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에 박제된 '평화의 추장'
전쟁기념관에 박제된 '평화의 추장'
  • 박지호
  • 승인 2011.04.18 14:33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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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학살 현장을 가다(2) 와시타리버, 전투냐 학살이냐

   
 
  ▲ '평화의 추장'으로 불리는 검은주전자. (출처 :위키피디아)  
 
"부당한 일을 수없이 당했지만 그래도 나는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있다. 나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 우리는 다시 화친을 맺으려 하고 있다. 나는 친구들의 충고를 따르기는 하겠지만 치욕스러운 심정은 이 땅을 덮고도 남는다. 한때 나는 끝까지 백인의 친구로 남은 유일한 인디언이라고 자부했지만 백인들이 몰려와 우리 처소를 뒤엎고 말과 모든 재산을 빼앗아갔으니 이제는 더 이상 백인의 말을 믿기 어렵게 되었다." (검은주전자,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중에서)

총 340마일(547킬로미터) 남짓, 샌드크릭(Sand creek)(관련 기사 바로가기)에서 오클라호마에 있는 와시타리버(Washita River) 학살 현장까지 차로 꼬박 6시간 넘게 달려야 하는 거리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니 8시간은 족히 걸렸다. 와시타리버는 샌드크릭, 운디드니(Wounded knee)와 함께 인디언 3대 학살 현장 중 하나다.

샌드크릭 학살과 와시타 학살의 피해자가 모두 검은주전자가 추장으로 있던 남부 샤이엔족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한 부족이 두 번이나 살육을 당한 셈이다.

3월 25일, 하루를 꼬박 달려, 현장 근처까지 왔지만 이미 밤이 깊어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3월 말인데도 밤이 되니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나이든 추장이 성치 않은 부족민들을 이끌고 어떻게 이곳까지 쫓겨 왔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와시타 학살 현장은 비교적 찾기 쉬웠다. 사적지 입구까지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는 학살이 아닌, 전쟁 사적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와시타 전쟁터 국립 사적지(Washita Battlefield National Historic Site).' 말끔한 기념관이 풍광 좋은 언덕에서 학살 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와시타 전쟁터 국립 사적지. ⓒ 미주뉴스앤조이  
 
'학살'과 '전투'는 차원이 다르다. 학살은 "민간인 등 무고한 사람들을 가혹하게 마구 죽이는 행위"를 말한다. 학살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뚜렷하다. 하지만 전쟁 혹은 전투는 "교전 단체 사이의 두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장하여 싸우는 것"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중립적인 냄새가 강하다.

그래서일까. 오두막 같은 샌드크릭 학살 기념관과 건물 규모부터 달랐다. 영화 상영관에 소규모 전시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전시실에는 관람객을 위해 자세한 안내문도 준비되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와시타 학살의 원인이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 때문이라고 적혀 있었다.  

   
 
  ▲ 전시실에 진열된 제7기병대 군인들이 입었던 군복과 사용했던 총. ⓒ 미주뉴스앤조이  
 
"1850년부터 1860년대까지, 4개의 조약을 샤이엔과 아라파호 부족과 맺었다. 정부는 부족들을 백인들이 자주 다니는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지도록 하려고 했다. 하지만 평화 조약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했다. 문화적 차이가 근본 원인이다. 예를 들어, 인디언에게 통역을 해주는 과정에서 오역이 되어서 잘못 전달되기도 했다. 또 부족 추장들이 조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 몇몇 추장들만 조약에 서명했다. 정부가 조약을 완전히 체결하지 못했고, 약속한 식량과 물품을 제공하는데 실패해서 인디언들의 의심을 유발시켰다."

안내문만 보자면,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지만, "조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추장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갈등이 촉발된 것처럼 보인다.

전시실 안내문에서 검은주전자는 "평화의 추장"으로 소개되어 있었다. 1861년부터 1867년까지 그가 서명한 평화조약만 3개나 되니,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추장'이 죽어야 했던 이유와 3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살육을 저질렀던 미군의 잔혹함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어 있었다. 검은주전자를 소개하는 문구가 차라리 정중한 조롱에 가깝게 여겨진 이유다. 

조약을 체결했지만 "그가(검은주전자) 모든 샤이엔 부족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일부 젊은 전사들이 보호구역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항했기 때문이란 언급도 했으니, 와시타 학살의 책임이 샤이엔족의 철없는 젊은이들과 조약을 성실하게 알리지 않은 무능한 추장에게 있었던 셈이다.

학살에 대한 성찰과 반성보다는 인디언 전쟁의 승리를 기념한다는 느낌이 강해서였을까, 현장을 돌아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와시타 학살 사건은 전쟁이 아닌, 인디언 소탕 작전이었고, 그 결과는 학살로 이어졌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 나오는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봤다.

   
 
  ▲ 북미주 전역에서 강제 이주당한 인디언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지도. (출처 : 와시타리버 전쟁터 사적지)  
 

'또 다시 샌드크릭 사건이 재현되면 안 되는데"

꼭 4년이 흘렀다. 샌드크릭 학살의 처참한 비극이 아직도 늙은 추장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었다. 남부 샤이엔족의 추장 중 한 명인 검은주전자는 샌드크릭 학살 때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그때 중상을 입은 아내의 몸은 여전히 불편하다. 시체들 틈에 끼어 있다 구사일생으로 도망친 부족 주민들은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걷고 또 걸었다. 검은주전자는 간신히 목숨을 건진 부족민들을 데리고 떠돌다 4년 만에 앤털롭 언덕 동쪽 40마일의 와시타 강가에 마을을 이루게 된 것이다.

샌드크릭 학살 뒤 1년 만인 1865년, 검은주전자는 미국 정부의 협박에 가까운 강요에 못 이겨, 부족의 오랜 사냥터인 콜로라도령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젊은 전사들은 비겁한 늙은 추장이라며 손가락질했지만, 검은주전자는 부족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못할 일이 없었다. "영구한 평화"를 주겠다는 미국 정부의 약속을 그는 또 다시 믿었던 것이다. 당시 조약의 내용 중 일부다.

"이 문제에 관해 인디언들은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 이후로부터 다음 경계 지역과 그 지역 안에 있는 모든 소유권과 권리를 포기한다 … 인디언들이 본래 소유해왔다고 주장하고 그에 관한 소유권을 전혀 포기하지 않았던 전 지역이다." (조약의 2조 중)

"샌드크릭 학살의 진정한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라며 디 브라운(<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의 저자)은 이 순간을 주목했다. 보호 명목으로 인디언들을 구슬렸지만 결국 기름진 땅과 황금에 눈먼 백인들이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검은주전자에게 선택의 여지 같은 것은 없었다. 치욕적인 요구를 또 다시 받아들이고 아칸소 강 남쪽인 와시타강까지 내몰린 것이다.

   
 
  ▲ 샌드크릭과 달리 기념관에는 당시 상황과 지형을 동시에 살펴 볼 수 있도록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었다. ⓒ 미주뉴스앤조이  
 

이제 막 평화를 맛보나 싶었다. 하지만 1968년 11월 초, 미군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번졌다. 도대체 몇 번을 더 도망쳐야 하는 걸까. 샌드크릭 학살 이후, 주변 인디언 부족들은 "살인마 백인에 대한 보복 전쟁을 소리 높여 외쳤고" 백인들에 대한 인디언들의 보복 공격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이 때문에 미군도 명분을 얻고 공격의 고삐를 바짝 조인 것이다.

고민할 새도 없었다. 검은주전자는 미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근처 인디언주재소까지 달려갔다. 그곳에 주민들을 옮길 테니 보호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미군 장군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 검은주전자 마을에 미군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묘사해놓은 그림. (출처 : 와시타리버 전쟁터 사적지)  
 
'아, 또 다시 샌드크릭 사건이 재현되면 안 되는데.' 1868년 11월 27일, 검은주전자는 곧 미군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다른 추장들과 밤늦게까지 머리를 맞댔다. 새벽 일찍 일어나 천막을 나선 검은주전자는 와시타 강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아직도 맞은편 산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미군이 올 때를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먼저 대표를 보내 화평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이 그치면 미군을 만나러 떠날 참이었다. 바로 그때 한 여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미군들, 미군들이 쳐들어온다."

"검은주전자는 또 다시 샌드크릭 사건이 재현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을 깨워 도피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하늘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에 올라타고 도망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검은주전자는 와시타강 여울목으로 가려했다. 미군이 강의 여울목을 건너 공격해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상을 뒤엎고 네 군데 방향에서 안개를 뚫고 돌진해 들어왔다. 혼자서 어떻게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미군을 맞아 화친을 맺을 것인가.

또 다시 샌드크릭 사건이 재연되고 있었다. 늙은 추장은 어쩔 수 없이 아내를 말에 태우고 채찍을 가했다. 그들은 샌드크릭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똑같은 악몽을 되풀이하며 비명소리 같은 탄환 사이를 뚫고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검은주전자 부부가 강 여울목에 달려갔을 때 기병대가 길을 막았다. 검은주전자는 적의가 없음을 보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때 탄환 한 발이 검은주전자의 가슴을 불처럼 파고들었다. 늙은 추장은 강가에 쌓인 눈 더미에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276~277페이지)

   
 
  ▲ 학살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검은주전자와 커스터 장군의 얼굴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 미주뉴스앤조이  
 
세리던 장군의 명령으로 출동한 "커스터 부대가 검은 주전자의 마을을 짓밟는 데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커스터 부대가 받은 명령은 단순했다. "남쪽으로 앤털롭 언덕을 거쳐 적대적인 인디언의 겨울철 거류지로 추정되는 와시타 강 쪽으로 나가 마을을 불태우고 말을 없애 버릴 것이며 전사들을 모두 죽이거나 목매달고 부녀자와 아이들은 생포해오라는 것이었다."

"기병대는 마구간에 있는 말 몇 백 마리까지 남김없이 쏘아 죽였다. 인디언 전사들만 골라 쏘아 죽이는 것은 번거롭고 위험스런 일이었다. 어느 세월에 늙은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애들을 가려내고 전사들만 골라 쏘아 죽인단 말인가. 그건 너무 비능률적이고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날 제7기병대가 학살한 샤이엔족은 모두 103명이었는데, 그중 전사는 11명밖에 안 되었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277페이지)

   
 
  ▲ 와시타 학살 사건 이후 생존자들을 생포해 끌고 가는 모습의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학살을 지시했던 세리던 장군은 인디언들의 머리가죽을 흔들며 복귀하던 커스터의 부대를 "능률적이고 용감한 작전을 수행했다"고 치하했다. 이후 세리던 장군은 "하잘 데 없이 늙어 빠진 검은주전자라는 자를 쓸어 없앴다"고 만족스러워하며 전승 보고서를 올렸다. 

세리던 장군은 "군사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검은주전자가 요새로 들어온다면 안전한 처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자는 거절했다. 그리고 전투를 하다가 사살되었다"는 거짓말도 했다. 세리던 장군이 뱉은 유명한 말이 있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

평화를 위해 애썼던 늙은 추장은 그렇게 "좋은 인디언"이 되었고, 훗날 사람들은 '평화의 추장'으로 그를 추켜세우고 있다. 기념관 옆 언덕에 있는 비석에는 커스터와 검은주전자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올해 인디언을 많이 죽일수록 내년에 죽일 인디언이 그만큼 줄어든다. 우리가 인디언을 죽여야 하는 이유는 이렇다. 이들은 모조리 죽이거나 거지 종자로 남겨두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보면 볼수록 들기 때문이다." (세리던을 비호하던 윌리엄셔먼 장군이 1867년에 한 말)

   
 
  ▲ 와시타 학살 현장 주변 도로에 있는 검은주전자 기념 도로. 무엇을 기념하고 싶은 것일까. ⓒ 미주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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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i99.com 2011-05-07 19: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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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리안 2011-04-19 18:01:25
정말 가슴아픈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슬프셨을까요..

몰랐던 이런 역사를 알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순전한기독교 2011-04-19 14:38:18
학살현장 그림을 보니 활을 들고 겨냥한 인디언들은 있어도 총을 들고 쏘는 백인들은 없네요. 현실과 정반대군요. 백인들의 교활함에 이가 갈리네요. 발로 직접 뛰고 쓰신 기사 감명깊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