에 담긴 사고나 내용보다는 원래의 글이 더 타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무례하거나 무성의 하거나 함량이 미달되는 댓글들은 개신교라는 기독교의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표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개신교 전체의 분위기, 개신교 신학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한계, 혹은 분위기 전체가 그렇게 냉랭하고, 무자비하고, 나아가 거칠고 사납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사실 온라인 상의 댓글은 특히 댓글을 단 사람의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군자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그 사람이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를 보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 그러니까 아무의 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는 상태에서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에서 쓰여지는 것이 바로 댓글입니다. 그러므로 댓글이 형편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이 미달된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개신교의 위기를 파악하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댓글 하나에 나의 인격이 담겨 있고, 그것이 개신교와 관련된 매체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개신교 전체의 평판과 관련된다는 것을 댓글을 달 때마다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말보다는 글에 자신의 사고는 물론 인격과 성품이 더 잘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열매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단 댓글을 보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자신이 단 댓글을 통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영적 성숙의 바로미터라는 걸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분들을 보면 그분들의 태도가 친절하기보다는 매우 폭력적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발적인 동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예외가 아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분이 결코 하지 않으시는 것이 바로 강요입니다. 사랑의 속성에는 강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자랑하지도 않고, 교만하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오래 참습니다.

 오래 참는다는 말은 인내한다는 것입니다. 인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충동은 타자를 동일하게 낮추고 타자를 내가 중심인 세상에 맞도록 대상화하고 타자를 근본적으로 나에 관하여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낮추는 것이다. 인내는 “진리”와 비교하여 타자를 우선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For a church to come』피터 C. 블룸 p. 62

 

한 마디 한 마디가 명심해야 할 참으로 귀중한 권고들입니다. 우리의 충동, 다시 말해 우리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격적 특성을 먼저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타자를 동일하게 낮춘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른 이들을 낮추기를 원합니다. 자신과 대등한 상대로 만들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무시하기 위해, 상대방을 짓밟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주변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어가 되어버린 '갑질'의 일종입니다. 갑질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사회를 지옥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갑질을 하는 본인은 통쾌하기 이를데 없겠지만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과 존엄을 박살냅니다. 더 끔찍한 것은 갑질을 하는 사람의 인격 역시 최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의 대전 백화점 사건을 통해서 누구나 볼 수 있듯이 갑질이라는 패악질을 하는 여인에게서 우리는 사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주변에 지옥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옥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갑질을 당하는 사람의 합리화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이 되어버린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는 것을 언젠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타자를 내가 중심인 세상에 맞도록 대상화한다는 것 역시 우리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입니다. 사람은 대상화 되어서는 안 되고, 대상화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대상화라는 것은 곧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대상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자신과 관련이 없는 사람입니다. 대상화된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해의 대상도 아닙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불행은 관계의 단절로부터 일어납니다. 자살 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릴 상대가 한 사람도 없는 사람이 마침내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결국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은 그가 부유하건 가난하건 죽음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기 위해 버려진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는 그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사명임을 그리스도인들은 늘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백소영 교수님에게서 평생 잊지 못할 귀중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사랑은 사랑 받는 자의 힘에 의해 그 사랑의 진위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이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가장 우선시되는 속성입니다. 아무런 힘도 가지지 않은 갓난아이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엄마처럼,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그렇게 우리는 상대방이 가진 힘에 의해 꼼짝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대상화는 바로 그 반대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길에서 돌아서 반대의 길을 걷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생각만해도 황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타자를 근본적으로 나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낮춘다는 말 역시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귀중한 조언입니다. 사실 저는 최근에 들어서야 저 자신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제가 읽는 수많은 책들의 내용 가운데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책을 쓴 사람의 사고는 얼마나 깊고 높겠습니까?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분들에게 이제는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그분들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미성숙하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같은 의미에서 나에게 새로운 통찰과 깨달음을 주는 그런 분들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돌아보면 저는 끊임없이 타자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끌어내려 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것처럼, 우리는 얼마나 쉽게 누구든 다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너무도 쉽게 배우게 되는 사회적 학습의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평상시라면 감히 만나지도 못할 사람들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선거 기간 동안에는 우리가 그런 분들이 허리를 90도로 굽혀 하는 인사를 받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나와 동일한 수준에서 보는 정도를 넘어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낮추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사회는 피상적인 관계를 관계의 전부로 아는 추상적인 사회가 됩니다. 관계가 있고 만남이 있지만 그런 관계와 만남은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혹은 일정한 기간 특수한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추상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거기에서 문제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존중과 존경이 사라진 사회는 필연적으로 무질서하거나 범죄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정글이 된 현실을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몰인정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충동을 넘어 진리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인내가 없다면 우리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한 하워드 요더는 인내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매우 다르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진리”와 비교하여 타자를 우선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리'와 '타자를 우선하는 것'을 대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이 대조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 짝임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맞는 지적입니다. 제가 최근 들어 가장 명심하며 사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 역시 그동안 진리를 주장하고, 진리를 내세우며 살았습니다. 무엇이 바른 것이며, 무엇이 복음이며, 무엇이 옳바른 교회의 모습이며, 무엇이 개혁이며, 무엇이 구원이며, 무엇이 천국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가르치며, 열심히 내세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제 생각과 반대였습니다. 진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분열이 일어나고, 진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불화하고, 진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이단들이 창궐하고, 진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이 되고, 진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정죄와 판단이 일상화되고, 진리를 내세우기 때문에 위로와, 용서와, 평화와, 기쁨과, 정의와 심지어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뜻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되는 것은 우리가 틀린 것을 따라가기 때문이 아니라 옳은 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낮추고, 개념화하고 , 대상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길을 걷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타자를 우선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럴 수 있을 때까지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상대방이 틀린 것이 명확한 경우도 상대방과 함께 틀린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이 틀린 것임이 마침내 드러나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할 때까지 옳은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면 그것을 인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하지만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곧 바로 뒤돌아서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옳음을 주장하는 것 역시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인내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이 누구이건 그 사람 주변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은 빛으로 드러나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절대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형제애를 지닐 수 있겠는가?"라고 간디는 말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사람들이 형제로 보이십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바로 절대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인내를 배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인내는 진리와 비교하여 타자를 우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절대 진리를 내려놓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의 충동을 극복하고, 절대 진리를 내려놓고, 인내 안에서 다시 한 번 댓글을 달아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그 세상은 누룩이 들어 있는 밀가루반죽처럼 소리없이 부풀어 오를 것입니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흐드러지게 한 번 웃어보고 싶습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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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글이길레? 2015-01-11 01:27:39
과연 최 목사님께서 무슨 글을 쓰셨길레 천부교의 신부가 자기들의 싸이트로 퍼 갔을까요? 무슨 내용이길레 천주교 신자들이 더 우호적으로 댓글을 달았던 것일까요? 저는 그것도 매우 궁금합니다. 친절과 인격, 남을 귀히 여기는 마음보다는 영혼을 죽이고 살리는 피 묻은 진실의 중요함이 베여나오는 글이었다면, 과연 교황을 영혼의 거룩한 아버지로 믿는 천주교의 신자들이 목사님의 글을 좋아하고, 우호적인 댓들을 달았을까요? 그냥 떠오르는 우려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제가 잘못 우려하는 것이라면 용서를 바랍니다.

shadow 2015-01-11 02:43:13
최목사님의 본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무슨 글이길레?"님
글 서두에 보니 이런 부분이 있군요
" 저의 주관적인 판단이 되지 않기 위해 제 글이 아닌 다른 글들에 달려 있는 댓글들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어떤 판단의 자료가 될 수는 없겠지만 개신교인으로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
_ 판단에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글 내용이 상당히 진실성과
설득력이 있는 좋은 글입니다.
물론 다른 분들은 다르게 받아들일수도 있겠죠.

tedseo 2015-01-11 02:46:32
타자라는 단어가 생소해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제 어휘력이 부족해서인지 모르지만 타인이라는 표현이 더 대중적이 아닐까요? 목사님의 논조대로 타자를 배려하고 우선시 해야한다면 타자보다는 일반적인 단어를 선택하셔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tedseo 2015-01-11 02:54:50
shadow님. 자신의 의견이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타인의 견해까지 수정 평가하지 마시구요.

무슨 글이길래? 2015-01-11 03:08:12
최 목사님!
무슨 글인지 읽어보고 싶습니다.
말씀하신 그 글을 어디에서 찾아서 읽을 수 있는지요?
알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