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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를 보면서 갖는 편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겨자를 풀로 보지 않고 나무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성경에 겨자를 나무로 표현했는데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근거로는 이런 말이 이어집니다. '공중의 새들이 둥지를 틀 정도로 커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따지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겨자를 씨앗의 하나로 간주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크기가 작은 콩 종류들은 씨앗(종류)으로 간주했고, 크기가 큰 것들은 채소(종류)로 분류했습니다. 모든 씨앗 종류들은 밭(채전)에 심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구전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길가나 자투리땅에는 영락없이 겨자가 심겨져 있거나 야생 겨자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채소나 밭작물을 구분하는 경계선에도 종종 심겨졌습니다.
겨자씨는 다른 씨들과 과학적으로나 식물학적으로나 비교를 통하여 판정된 크기가 가장 작은 씨는 아니었습니다. 겨자씨보다 더 작은 종류의 곡식이나 씨앗은 많았습니다. 유대의 들판에 자라고 있던 난초의 씨는 아주 작은 씨앗으로 겨자씨보다도 당연히 작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원 식물 중에 대표적인 작은 씨앗으로, 유대인들이 아주 작은 것을 나타낼 때 가장 흔히 언급하곤 했던 것이 겨자씨였습니다.중근동에서 겨자는 작은 것을 나타내는 데 곧잘 사용되었습니다. 고대 유대 문헌에는 동물의 핏방울을 겨자씨 크기로 묘사하는 것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관용적인 표현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쥐방울만 하다', '콩알만 하다', '깨알같다'는 식으로 작다는 것을 표현하던 것과 비슷한 언어 습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누룩처럼, 밭에 심은 씨앗처럼 알게 모르게 자라서 나중에는 눈에 확실하게 드러날 정도로 커 간다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겨자씨라는 소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자라가고 있는지를 아주 시각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아주 작은 것을 나타낼 때 우리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표현은 무엇인가요? 밤톨만 하다는 표현에서부터 깨알만하다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간이 콩알만 해졌다거나, 좁쌀만 하다는 표현이 더 일반적입니다. 크기로 따진다면 깨알 크기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다는 표현의 대명사는 콩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겨자'와 '겨자씨'는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의 콩을 연상케 합니다. 논두렁, 밭두렁에 주로 심던 콩처럼 두렁에 심겨졌고, 땅을 놀리기 싫은 이들, 그렇다고 별달리 심을 것이 없을 때도 심던 것이라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작다는 표현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것이나 가뭄에도 잘 견디는 특성 등에서도 비슷합니다. 오늘날도 봄에서 여름 시기에 갈릴리 지역을 방문하는 이들이 쉽게 이 검은 겨자를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은 물론이고 길르앗 산지 곳곳에서도 겨자꽃밭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 겨자씨를 믿음과 관련지어 설교하실 때는, '도무지 믿음을 찾아볼 길이 없다'는 강조점을 두고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이 흔해빠진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일이 될 것인데, 너희들의 믿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를 않는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일상적으로 볼 수 있었던, 그래서 가장 흔하게 다가와 있던 겨자씨.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콩알만 한 믿음만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왕성하게 자라갈 것이고, 종로 바닥에 붙어있는 껌만 한 믿음만 있어도 지금 겪고 있는 국가적인 위기와 수치를 바다에 던져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오늘은 한국을 내일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디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