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유령을 축사(逐邪)하는 교회의 힘은 어디서?'
'시대의 유령을 축사(逐邪)하는 교회의 힘은 어디서?'
  • 김기대
  • 승인 2010.04.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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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영화로 신학하기' (6) [고야의 유령]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28)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7-28)

 

▲ 영화 <고야의 유령(Goya's Ghosts)>.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벌써 200여 년이 훌쩍 지나간 18세기. 그동안 프랑스에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어가고 있었고, 신대륙으로 이민 간 사람들의 소문이 멀리서 들려왔다. 신대륙은 신교인들에게는 약속의 땅이었고 구교인에게는 남 주기 아까운 땅이었다. 대표적인 구교 권력인 스페인 교회는 중세처럼 강하고 싶었다. 

스페인 교회는 이슬람의 통치 기간 동안의 트라우마가 너무 컸기에 다시 잡은 교회 권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신대륙 중 아직 신교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남미 대륙을 피비린내 나게 정복하고 원주민을 '선교'한다. 국내적으로는 이미 구시대 유물이 되어버려야 할  종교 재판을 통해 교회 권력을 강화하고 혁명의 정신이 프랑스로부터 남하하는 것을 막아낸다.
 
스페인 궁정화가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는 종교를 빙자한 이 문화를 견디기 힘들었다. 성당 벽화를 새로운 기법으로 그려 봄으로써 탈출구를 찾지만 사제들의 비난이 드셌다. 종교 권력, 왕실의 절대 권력이라는 유령 앞에서 객관적 묘사라는 근대성으로 맞서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훗날 프로이드에 의해 무의식이라고 이름 부쳐진 또 다른 유령이 힘겨워하는 고야를  찾아온다. 그는 처음 만난 이 유령을 만화 같은 기법, 또는 판화를 통해 표현한다.
 
고야의 모델이었던 이네스는 발랄한 부잣집 처녀다. 그녀는 어느 날 종교 재판소의 소환장을 받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소환 이유였다. 그냥 싫어서 먹지 않은 것뿐인데 그것이 유대교의 증거로 채택되었으며 무시무시한 고문 끝에 그녀는 자신이 유대교를 믿어왔다고 거짓 자백을 한다.

종교 재판소에서 고문에 의한 자백을 인정하는 배경에는 예외 없이 그들의 편의에 따라 사용하는 '하나님'이 있다. 정말 죄가 없다면 하나님이 그 고문을 이기게 해서 자백을 하지 않게 할 것이고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그 힘을 주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고문에 의한 자백은 유효하다는 이 허망한 논리가 종교 재판정의 논리였다.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에게 예수 죽음의 책임을 물었던 이래 교회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외부 세계에서 스페인으로 조금씩 전해져 오는 계몽의 바람을 막는 데는 유대인만큼 좋은 구실이 없었다.

그녀의 부자 아버지는 딸을 풀어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무시무시한 종교 재판소를 상대로 로비를 해줄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는 마침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화가 고야의 소개로 로렌조 신부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다. 그는 거액의 성당 개축 헌금을 제시하며 신부와 거래를 하지만 신부는 뇌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가 죄가 없다면 하나님이 그녀를 지켜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분노한 이네스의 아버지는 신부를 딸이 당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한다. 그리고 "나는 원숭이고 교회 파괴자"라는 진술서에 서명하게 한다. 당신이 원숭이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고문을 이기게 해주실 것 아니냐는 교회의 논리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아버지는 이 진술을 가지고 딸의 석방과 거래하고 로렌조 신부는 주교를 찾아가지만 주교는 성전 개축 헌금만을 챙긴 채 석방을 외면한다. 아버지는 이 각서를 폭로하고 로렌조 신부는 종교재판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간다.

15년 후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을 점령했을 때 로렌조는 나플레옹 군대의 고위 관리가 되어 스페인에 '금의환향'한다. 그는 그동안 프랑스에서 이성과 계몽, 박애라는 혁명 정신의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교회 권력과 믿는 대상만 다를 뿐 이성의 맹신 아래 스페인을 짓밟는다. 이네스의 가족도 이 와중에 모두 죽는다. 프랑스 군대는 종교재판소를 해체하고 신부들을 투옥하고 종교재판 피의자들을 석방한다. 이것은 종교의 자리에 이성이 대신하게 된 사건이지만 바뀐 것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 뿐이다. 
 

 

폐인이 되어 석방된 이네스는 고야의 집을 찾아간다. 여기서 그녀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 놓는다. 감옥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를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아이의 아빠는 로렌조다. 자신에게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로렌조는 수소문 끝에 자신과 이네스 사이에서 난 딸 알레시아를 찾는 데 성공한다. 그녀는 거리의 여인이 되어 있었다.

 

로렌조는 아버지임을 숨긴 채 알레시아에게 신대륙 행을 권유한다. 그에게 신대륙은 기회의 땅이 아니라 죄인들의 땅이다. 로렌조가 자신의 말대로 이성과 계몽으로 거듭났다면 신대륙은 신앙의 땅이기에 무지의 땅이다. 무지의 땅이기에 죄인들이 살기에는  좋은 땅일 뿐이다. 이성과 신앙이 과소비되고 있는 오늘 미국은 어떤 땅일까?

알레시아가 낯선 이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어쨌든 딸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로렌조는 사창가 단속을 벌이고 모든 매춘부들을 잡아서 신대륙으로 강제 이주시키기로 한다. 고야는 로렌조보다 먼저 화가다운 직관으로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알레시아가 이네스의 딸인 것을 알게된다. 이네스 역시 딸을 찾는다. 매춘부들이 모두 잡혀간 선술집에 남겨진 어느 이름 모를 매춘부의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확신한다. 15년이라는 세월을 잊어버린 이네스는 이 아이를 품에 안고 돌본다.

영화는 누가 진짜 딸인가를 우리에게 묻는다. 로렌조처럼 관계자들의 증언을 추적해서 이성적으로 찾아낸 딸이 진짜 딸인가? 그런데 이성으로 찾아낸 딸과의 관계를 로렌조는 끊으려고 한다. 이성의 시대는 사제들이 몰래 낳은 아이들을 버렸다는 소문이 성행하던 중세보다 나은 시대가 아니다. 그렇다면 화가의 직관으로 찾아낸 딸이 진짜 딸인가? 직관으로 찾아낸 딸은 부모에 대해 관심이 없다. 고야 역시 그녀가 이네스의 딸이라는 것만 알 뿐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사실이 사실 그대로인 것이 인정받는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사실이 사실 그대로인 것이 해줄 수 있는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세월을 잊어버린 채 주은 아기를 제 딸인 줄 믿고 정성을 다하는 이네스 품 안의 아이가 진짜 딸인가? 생물학적으로는 딸이 아니지만 둘의 관계가 가장 아름답다. 생물학적 엄마는 잡혀가고 자신이 엄마라고 믿는 이 미친 데다 가짜이기까지 한 엄마는 아기를 돌본다. 두 명의 알레시아(매춘부 알레시아와 이름 없는 아기)와 세 명의 찾는 사람 사이에 어떤 관계가 가장 아름다운 관계인가를 통해 생물학적 기준으로 맺어진 가족애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인가 영화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에는 영국군이 침공하고 프랑스군은 서둘러 퇴각한다. 강제 이송 당하던 매춘부들은 풀려나고 알레시아는 재빠르게  영국 장교의 여인이 된다. 감옥에 갇혔던 주교는 풀려나고 탈출에 실패한 로렌조에게 회개하면 살려 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성이라는 죄에 빠졌다가 용서를 구하는 로렌조가 교회로서는 훌륭한 선전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렌조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에게는 종교도 이성도 이제 더 이상 구원의 도구가 아니었다. 로렌조가 도망가다가 총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을 때 그가 프랑스에서 꾸린 가정의 아내와 아이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도망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에게 새로운 기쁨을 준 가족도 구원의 안식처는 아니었던 것이다.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알레시아는 자신을 신대륙으로 보내려고 했던 그 남자(아버지)의 사형 현장을 영국 장교와 함께 즐겁게 내려다본다. 고야는 여전히 그 모습을 그림에 담는다. 이네스는 아기를 품에 안고 아이의 아버지를 애타게 부른다.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고 수레 위에 버려진 로렌조의 시체를 따라가며 이네스는 그의 손을 놓지 않는다.

영화 밖 고야는 이성을 신뢰했던 것 같다. 그의 판화집의 부제는 "이성이 잠들면 마귀가 깨어난다"였다(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 감독은 이 부제에서 Monster만 Ghost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서 이성은  잠들지 않고 활발했다. 이성이 잠들면 유령이 깨어나겠지만 이성이 유령이 되면 세상은 더 위험해진다.
 
고야의 시대에 출몰하던 유령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가? 종교권력은 이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지배하려고 들고,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다. 중세는 세상이 교회 밑에 있다고 믿었기에 종교 전쟁이 그나마 명분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세속에 대한 종교 권력이 약화된 이 시대에 종교는 여전히 전쟁에 개입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라는 유령은 서로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싸운다. 이 와중에서 죄가 없다면 하나님이 고문을 이기게 해준다는 터무니없는 확신처럼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어떤 학자는 고문을 정당화하고 어떤 정부는 비밀 감옥을 운영한다.

한국의 반공 기독교라는 유령은 전쟁을 부추기며 십자가 대신 성조기를 흔든다. 근본주의자들이 진화론과 대화를 거부할 때 다윈 근본주의자들은 교회의 무지를 비웃으며 세상을 지배하려 든다. 싸움에 지친 이들은 관용을 거론하며 모든 것은 다 같다는 일반화의 유령에 빠져들면서 싸움도 말리지 못하고 진리도 수호하지 못한다. 보편화의 유령을 벗어나고자 개별적 사실과 묘사에 치중하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 시대 풍조(에베소 4:14)가 세상에 희망을 주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세상은 교회를 비난하지만 세상에도 대안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교회의 모략이 뛰어나 보일 때가 있다. 성당 개축 헌금을 이네스의 아버지로부터 받고도 이네스를 석방하지 않은 주교의 예를 보자. 헌금은 귀하게 받고 하나님의 성전은 아름답게 개축하고 헌금한 이의 이름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지만 이교도임를 자백한 이네스를 풀어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뇌물에 넘어가지 않는 주교는 신앙적으로 순수하다." 이 명제는 윤리적으로 옳다. 그런데 윤리적으로 옳은 것이 죄 없는 생명을 구하지 못할 때 자크 엘룰이 이야기한 윤리의 한계가 새삼 떠오른다. 

 

반대로 주교가 이 헌금을 받고 이네스를 풀어 주었다고 치자. 세상은 무죄한 자를 풀어준 거룩한 주교로 그를 기억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주교는 스스로의 믿음을 부정하고 뇌물에 넘어가고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한 사제가 된다.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관객)은 주교와 정치적으로 거래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이래도 욕을 먹고 저래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영화 속 주교의 선택은 '정치적'으로 옳다. 그의 정치력은 로렌조에게 목숨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잘 발휘된다. 그는 알레시아의 행방을 가르쳐주며 자신의 목숨을 구걸한다.

이성의 시대가 되었기에 죽어도 순교자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즉 죽어도 욕을 먹고 살아도 욕을 먹을 바에야 굳이 죽음을 택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성(윤리)에 사로잡힌 결벽주의자들은 뱀처럼 교활하지도 못하고 비둘기처럼 순수하지도 못하면서 과학과 이성의 힘으로 상대방을 퇴로 없이 몰아 부치며 세상을 지배하려 든다. 그들은 이성의 시대가 가져온 비극이 종교의 시대가 만들었던 비극보다 더 비참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예술도 대안은 되지 못한다. 그림으로 모든 것을 남기며 시대정신을 지키려고 했던 고야의 시도는 기특하지만 영화 속에서 사건을 좇아가는 그의 시선은 비겁하다. 이처럼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유령이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모두가 유령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자신은 진리를 따라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시대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영화는 이네스에게서 그 해답을 찾는다. 이네스는 미친 여자다. 그러나 푸코의 주장처럼 미친 사람은 이성 중심적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만들어 놓은 존재다. 미친 사람뿐 아니라 어린이 피식민자 여성을 근대 사회가 타자화했다.

그러나 타자로서의 이네스는 그의 정신은 미쳤을지 몰라도 영혼의 순결함은 유지했다. 그는 품안의 아이를 보호하며 '아이의 아버지'로서 로렌조의 마지막을 지킨다. 세상에서 로렌조는 추악한 인물이었지만 이네스는 죄인의 곁을 지킨다. 아니, 그가 죄인인지조차 모른다.

죽은 자와 함께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그러나 그녀의 품에는 태어난 생명이 있으며 손에는 죽은 자의 손이 있다. 그녀에게 육체의 목숨이나 혈연관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의 사랑이 닿는 것은 곧 살아있는 것이고 나의 가족이다. 

육체로서 사고 능력은 상실한 미친 사람이지만 영혼은 살아있다. 영혼까지 죽어버린 유령에 잡힌 자들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실패한 자를  끝까지 따르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 아름답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배신한 유다와 도망간 제자들과 달리 여인들이 자리를 지켰듯이 이성도 종교도 다 망가진 그 마지막 길을 이네스가 지킨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용서하는 교만도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용서하는 기독교적 역설도 없다. 약한 자가 실패한 자와 함께 걸어감이 있을 뿐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반지를 지니려고 하는 세력과 버리려고 하는 세력 사이의 지루한 싸움에서 버리려는 선한 세력에 힘을 보태는 존재들은 마법사, 난쟁이, 요정 등 비근대적 인물들이다.

근대는 막스 베버가 지적한대로 탈주술(탈마법)의 시대이며, 요정과 같은 동화 속 인물은 계몽주의 시대에 설 자리가 없었다. 난쟁이 같은 장애자는 근대 의학에서 의학적으로만 판단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 근대에서 버림받은 존재들은 선한 세력의 주축이 된다. 그러므로 시대를 끌고 가는 것은 그럴듯해보이지만 실체는 없는 유령이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 세상의 약한 것,  세상에서 비천한 것,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다. 교회는 그들과 함께하겠다는 단계를 넘어서서 그들처럼 어리석어져야 한다.

지난 세월 동안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사회적 약자들을 구원의 담지자로 끌어 올리는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론가들은 이 구원의 담지자들을 '주제 넘게' 계몽하려 했고, 실천가들은 실천적 정의감으로만 무장된 채 실패한 자들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 틈새를 터무니없는 기복신앙이 밀고 들어 왔다. 그들은 영화 속 주교처럼 정치적으로 교활하게 입지를 확고히 했다. 욕망의 유령에 사로잡힌 이러한  교회들이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그를 벗어나려고 했던 교회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설자리를 잃어 버렸다. 스스로 약자가 되지 못하고 약자를 계몽하려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세상 지혜를 모두 가진 강자로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진정한 약자와 착각한 약자들의 부조화 속에 진보적인 교회들은 하나 둘씩 무너져 갔다. 교회들은 사회복지 시설같은 근대적 제도를 통해 실수를 만회하려 했지만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그것 역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다른 세계를 조종"하려 한다는 점에서 욕망의 기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 교회는 안팎으로 거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을 이겨내는 방법은 성공, 계몽, 세련 등의 시대의 유령에서 벗어나서 오히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에 필요한 것은 중세 교회의 교활함도 아니며 현대 교회의 이성적 세련됨도 아니다. 성공한 자와 함께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네스처럼 실패한 자와 끝까지 걸어가주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비로소 시대의 유령을 축사(逐邪)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게 된다.

김기대 /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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