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껏 뛰어가면 저 담을 넘을 수 있을까"
"힘껏 뛰어가면 저 담을 넘을 수 있을까"
  • 박지호
  • 승인 2008.05.30 14: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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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로 17년째 복역 중인 어느 한인 재소자의 가정과 삶

   
 
  ▲ 이호영(가명) 씨가 17년째 수감되어 있는 '그린헤븐교도소'.  
 
"피고 이호영(35, 가명). 살인 혐의가 인정되어 종신형에 처함." 이 씨는 1991년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뉴욕 주 스톰빌이란 지역에 있는 ‘그린헤븐교도소’에 17년째 수감 중이다.

이 씨는 1990년에 미국에 건너왔다.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어린 시절부터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기에 미국에 있는 친척들이 이 씨의 장래를 위해 미국행을 부추겼다. 이 씨의 아버지는 직장을 정리했고 한국의 집도 처분했다. 이 씨의 교육을 위해 온 가족이 한국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온 셈이다. 

이 씨의 부모는 학군이 좋다는 뉴욕 롱아일랜드 유태인 지역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 씨를 이름난 사립 명문고에 입학시켰다. 이 씨는 빠르게 적응했고, 미국에서도 공부를 곧잘 했다. 아버지는 작은 주류 소매상을 운영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갔지만 미국에서도 두각을 보이는 이 씨를 보면서 시름을 잊었다.

그런데 미국 온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일이 벌어졌다. 이 씨가 같은 나이 한인 남학생을 칼로 살해한 것이다. 당시 고등학생인 이 씨가 피해자의 손에 수갑까지 채우고 칼로 온 몸을 찔러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은 지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아연실색했다. 체격도 작고 얌전한 동양인 아이가 자기보다 덩치도 큰 동년배 남학생을 칼로 무참히 살해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피해자가 갱에 연루된 아이라는 것 때문에 이 씨가 상대 갱단의 사주를 받아 살해를 저질렀지만 가족들의 신변을 위협해 입을 열지 못했다는 추측도 나왔다. 또 피해자가 평소에 공기총 등으로 위협하며 이 씨를 자주 괴롭혔다는 이 씨의 어머니의 말로 미루어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이 씨가 돌발적으로 감정이 고조되어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

백인들의 입김이 드센 동네에서 동양인 아이가 잔인한 사고를 저질렀으니 지역 여론도 악화됐다. 피해자의 부모는 이 씨를 극형에 처할 것을 법정에 요구하며 돈을 들여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재판정에 방청객을 동원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은퇴를 앞둔 백인 판사가 마지막 재판을 명예롭게 끝내고 싶다며 자신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형을 언도하겠다고 공언했고, 이 씨는 결국 종신형을 언도 받았다.

   
 
  ▲ 인종적 소수민족인 한인들은 교도소 내에서도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출처 : <프리즌 브레이크>의 한 장면)  
 
풍비박산 난 아메리칸 드림

난데없이 살인자 가족이 되어버린 이 씨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한 번 죄를 지으면 그토록 냉정한 것이 세상이다. 이 씨의 가족들은 주변의 얼음장 같은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고, 피해자 부모들과 지역 주민들의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 사건 이후 이 씨의 어머니는 극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몸을 추스르지 못한 채 누워 있다가 암으로 4년 뒤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영어가 좀 된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동생을 변호하던 이 씨의 친형은 당시의 충격으로 말문을 닫아버렸고 대인 기피증에 빠져 수년째 지하실에 틀어박혀 지냈다. 속수무책으로 늘어가는 변호사 비용에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가게마저 처분해야 했다. 이 씨의 아버지는 소일거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유구무언이 따로 없다. 생활고에 지쳐 이 씨의 면회조차 제대로 올 수 없는 형편이지만 어렵사리 면회를 와도 나눌 얘기가 없다. 서로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다가 헤어지곤 했다. 출소의 날을 손꼽으며 건강을 기원할 수도, 가족들의 소식을 물으며 안부를 전할 수도 없는 현실 때문이다.

수년 전인가보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형이 오랜만에 동생을 찾았다. 그날따라 갈매기 무리가 교도소 담장 안팎을 넘나들고 있었다. 두 형제가 교도소 앞마당을 말없이 거닐고 있을 때였다. 이 씨 형이 오랜만에 입을 열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호영아, 저 새들은 참 좋겠다. 저 높은 담을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잖니."
"…"
"우리가 힘껏 뛰어가면 저 담을 넘을 수 있을까."

   
 
  ▲ 이 씨를 면회하는 날에도 교도소 담장에는 갈매기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절망…수시로 손 씻는 버릇 생겨

수감 생활 초기, 이 씨는 좁은 감방에서 향방 없이 반복되는 숨 막히는 생활을 견디기 힘들었다. 평생 외부와 단절된 채 지내야 한다는 사실도 점점 더 무섭게 다가와 이 씨를 짓눌렀다. 그렇게 깊은 절망에서 몸부림칠 때 교도소를 방문하며 재소자들을 만나며 위로하는 사역을 하고 있던 이상숙 전도사(Youth & Family Focus 대표)를 수감된 그 해 만나게 됐다.  

이 씨는 이 전도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됐고, 이 씨의 마음속에 복음의 씨앗이 심겼다. 이후 이 씨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평소 좋아하던 운동도 다시 시작했고 다른 재소자들과 대인관계도 원만하게 맺어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 첫 1년 동안은 성경 전체를 두 번이나 쓸 정도로 성경에 깊이 천착했다. 

과거로 인해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학하던 일상의 고리를 끊고 시선을 이웃 재소자들에게 돌렸다. 그 속에서도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씨는 늦은 나이에 교도소에 들어와 영어를 못하는 한인 재소자들의 입이 되어주었고, 갓 들어온 신입 재소자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으며, 이감되어 텃새에 시달리는 나이 어린 재소자들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수감 생활 10년차를 넘어가면서 이 씨에게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자신의 처지를 잊고 지내다가도 여전히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종신형이란 사슬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지기를 거듭했다. 이후 한동안은 사람도 만나지 않고 그렇게 좋아하던 운동도 끊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 때부터 수시로 손을 씻는 버릇이 생겼는데,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강박감의 표현이라고 주변 사람은 해석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만나고, 운동도 시작했다. 요즘은 추리소설이나 성경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한국 영화 <괴물>을 재밌게 봤고, 한국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원더걸스’라는 그룹의 노래를 즐겨 듣곤 한다. 사소한 일상을 즐기면서 다시 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는 이 씨는 "한국에 놀러 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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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es 2014-06-03 07:35:53
그 당시 1990년,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롱아일랜드 거주하는 많은 교포들과 이웃들이 피해자와 피의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의 가족들에게 많은 배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들 슬퍼하면서 많은 교회 목사들과 청소년 전도 사역하시던 많은 분들이 도와 주시며 내일 같이 돌 보아 주셨다. 특히 피의자 가족들의 이웃들은 거의 매일 찾아와 위로하고 같이 가정에배 드리며 신앙이 없다면 볼수 없는 은혜였다. 비난과멸시는 커녕, 같이 슬퍼하며 그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다. 어린 나이에 구속 되었으나 이틀에 한번씩 찾아 주는 교인들과가족들, 그리고 목사님들 덕분으로 그나마 시간을 보내고 2 번에 걸친 성경 필독으로 한때 교인들도 성경쓰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기사의 대부분이 사실과 너무 대조적이라 어이가 없다. 전체적으로 그저 짜 맞추듯이 하여 분명 취재라기 보다는 이상숙씨 말로 그냥 받아 적으며 박지호씨가 본인의 짤막한 소견으로 살을 부친것 같다. 기자 역시 상투적인, 소위 말하는 어메리칸 드림과 이민의 단면을 상대적으로 인용한 것을 보아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고 미국 사정을 잘 모르는 무뇌한 같다.
그 때 그 분들 다들 뉴욕에 게속 사신다.
그 이웃들 중에는 지금 목회도 하시고 봉사단체도 운영하며 신학교 교수로도 재적 하시고 또는 선교사로 여태 봉사 하시고 계신다.
이 분들 중에는 피해자 가정과 안면이 있던 분들이 대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가정에 이런 사랑에 손낄을 보낸 것은 신앙과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 일 것이다. 두 가정의 화해와 중재도 의뢰하고 순복음 김목사 와 신부님들과 상담도 했다. 피해자가 갱에 연루 되었다라든가 문재아 라든가 라는 터무니 없는 소문을 20 년이 지난 지금 말하는 자가 재대로 된 동역자 인가? 90 년대초 경재 불황으로 가게 정리 한것이 망한 것인지, 재판 수 년후에 알게 된 사람이 알 턱이 없겠지만서도. 피의자의 가족이 신앙생활의 회의와 어머니 병간호로 피로감을 느끼며 출석을 원하는 교회 사람들을 회피 한것이 대인 기피증인지 알수 없다.

이한탁씨 출소 된다는 기사로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참으로 오래된 일이면서도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 9-11 과 버지니아 택 사건 전에 한참 전에 일이다. 그 당시 순복음 교회에서 보석금 대리납부를 반대해서 재판 기간이라도 가족과 보내지 못하게 되서 분 해 하던 생각도 난다. 그 때 뉴욕에 살던 분이라면 그 변호사에 자격미달과 잘못된 변호 특히 그 딸의 자살하려다 방화 되었다고 변호한 것으로 유죄 판결로 받아 의야해 했고, 오히려 교회가 져어야 할 화재를 본인이 방화로 뒤집어 썼으니,특히 사건 담당이 아니라도 무죄라는 것을 다 알 수 있는 상식이 벗어나는 사건으로 구속 되었으니 그 울분은 다 어떻게 한다 . 지금이라도 석방 된다니 감개무량 하다.
미국법이 그렇다. 아무리 열 명 에 범법자을 놓처도 한명에 무고한 자를 죄 지울수 없다는 들어보면 대단이 현명한 것 같은 논리로,그 때문에 정식 재판 후 형이 집행되는 피고는 누구를 망논하고 풀려나기 어렵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는 법 앞에 속수 무책이다. 한국 같이 특별 사면이란 좀처럼 없다.
뉴욕에서는 또한 14세 이상은 형사법상 어른이다. 이한탁씨 같이 결국 무죄되는 경우는 생기면 60 분프로그램 방송감이다.
그러나 미국 매채는 조용하다. 뿐만 아니라 이 전자 신문사 또한 취재하는 게 없다.
이것이 또한 한국 이민자들이 겪는 대부분에 상황 일 것이다.






그 당시 1990년,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롱아일랜드 거주하는 많은 교포들과 이웃들이 피해자와 피의자를 위해 기도하면서 그의 가족들에게 많은 배려와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들 슬퍼하면서 많은 교회 목사들과 청소년 전도 사역하시던 많은 분들이 도와 주시며 내일 같이 돌 보아 주셨다. 특히 피의자 가족들의 이웃들은 거의 매일 찾아와 위로하고 같이 가정에배 드리며 신앙이 없다면 볼수 없는 은혜였다. 비난과멸시는 커녕, 같이 슬퍼하며 그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했다. 어린 나이에 구속 되었으나 이틀에 한번씩 찾아 주는 교인들과가족들, 그리고 목사님들 덕분으로 그나마 시간을 보내고 2 번에 걸친 성경 필독으로 한때 교인들도 성경쓰기를 시작하기도 했다.
기사의 대부분이 사실과 너무 대조적이라 어이가 없다. 전체적으로 그저 짜 맞추듯이 하여 분명 취재라기 보다는 이상숙씨 말로 그냥 받아 적으며 박지호씨가 본인의 짤막한 소견으로 살을 부친것 같다. 기자 역시 상투적인, 소위 말하는 어메리칸 드림과 이민의 단면을 상대적으로 인용한 것을 보아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고 미국 사정을 잘 모르는 무뇌한 같다.
그 때 그 분들 다들 뉴욕에 게속 사신다.
그 이웃들 중에는 지금 목회도 하시고 봉사단체도 운영하며 신학교 교수로도 재적 하시고 또는 선교사로 여태 봉사 하시고 계신다.
이 분들 중에는 피해자 가정과 안면이 있던 분들이 대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의자 가정에 이런 사랑에 손낄을 보낸 것은 신앙과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의식 일 것이다. 두 가정의 화해와 중재도 의뢰하고 순복음 김목사 와 신부님들과 상담도 했다. 피해자가 갱에 연루 되었다라든가 문재아 라든가 라는 터무니 없는 소문을 20 년이 지난 지금 말하는 자가 재대로 된 동역자 인가? 90 년대초 경재 불황으로 가게 정리 한것이 망한 것인지, 재판 수 년후에 알게 된 사람이 알 턱이 없겠지만서도. 피의자의 가족이 신앙생활의 회의와 어머니 병간호로 피로감을 느끼며 출석을 원하는 교회 사람들을 회피 한것이 대인 기피증인지 알수 없다.

이한탁씨 출소 된다는 기사로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참으로 오래된 일이면서도 어제 일같이 생생하다. 9-11 과 버지니아 택 사건 전에 한참 전에 일이다. 그 당시 순복음 교회에서 보석금 대리납부를 반대해서 재판 기간이라도 가족과 보내지 못하게 되서 분 해 하던 생각도 난다. 그 때 뉴욕에 살던 분이라면 그 변호사에 자격미달과 잘못된 변호 특히 그 딸의 자살하려다 방화 되었다고 변호한 것으로 유죄 판결로 받아 의야해 했고, 오히려 교회가 져어야 할 화재를 본인이 방화로 뒤집어 썼으니,특히 사건 담당이 아니라도 무죄라는 것을 다 알 수 있는 상식이 벗어나는 사건으로 구속 되었으니 그 울분은 다 어떻게 한다 . 지금이라도 석방 된다니 감개무량 하다.
미국법이 그렇다. 아무리 열 명 에 범법자을 놓처도 한명에 무고한 자를 죄 지울수 없다는 들어보면 대단이 현명한 것 같은 논리로,그 때문에 정식 재판 후 형이 집행되는 피고는 누구를 망논하고 풀려나기 어렵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는 법 앞에 속수 무책이다. 한국 같이 특별 사면이란 좀처럼 없다.
뉴욕에서는 또한 14세 이상은 형사법상 어른이다. 이한탁씨 같이 결국 무죄되는 경우는 생기면 60 분프로그램 방송감이다.
그러나 미국 매채는 조용하다. 뿐만 아니라 이 전자 신문사 또한 취재하는 게 없다.
이것이 또한 한국 이민자들이 겪는 대부분에 상황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