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교회가 아니라 '갈릴리' 교회
'가나안' 교회가 아니라 '갈릴리' 교회
  • 성석환
  • 승인 2014.12.15 00:2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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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책임감 있는 담론을 기대하며

요즘 이른바 ‘가나안 성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교회에 꼭 나가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아니 굳이 특정 교회에 소속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고, 기성교회에 실망한 사람들이 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가도 합니다.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성도’로 읽혀져서 그 의미를 재미있게 풀고 있습니다.

주로 평신도 운동가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책을 출판했고, 앞으로 비슷한 류의 책들이 더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꽤나 잘 팔리고 주목을 받고 있어서 이런 책들에서 제기하고 있는 기성교회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는 아마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많이 끼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백만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니 이 사람들만 다시 교회로 돌아와도 한국교회가 제대로 새로워진 교회가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 석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하는 시즌입니다. 저도 몇 논문을 심사하고 있는데, 이런 류의 자료나 분석, 데이터가 많이 반영되어 있는 논문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나안 성도”들의 존재를 부각시켜 교회가 변화해야 하는 이유들을 설명합니다. “가나안 성도”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들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국교회의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아예 그런 신앙형태가 별 문제 없는 것 아니냐는 파격적 제안도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가나안 성도” 담론을 생산하는 분들이 함께 고민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딱히 새로운 주장이 아닌지라 대강 살펴본 것에 불과하지만 이런 “가나안 성도”류의 주장들이 과연 한국교회를 새롭게 할 것인지, 또 정말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많이 듭니다. 제도권 교회들이 이런 이야기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을 표피적으로 보는 것 같아서입니다.

“가나안 성도”의 존재는 기성교회의 시각에서 보면, 종교적 익명성이 다원사회에서의 새로운 존재의 양식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발생한 것은 단지 한국교회의 문제점 때문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다원적 양상이 그러한 새로운 종교의 형태를 용인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다른 각도에서, 즉 한국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나안 성도”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존재가 기성교회들의 문제를 반증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논리의 오류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안을 제시하기에는 다소 책임감이 결여된 담론입니다. “가나안 성도”가 다시 찾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런 저런 개혁적 조치를 해야 하고, 성찰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저는 애초에 “가나안 성도”의 복귀가 한국교회의 개혁과 직결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성찰과 개혁을 위해 “가나안 성도”의 담론은 그 논점을 잘못 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가나안 성도”가 아니라 “갈릴리 성도”입니다. 제도권 교회에 맞지 않고 기성 시스템에서 자신의 영적 만족을 누리지 못해서 교회 밖에 존재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은 “갈릴리의 영성”, “갈릴리 성도”입니다. “가나안 성도”의 담론은 “갈릴리 성도”의 담론으로 대체되어야 한국교회의 모순에 대한 본질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 담론은 개인적으로 볼 때 대체로 ‘복음주의적’ 관점에 기대어 있습니다. 이 담론에는 정치사회적 반성과 분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데이터나 객관적 수치에 근거하여 상황적 분석이 주로 이뤄지지만, 교회로서는 이러한 상황적 분석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현 단계에서 정당한 교회개혁은 철저히 정치사회학적 관점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갈리리 성도”가 거세되어버린 축복과 성장과 번영의 이데올로기를 직접적으로 타격해야 합니다.

이 문제를 복음주의와 연관시킨 것은, “가나안 성도” 담론이 여전히 교회와 세상, 교회 안과 밖으로 이원화시키는 구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백성”들이 어떻게 예수의 신앙운동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발견하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치적 변화에 주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성교회를 비판하지만, 자신들이 그렇게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중심적 사고를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성도”의 담론이야말로 교회가 한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해야 하며, 그들의 정치적 위치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의 담론은 교회개혁을 위한 참고자료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신학적 방향성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갈릴리 성도”의 부재, 가난하고 고통받고 억울하며 신음하던 이집트의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셨던 여호와 하나님, 당시 종교와 로마의 압제로부터 억눌려 살던 갈릴리 사람들을 자유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주체로 세우셨던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갈릴리 영성”의 회복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수 많은 모순과 힘겨운 고통들의 한 가운데 거해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월호 이후,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가나안 성도”의 담론이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라면, “갈릴리 성도”의 담론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가나안 성도”들은 어쩌면 “갈릴리 성도”의 길에 동참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파송된 “선교적 공동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비판적이고 좀 더 도덕적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예배와 교육과 교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교회 정도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가나안 성도”들의 원하는 교회가 도덕적 교회, 윤리적 교회라면 그것이 바로 제가 복음주의적 관점이라고 말하는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지점일 것입니다.

“가나안 성도”의 정당성은 단지 기성세대와 결별하여 스스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단지 교회 밖에 있다고 해서 정당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갈릴리 성도”의 삶을 살고 있는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제도와 이데올로기와 욕망과 체제로부터 해방시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성도”는 “갈릴리 성도”이어야 의미있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혹시라도 다시 체제 내로 복귀한다면 그 체제는 다시 제도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아니라 “갈릴리의 성도”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약자들과 연대하며 끝없는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선교적 공동체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가나안 성도”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읽혀지고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은 전반적으로 한국교회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읽어서 문제지 읽어서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담론을 생산해 내는 이들이 그리는 신앙공동체가 과연 어떤 것인지 때로 궁금해집니다. 바라기는, 무책임한 탁월한 분석에 기대어 교회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에 대한 본질적 인식을 흐리지 않게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나안 성도"가 "갈릴리 성도"가 되는 날을 소망합니다.

성석환 목사 / 도시 공동체 연구소 ( 이 글은 성석환 목사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로 필자의 허락을 얻어 옮겨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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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객 2014-12-15 12:00:26
진실로 정곡을 찌르는 좋은 글 읽었습니다.
이 땅에 이런 분들이 계셔서 그나마 덜 외롭고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