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오랜 습관 4가지
하나님의 오랜 습관 4가지
  • 백종국
  • 승인 2008.07.31 01: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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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천지만물과 억조창생을 지으시고 이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을 생각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럽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당신이 가진 절대적 권능과 우리의 왜소함을 생각할 때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기가 두려울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상식 수준에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을 거스르면서도 태연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한 공동체를 이룬 당사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느끼기도 한다. 물론 과거 수천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한번쯤은 신앙 상식 수준에서 이 주제를 다뤄보는 것도 좋다고 본다. 우선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하나님이 아닌 것들

하나님은 자판기가 아니다. 많은 헌금이나 백일기도와 같은 정성을 부어넣으면 내게 필요한 복이 쏟아진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해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이름도 기괴한 일천번제와 같은 행동이 대표적이다. 삼박자 축복이나 강청기도가 이와 같은 자판기 유형의 신앙을 만들어 내는 이론들이다.

이러한 이론들은 “그리스도의 풍요에 참여하는 특권”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성도들이 누리는 궁극적인 복은 고사하고 이 땅위에서의 복이란 것도 자신이 노력한 바에 대해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부모의 헌금과 기도로 공부하지 않은 자식이 각종 시험을 통과하고, 상식과 법을 어기면서 얻게 된 사업의 성공을 주의 이름으로 자랑하는 간증집회를 열곤 한다.

하나님은 막대기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데나 꽂아놓은 이것이 그라고 우길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다. 이 분은 역사 속에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사랑하시고 분노하시고 후회하기도 하시는 인격체이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는 참으로 과감하게도 하나님을 무슨 막대기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다수 나타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이 재림한 하나님의 아들, 감람나무 혹은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중 다른 일부는 하나님보다 강대국에 의지하는 기도회를 감히 그의 이름으로 시청 앞뜰에서 개최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일부는 하나님께 드려야할 ‘첫 열매’를 담임목사에게 드려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 하나님을 자기들이 꽂아놓은 막대기로 아는 처사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건다고 해서 다 교회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공동체라야 교회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에게만 천국의 열쇠가 주어져 있다.

살아있는 인격체로서의 하나님

참으로 외람된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다. 그가 사람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으로 비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어 생령을 만드셨기 때문에 이러한 비유도 가능하다. 마치 어떤 장인의 품성이 그가 만든 도자기에 반영되는 것과도 같다.

모든 인격체가 그러하듯이 하나님에게도 일정한 성품과 이로 인한 습관이 있다. 가장 핵심적 성품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선언하고 계신다. 예컨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은 그가 명확하게 선언한 그의 성품이다. 그리고 이 성품은 일정한 습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므로 여기에서 그의 습관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루 이틀에 나타난 것이 아니고 수 천 년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난 습관이므로 파악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습관을 알게 되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며 기쁨이지만, 그의 습관을 알고 이를 거스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더욱 복이 있다.

어떤 인격체의 습관이 한 둘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습관도 자세히 살펴보면 한 둘이 아니다.  물론 습관이므로 반드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그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드시 그러하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 품성에 그를 가두는 것이며 이는 무한하고 전능한 존재라는 인식과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습관을 어떤 특정한 일에서 나타낼지는 당신 자신의 마음이며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 여하튼 그러한 습관을 이해하면 많은 비밀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1, ‘내버려두기’

시간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잘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은 내버려두기다. 이것은 공의의 실현이며 인애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어버려둠을 당하는 인간 당사자에게는 비할 데 없는 저주이며 절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버려두기를 당하는 인간 그 당사자는 보통 희희낙락하는 참으로 모순적인 모습이 연출되곤 한다.

내어버려두기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유한성에 머물도록 방치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인간은 매우 유한하며 무능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반드시 파멸의 운명에 도달하게 되어있다. 유기적으로 살려고 섭취하는 음식물들이 그 자신의 몸에 불순물을 침전시켜 마침내 노화와 질병으로 삶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다. 안전과 복지를 위해 만든 공동체도 매개의 변증법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소외를 발생시키고 그 결과 스스로 붕괴하게 되어있다. 인간 스스로의 각성이나 깨달음으로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자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들어 올리려는 노력과도 같다. 그러므로 구원은 반드시 무한적 존재, 즉 신으로부터 온다. 그 신이 구원의 손길을 포기한 자에게 구원은 없다.

내버려두기는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자들은 가끔씩 이렇게 불평하곤 한다. 왜 이 세상에서 악한 자가 더 성공합니까? 왜 선한 자가 고통을 당합니까? 이 질문에 가끔씩 몇몇 인간들이 헛된 대답을 준비한다. 예컨대 이 세상에서도 선한 자가 더 성공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몇몇 성공사례를 들어 이 입장을 강변한다. 

이 답은 하나님의 답이 아니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은, 물론 이 지상에서 성공한 선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악한 자가 그 자신의 모순으로 스스로 파멸로 달려갈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 악한 자를 처벌하려다 선한 자들까지 더 고통을 당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악한 자는 그 악함으로 벌을 받고, 선한 자는 그 선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만일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자라면 구원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에서의 행복이라면 유한한 시간에 얽매인 유한한 물질의 다소는 그저 쓰레기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2, ‘강퍅하게 만들기’

하나님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하는 자에게 스스로 더욱 강퍅하게 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물론 이러한 자도 겸손하게 될 수 있다. 마치 강대한 앗시리아의 왕이 한낱 허접한 식민지인인 요나의 경고를 듣고 회개한 것처럼….

그러나 보통은 강한 경고를 듣고도 겸손해지지 않는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열 가지 재앙이 내려졌다. 물론 이 열 가지 재앙을 자연 재해로 해석할 수 있다. 자연 재해로 해석한다고 해도 그 만큼 국력이 피폐해졌다는 점은 통치자로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고 국력을 회복할 때까지 한숨을 돌리는 기회를 갖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남은 군대를 이끌고 히브리 민족을 다시 노예로 삼기 위해 추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전멸하였다. 

이 강퍅한 자들은 멸망의 날이 코앞에 다가오더라도 결코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지 않는다.  도리어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자의 뺨을 치며 “하나님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고 꾸짖곤 한다. 설교 중에 교회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의 실명을 들고 천국에 가보니 생명책에 이들의 이름이 없더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에게 역사하는 영은 거짓 영임이 분명하지만, 이들은 누가 강요해서라기보다 이 거짓 영의 역사를 즐기고 이로서 자신을 더욱 강퍅하게 만드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강퍅하게 만들기는 스스로 교만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사탄의 수단으로 성공한 자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벌이다. 이 책벌의 과정은 우리 인간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은 보통 지금까지의 성공을 자신의 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경고하는 자를 벌하거나 멀리하고 아첨하는 자를 더욱 가까이 한다. 자신이 듣기 좋은 말은 진실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점점 교만은 심해지고 착각도 심해진다.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는 눈이 사라지고, 개인 혹은 집단의 히스테리와 이데올로기가 그들을 사로잡는다.  

실패나 실수가 발생하면 도리어 자신들의 교만과 편집과 편견의 강도가 덜 강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극우적이거나 극좌적인 주장을 남발하다 선거에서 실패하면 자신이 잘못 생각해서 그렇게 되었다기보다 선거구민들이 어리석어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리하여 더욱 더 강한 이데올로기와 선전술로 자신을 무장하려든다. 그리고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의 파멸에 도달하고 만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3, ‘사랑하는 자를 채찍질하기’

하나님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사랑하는 자를 채찍질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를 아끼는 것이 모든 인격체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시되 조금 더 교훈을 첨가하여 갚으신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가 이 교훈을 매번 뼈 속에 깊이 새기고 마침내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정금같이 나타나도록 만드신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다윗을 들 수 있다. 그는 많은 아내가 있었지만 또 다른 여자에게 욕정을 품었다. 자기 딴에는 은밀하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그를 살해했으나 그 결과는 실로 무참하였다. 먼저 우리야의 아내에서 난 아들이 죽었다. 또 그의 큰 아들 암논이 그의 딸 다말을 범하였다가 그녀의 오빠 압살롬에게 살해당했다.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도저히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남의 여인 하나를 범하였으나 그의 아들 압살롬은 반란의 와중에 그의 후궁 전부를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범하였다. 참으로 비참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마도 다윗 다음으로 사랑하는 야곱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야곱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의 것이 되었을, 장자권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속였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배신과 속임의 연속이었다. 우선 그의 삼촌 라반이 품삯을 열 번이나 속였으며,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드라빔으로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의 열 아들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목숨으로 두 번 그를 속였으며, 마침내는 그 요셉에게 조차 속임을 당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매번 그의 혈족에게서 속임을 당할 때 마다 아마도 야곱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한 일을 후회하였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만이 이 숙명의 고리에서 그를 풀려나게 하리라 믿었고, 이것이 바로 얍복강의 사투가 발생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오랜 습관을 무시하고 싸구려 용서와 은혜를 남발하는 자들이 더러 있다.  이들은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에게 기계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마치 더러운 때를 씻는 세탁기처럼, 그들이 원하는 때 그들의 동전 몇 푼을 넣으면 그들이 원하는 잘못만을 “양털처럼 희게” 씻어 준다고 속이고 있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가 범한 그 죄로 인해 그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는 궁극적이고도 비교할 데가 없는 용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자들일수록 더욱 강하게 훈계를 하신다. 잘못을 행하고도 하나님의 강력한 훈계를 얻지 못하는 자는 불행하다. 이미 내어버려둠을 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오랜 습관 4, ‘낮은 자를 높이 들어 쓰시기’

하나님은 인간들이 천하다고 여기는 자를 높이 들어 쓰시기를 좋아하신다. 물론 꼭 필요하시면 매우 교육을 잘 받은 자들도 쓰시곤 한다. 모세나 바울처럼 당 시대에 가장 뛰어난 교육을 받은 자들이 복음적 저술을 담당하기 위해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체로 그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고 불쌍한 자들을 활용하신다. 예수의 제자들이 가장 대표적이 사례이다. 어부, 세리, 무직자들, 무식자들, 그 출신도 수상한 자들이 제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하시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의 인애 때문이다. 인애란 약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녀 중에서 가장 힘들게 사는 자녀 혹은 장애를 가진 자녀에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지는 모습과 유사하다. 물론 이미 잘 성장하여 좋은 직장을 잡아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들도 사랑하고 그들이 잘 커준 것에 대해 부모들은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녀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은 남다르기 마련이다. 이는 마치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뒷모습과도 같다.

하나님이 낮은 자들을 높이 들어 쓰시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그래도 겸손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터무니없는 교만은 역사를 통해 잘 나타나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나 진시황의 교만은 그래도 남들이 보기에 이유라도 있지만, 소소한 범인들이 약간의 지위나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교만을 떠는 광경은 참으로 가소롭기 그지없다. 이들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사회적 패자나 약자의 변명이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 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점은 자명하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지식과 지위와 재물로 교만하게 된 자들은 자갈로 가득 찬 물통과 같다. 이러한 물통으로는 저 광야를 횡단하기에 필요한 물을 채울 수 없다. 비록 작거나 볼품이 없더라도 어떻든 안이 비어있는 물통이라야 생명수를 가득 채울 수 있다. 물론 모든 낮은 자들이 다 겸손한 것은 아니다. 낮은 자들 중에서 도리어 독한 마음과 증오와 편견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더러 발견되고 있다. 그러므로 높은 자든 낮은 자든 겸손한 자 혹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대체로 낮은 곳에 처한 자들이 더욱 겸손하다.

겸손한 자의 궁극적 사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본질상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성부 하나님의 성품과 습관이 바로 그 자신의 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리고 자신을 비워 그 인간들과 만물들의 종이 되셨다. 예컨대, 고귀한 인간이 그가 사랑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대상인 바퀴벌레가 되었다! 이 이상의 겸손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따라 비록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과 훌륭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은 그에게 채워줄 것을 아직도 많이 가지고 계시며, 사람들은 그의 그릇 안에 채워진 것들로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늘에서의 복뿐만 아니라 땅에서의 복도 마음껏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백종국 / 경상대학교 교수
 
 * 이 기사는 LA 기윤실 소식지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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