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
  • 박철수
  • 승인 2008.07.26 0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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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7월 10일 시국 안정을 바라면서 한국 교회 목회자 이름으로 촛불을 중단하라는 호소문이 발표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속된 대한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과 기독교사회책임(서경석 목사)이 주도한 촛불중단 호소문에 9,100명의 목사들이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숫자는 아르바이트 40명을 동원해 4만 5,000명의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것으로 사실상 호소문에 참여한 비율은 전체대상의 20%에 불과하다. 내용을 모르고 9,000명의 숫자만 보면 큰 숫자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우리 교회에도 전화가 왔다. ‘우리가 설문조사를 하는데 촛불집회를 중단하도록 교회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참해주십시오.’ 촛불집회가 거의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왜 촛불을 끄자고 뒷북치는 소리를 하고 있는가. 필자가 확인한 바로 오로지 국민일보 30페이지 하단에 조그맣게 기사화 되었고, 다행히 TV·신문 등의 매체에서 기사감도 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왜 그들은 촛불을 끄려고 하는가

과연 촛불의 의미가 무엇인데 그들은 촛불을 중단하라고 말하는가! 촛불이 더 타올라 횃불이 되어야 할 상황에서 어찌 이들은 촛불을 끄자고 말하는가! 해방 이후 역사의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 교회는 한번도 사회정의를 말해 본 적이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호소문을 보면 초기의 촛불집회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면서 광우병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추가 협상으로 미국이 최대한 양보하도록 만들었고,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고 국가 쇄신을 약속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보수적인 시국 인식을 보면서 한없이 부끄럽다. 주류 언론 매체에 뉴스 취급도 되지 않은 것도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MB 정부의 세 가지 문제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현 시국의(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 장로인 것을 생각하면서) 문제점을 몇 가지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는 경제 성장제일주의다. 경제가 성장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분배와 성장의 문제는 영원한 문제다. 어쨌든 경제 성장이 모든 정책의 최우선이라면 성경을 믿는 사람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조급증 환자처럼 그 일에 너무 매달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파이를 키운 후에 나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단순한 변명일 뿐이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꼭 잘 살게 만들겠다는 철석같은 확신에 무지한 백성들은 넘어갔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석유 파동,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국제적으로 어려운 때지만 성경을 믿는 치리자들은 반드시, 항상 분배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경의 주된 관심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 4:4) 선진국이란 단지 돈만 많은 나라가 아니라 민주적이며 정의가 서있고, 도덕적이며 거짓이 없고,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는 사회다. 클린 사회가 국제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은 상식이다.

둘째는 가난한 자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성경의 큰 주제 중 하나다. 예수님께서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5) 고 말씀하셨다. 개혁주의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의 책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출 때까지>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무조건적이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편안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신다. 그리고 교만한 자를 방해하시며 낮은 자의 편에 서시고 권리와 특권을 향유하는 것을 반대하시며 그것을 빼앗긴 자인 가난한 자를 좋아하신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한국 교회는 부자가 되어가고 있다. 부자에 관심 있는 교회가 되었다. 성경에서 멀리 떠나고 있다. 가난한 자는 교회에 다닐 수 없는 분위기다. 카이퍼는 네덜란드 기독교 대회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부딪힐 때 예수는 부유한 자 편에 서신 적이 없으며, 언제나 가난한 자의 편에 서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 대통령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않고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 나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대기업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그들만의 성찬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 이명박은 가난한 자의 편에 올곧게 서야 한다. 왜 교회가 빈부격차에 관심을 가지는가.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의 편 그 어느 편도 드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의 문제는 이와는 다르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추진하려고 한 비즈니스 프렌들리·공기업 민영화·의료보험 민영화·한미 FTA 문제다. 이명박 대통령은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려는가. 신자유주의의 일환인 한미 FTA는 사회주의 몰락이 초래한 도덕적·공적 공백 속에서 자라난 잔혹한 자본주의이다. 시장 전체주의요, 자본 전체주의다.

신자유주의는 온갖 국제조약과 협정의 이름으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금융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이익을 보장하자고 소리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대체로 고용 없는 번영,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창출하려는 비인간적 경제 원칙의 관철을 주장하며, 모든 직장을 불안과 불확실성의 터로 몰아가고 있다. 농민들·축산업자들·중소기업들은 어쩌란 말인가. 하워드 진이 말한 대로 장로 대통령은 ‘이것을 하면 누가 혜택을 받는가’, ‘세금 제도를 바꾸면 누구에게 유리한가’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셋째는 환경 문제다. 해가 갈수록 날씨가 변덕이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 환경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환경 문제는 기술 문명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보다 더 새로운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하며 판매해야 하고 이를 통해서 이익을 얻고자 한다. 새로운 것을 더 많이 생산하고자 할 때 자연 자원은 훼손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할 수밖에 없다. J.몰트만은 “환경 보호 운동이라는 소극적 대책을 넘어서 현대인과 현대 사회의 가치관이 수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생산의 발달과 인간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며 과학 기술의 진보를 주요 목적으로 삼는 사회는 이것들이 제기하는 환경 파괴를 제한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소유·소비·성장 가치 대신 다른 사람은 물론 자연과의 공생을 궁극적 가치와 의미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이명박의 대운하 사업은 자연을 보존하기는커녕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강은 그 나름대로 유구한 역사와 하나님의 섭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뱀보다 꾸불꾸불한 강의 흐름을 보면 그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경제적 이익(?)을 위해 4대 강을 비롯한 전 국토를 건설 공사장으로 만들고 인위적으로 대운하를 만든다면 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손실을 가져온다.

국민 앞에서 사과하던 날에 대운하 사업을 중단한다고 했는데 그 말 앞에 ‘국민이 원한다면’이란 단서가 붙어 조마조마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며칠 후 강만수 장관은 대운하 공사를 계속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세계를 왜 인간이 뜯어 고치려 하는가. 환경 문제의 세계적인 심각성을 이미 아는 터에 물류를 확장시키고, 운하 주위에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겠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 투기에 여념이 없는데도 대운하를 건설하겠다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을 거스르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위다.

교회는 장로가 성경적으로 정치하도록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구약에 보면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나온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촛불을 중단하라는 한국 교회 목사들은 거짓 예언자가 아닌가! 성경에 나타난 거짓 예언자는 항상 왕의 편이요, 통치자의 편이었다. 왕의 보호자였다. 예언자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위기 상황에서도 ‘괜찮다 괜찮다 하나 어디가 괜찮은가!’라고 말했다.(렘 6:4)

이와 같이 참 예언자는 왕의 실정과 위기 상황에 대해서 ‘괜찮지 않다’고 외쳤다.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란 누구인가? 성경을 보수하자는 것이지 보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성경을 보수한다면 성경을 있는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신구약 성경의 전통(예언자 전통) 예수 전통은 새 나라를 원하는 말씀 중심의 혁명적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예언자와 예수님의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회는 G. 로핑크의 말대로 사회의 ‘대조 공동체’가 됨으로써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독일 신학자들이 언젠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한 적이 있다. 한국 교회는 개인적이며 실존적 신앙과 경건주의 신앙에 몰입하다보니 사회의 현실에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무관심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주적이며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통치자는 이 점을 명심하고 하나님의 법을 이 땅에 실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장로가 대통령이 되기를 그렇게 원했다면 장로가 성경적으로 정치하도록 예언자처럼 감시하고 비판하고 채찍질해야 한다. 장로 대통령이라고 교회가 두둔하기에 앞장선다면 인간의 보편적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 큰 누를 끼치는 것이다. 부디 장로 대통령은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모든 백성들에게 칭찬(행 2:47)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박철수 목사 / 분당두레교회 담임·<복음과상황>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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