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강사 이용규 선교사의 영성
코스타 강사 이용규 선교사의 영성
  • 정이철
  • 승인 2014.10.21 02:19
  • 댓글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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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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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보자 2014-10-23 02:24:48
다시 정확히 말씀 드리죠. 복음은 신비이고 능력이다. 하지만 신비 자체가 복음은 아니고 능력이 나타났다고 복음이 증거된 것은 아니다. 즉 거꾸로 하지 말자는 겁니다. 신비나 능력 우선시 하지 말자는 얘깁니다. 어디까지나 최우선은 복음이죠. 그리고 복음은 성경입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신비나 능력을 구하면서 복음은 은연중에 뒷전으로 밀어놓고 있다는 겁니다. 저는 신비나 능력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복음 안에서 신비요 복음안에서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관점에 문제가 있나요?

바로보자 2014-10-23 02:10:54
"지나다가"님 저의 댓글을 바로 읽고 글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복음은 신비가 아니다 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복음은 신비지만 신비 자체가 복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능력이지만 능력이 나타났다고 그 능력을 보고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댓글을 충분히 읽고 본인의 논조를 펴면 서로의 오해나 논쟁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간혹 댓글을 읽다보면 자기 주장하기에 바빠서 다른 사람 글은 주마간산 격으로 넘겨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댓글로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니까요. 맞죠?

지나가다가 2 2014-10-23 00:35:46
"복음은 신비가 아니라, 능력이다, 하지만, 능력이 복음은 아니다"라고 하시는 분이 아래에 계셔서 조금 더 저의 의견을 보탭니다. 복음이 신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부, 성자, 성령… 인간의 언어와 경험으로 온전하게 설명이 됩니까? 이것을 신비라고 말할 때는 우리 인간의 언어나, 경험안에서 모두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언어나 경험안에서 모두 설명할려는 순간, 신앙이라는 것은 공식이 되고말지요. 그래서, 신학의 본질은 공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배요, 예배요, 기도요, 무릎꿇음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경험을 해석하는 최종적인 해석의 틀이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문제는 그 성경이라는 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써, 신비도 죽이고, 감탄도 죽이고, 경험의 다양성도 죽이는.. 그런 방식은 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거를 이야기 하고 싶어요.
지금은 특별히 개혁신학에서 오히려 성서적이면서 신학적인 신비가 어떤 것인지 많은 신학의 작업이 필요한 시대 입니다. 칼빈이나 죠나단에드워즈 같은 신학자들도 자신들의 시대에 그런 작업을 했지요. 복음을 왜곡하는 세력에 맞서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험의 다양성이 폭발하는 이 포스터 마던 시대에 이거 아니면 다 가짜다 하는 식의 진리 수호라면, 전도도 선교도 안됩니다. 특히 이미지가 폭발하는 이 시대에는 이미지가 일상을 신비롭게 대하는 촉매제가 되는시대 입니다. 그래서, 딱딱한 공식보다도 직관적이면서 경험적인 통로로 신비를 대하고 싶어하는 시대 이기도하지요. 물론 이단들은 조심하고, 분별해야 되지만, 동시에 기독교라는 신비를 이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이 시대의 방식안에서 복음을 연결해 주는 그런 작업들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나가다가 2 2014-10-22 23:52:54
"복음은 신비가 아니라, 능력이다"라고 하시는 분이 아래에 계셔서 조금 더 저의 의견을 보탭니다. 복음이 능력이 되는게 신비가 아닌가요? 창조,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재림.. 이게 다 신비가 아니고 뭡니까? 삼위일체가 신비 그 자체 아닙니까?
특별히 성경중심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신비라는 단어에 굉장히 꺼리낌이 있는데요, 이것을 신비라고 말할때는 우리 인간의 언어나, 경험안에서 모두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언어나 경험안에서 모두 설명할려는 순간, 신앙이라는 것은 공식이 되고말지요. 그래서, 신학의 본질은 공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배요, 예배요, 기도요, 무릎꿇음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경험을 해석하는 최종적인 해석의 틀이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문제는 그 성경이라는 것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써, 신비도 죽이고, 감탄도 죽이고, 경험의 다양성도 죽이는.. 그래서, 마치 누군가를 빨갱이 만드는 그런 우격다짐의 방식은 이 시대에 맞지 않다는 거를 이야기 하고 싶어요.
지금은 개혁신학에서 오히려 성서적이면서 신학적인 신비가 어떤 것인지 많은 신학의 작업이 필요한 시대 입니다. 칼빈이나 죠나단에드워즈 같은 신학자들도 그런 작업을 했지요. 경험의 다양성이 폭발하는 이 포스터 마던 시대에 이거 아니면 다 가짜다 하는 식의 진리 수호라면, 전도도 선교도 안됩니다. 특히 이미지가 폭발하는 이 시대에는 이미지가 일상을 신비롭게 대하는 촉매제가 되는시대 입니다. 그래서, 딱딱한 공식보다도 직관적이면서 경험적인 통로로 신비를 대하고 싶어하는 시대 이기도하지요. 물론 이단들은 조심하고, 분별해야 되지만, 동시에 기독교라는 신비를 이 시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이 시대의 방식안에서 복음을 연결해 주는 그런 작업들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바로보자 2014-10-22 18:03:08
어떤 분은 믿은 대로 나타나고 믿은 대로 누리게 된다고 하는데 정말 큰일날 믿음입니다. 자기 믿은 대로 나타나고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대로 믿어야 하고 성경대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 믿음과 상관없이 성경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