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아나뱁티스트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아나뱁티스트
  • 김창규
  • 승인 2015.03.30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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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과 냉대 딛고 60년대부터 재평가

16세기 종교개혁을 살펴보면 기독교 내의 부패한 기존 세력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목표는 유사했으나 루터,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과 같은 온건한 개혁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꾸고자 했던 급진적 세력이 있었다. 그들 중의 하나가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이다. 그러나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들에 대한 교회사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였고, 1920년대가 넘어서야 비로소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의 입장에서 역사가 재해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다시 말해 1960년대 이전까지 재세례파는 마치 대부분의 미국 서부 영화에서 백인은 문명화된 개척자이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인디언은 잔인하고 무지한 이들로 묘사되었던 것처럼, 종교개혁 주류 세력의 관점에서 소수파인 그들은 부당하게 평가되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당시에 출현한 재세례파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며, 그들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이단자, 광신자 또는 반란자인 아나뱁티스트?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자신의 신앙을 스스로 고백할 때 세례를 주어야 한다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종교개혁이 한창인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쮜리히에서 쯔빙글리와 함께 개혁운동을 펼치던 그룹 중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온전한 교회 개혁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으로 그들만의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중 유아세례의 부당성을 확신하여 스스로의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신자의 세례’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후로 신자의 세례는 스위스 쮜리히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모라비아, 그리고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러나 재세례파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역마다 추구하는 신앙적·교리적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것은 재세례파 운동이 한 사람의 신학 사상을 조직적으로 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동시대에 성경에 근거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최소한 신자의 세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지금까지 시행해오던 가톨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심한 냉대를 받았다. 루터는 급진 종교개혁자들을 가리켜 '광신자들'이라고 불렀고, 칼빈은 더 나아가 '미혹된 자들', '두뇌가 산만한 자들', '고집쟁이들', '악당들', '미친개들'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불링거(Bullinger)는 심지어 “그들은 마귀적인 원수들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했다.

현대 역사가들도 재세례파에 대하여 그리 너그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영국의 사학자 엘튼(G. R. Elton)은 재세례파들이 주장하는 신학은 이성을 부인한 비합리적이고 심리적으로 불균형적인 망상에서 탄생한 격렬한 현상으로, 그들은 인간이 직접적 영감을 받아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재세례파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기존 교회의 전통으로 인정되던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혼란이다. 당시 가톨릭에서의 유아세례란 성례전의 의미를 넘어서, 국가 교회 내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것이며 또한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등록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는 곧 교회의 전통에 반기를 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법을 위반하여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이해하는 세례론이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만, 유아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예식으로 인정하는 데는 유사한 부분이 있으므로, 유아세례의 거부로 인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염려는 가톨릭과 다를 바 없었다.

둘째 신자의 세례를 시행한 그룹의 신앙 패턴이 지역과 리더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란 ‘종말론을 강조하며 폭력적인 사상을 지닌 그룹’이란 인식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경우 재세례파는 1534~1535년 북부 독일 뮌스터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과 연관해서 판단되었다. 재세례파 중에는 폭력적 성향을 지닌 종말론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믿고, 계시를 통해 새 예루살렘이 뮌스터라고 주장하며, 폭력적으로 이 시를 점거하고 신자의 세례를 거부하는 이들을 처형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 라이덴의 얀이라는 자는 자신을 스스로 ‘만백성의 의의 왕’으로 추대하여 그곳에서 신정통치를 시작한다. 이들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연합군이 공격이 시작되고 결국 유혈 대학살로 이들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가들은 위의 두 가지 관점으로 종교개혁자들이 재세례파를 묘사한 것에 비추어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려왔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반정부적 집단을 형성하였기에 그들은 국가에 대한 반란자들이고, 교회의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이단자들이란 것이다. 더욱이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 즉 종말론적 예언과 예수 재림의 계시, 구약의 관습을 그대로 좇아 행하는 중혼제도, 재세례를 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처형하는 것 등은 분명 이단자로 낙인 받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재세례파에 대한 이런 평가는 몇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첫째 그들이 주장하는 신자의 세례는 유아세례를 거부하여 사회적 질서를 깨트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의 의미를 좇아 행함으로써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권력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물론 유아세례의 거부가 가톨릭의 핍박을 유발한 것은 당연했을지 몰라도, 교회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던 개혁자들에게도 걸림이 되었던 사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쯔빙글리와 같이 국가의 힘을 입어 개혁을 주도하는 이들에게 유아세례의 거부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교회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음을 말하며, 이는 더 이상 국가의 권력을 업고 개혁을 추진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유아세례의 주장은 성경적인 옳고 그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개혁을 위한 정치적 논리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뮌스터 사건이 재세례파를 대표하거나 정의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뮌스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단지 여러 분파의 재세례파들 중에 일부였고, 실제적으로 재세례파의 큰 줄기인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 모라비아의 재산공동체인 후터파(Hutterite), 북부 독일과 화란의 메노나이트(Mennonite) 등의 그룹과는 극히 대조되는 신학과 삶을 보여준다. 뮌스터 사건을 재세례파의 전형적인 또는 대표적인 사례로 보게 되면 하나의 잘못된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신학의 주요 쟁점은 무엇인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재세례파의 운동은 한 사람의 신학에 의해 시작되거나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서로 다양한 신앙과 신학의 노선 중에서 이 운동의 동기와 그들 간의 공통점을 중심으로 재세례파의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재세례파 신학의 이해는 먼저 그들의 성경관으로 시작해야 한다. 당시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으로’ (Sola Scriptura) 처럼 재세례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교리와 삶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에서 요구하는 명령과 법도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따라야 하는 규범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구약보다 신약을 더 강조하였는데,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라면, 신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성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성경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론 (Christocentrism)으로 연계됨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규범이며 행동지침이다.

재세례파들이 강조하는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은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 내린 명령 ‘가르치고 세례를 주라’는 말씀을 실천했다.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세례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죄와 믿음을 고백하며 앞으로의 삶을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헌신하며 살겠다는 결단이다. 이것은 세례가 죄를 씻는 하나의 성례전임을 부정하며, 더 나아가 믿음이 선행되지 않는 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기에 재세례파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비성경적이고 의미 없을 뿐 아니라, 유아세례의 실행은 예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따르려 했던 재세례파들의 모습은 그들의 교회론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했는데, 참된 교회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자신이 죄인임으로 스스로 고백하여 모인 이들 즉 신자의 세례를 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따라서 교회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이므로 교회는 국가로부터의 간섭이나 통제로부터 철저히 독립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던 전쟁과 종교 박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가톨릭과 종교개혁자들의 폭력 앞에서도 무저항주의와 평화주의를 지켜나갔다.

신자의 세례와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열심은 교회 내에서의 제자도와 이에 따른 공동체의 치리로 나타났다. 교회는 공동체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서로 돕고 격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자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사랑 안에서 그러나 엄격함으로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가 ‘그리스도 믿음이’ (believers of Christ)를 배출한 결과를 가져왔다면, 재세례파들이 말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따름이’ (followers of Christ)를 선택한 것이다.

위의 내용은 재세례파에 관한 아주 개략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재세례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를 바라볼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소수자를 바라보고, 선입견과 편견으로 그들을 정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외쳤던 신앙을 볼 때 우리는 과연 그들을 쉽게 이단자로 또는 반란자로 정죄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던 자들이었다. 자신들의 세상적 이익에는 관심이 없던 그들, 신자의 세례가 예수의 명령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 분의 삶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이'로 살아가는가, '따름이'로 살아가는가?

김창규 / 영국 Trinity College(Bristol)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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