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사도신경
예배와 사도신경
  • 정용섭
  • 승인 2011.12.13 20:15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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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은 박물관에 가야 마땅하다는 이들에게

사도신경을 통한 신앙고백을 예배 순서로 받아들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귀신론으로 유명한 김기동 목사의 성락교회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주기도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것이지만 사도신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예배 순서에서 뺐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도신경이 원래는 로마교회의 세례문답 용이었으며 한참 후대에 공식적인 예배 순서로 들어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을 제쳐둔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제외하는 이들도 있다. 주로 평신도 중심의 교회나 민중교회 계통의 교회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사도신경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예배에서 고백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주장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같은 구절은 현대인에게 전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몇몇 교회는 사도신경 대신에 자신들의 교회에서 독자적으로 신앙고백문을 만들어서 사용한다.

사도신경이 경전인 신약성서만큼의 권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동방교회에서는 별로 권위 있는 고백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동방교회와 사도신경의 관계는 내가 조사해보지 못했음) 서방교회에 뿌리를 둔 개신교회의 예배에서 이것을 제외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전승과 역사성을 손상시킬 개연성이 높다.

사도신경은 신약성서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신약성서도 사도신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양측 모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적 기준이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예배의 한 순서로 채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가장 핵심적으로 간추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배가 2000년 전체 역사와 소통되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함께 암송한다는 것은 2000년 전의 초기 기독교 신자들과 동일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2000년 후의 신자들과도 신조의 차원에서 소통한다는 뜻이다.

신조를 무시하는 신앙 행태는 주로 미국의 각성운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신학과 신조를 무시하고 각자의 신자들이 성령과 무시로 소통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에 복음을 전달한 선교사들이 대개 이런 전통에 서 있는 분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사도신경도 중요하지 않고, 교회력도 그렇고, 리터지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이며 공동체적인 기독교 영성이 그들에 의해서 탈(脫)역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차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앙의 역사성이 그들에 의해서 훼손된 형국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이런 신학과 신조 중심의 영성과 예배가 크게 위협받고 있는 것 같다. 개인의 영성이 아무리 예민하다고 하더라도 2000년 역사를 관통하는 영성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사도신경은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마땅한 로마 교회의 따분한 도그마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계시가 역사 과정에서 훨씬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는 전체 기독교인들의 가장 소중한 신앙적 전통이며, 전승이고, 자산이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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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2011-12-15 14:53:02
신학과 신조 중심의 영성과 예배?

2000년 역사를 관통하는 영성?

그런게 성경 어디에 있는기?

종교란 것에서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신앙이란 종교적 전통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것에 길들여져서도 안된다. 즉, 전통이 결여된 종교는 그 가치가 크게 훼손이 되지만 신앙이란 역사와는 무관하게 오직 한 개인의 현실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로마 카톨릭에서 시작된 사도신경과 종교적 형식으로서의 예배가 존재하지 않았어도 신앙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 목사는 "그들은 신학과 신조를 무시하고 각자의 신자들이 성령과 무시로 소통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지만 신학과 신조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대로 성령과의 교통과 사죄의 은총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신학과 신조가 만들어낸 것은 교조주의적 종교의 전통일뿐 한 개인의 신앙에서 어떤 긍정적인 요소를 더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인이 신학을 통해 혹은 교리를 통해 하다못해 자신의 도덕적 차원을 높이는 일이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도신경과 같은 것을 박물관에 보내려는 사람들이 기성 기독교 교리와는 다른 교리와 보수주의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독교내의 많은 요소들에 대하여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부 반응은 이해하겠지만 기독교의 본질의 문제를 놔두고 인간이 종교를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투여된 부차적인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다수의 보수주의 기독교 목사들은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그것은 지난 과거를 지배하던 사고의 틀에 대한 거부감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기독교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결코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야 할 시대적 조류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귐의 기도 2011-12-16 12:09:13
좋은 글 감사합니다만...
너무 간략하게 정리해 놓으셔서 좀 의문이 가는 부분이 있네요.

"사도신경은 신약성서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신약성서도 사도신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신약성서 집필 시기와 사도신경의 생성 시기를 추가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구요..
구체적으로 성서의 어느 부분과 사도신경의 어느 부분이 어떤 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었는지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Man 2011-12-16 14:04:40
아래에 사귐의 기도란 분이 언급하신 부분에 대하여 저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신약성서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신약성서도 사도신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라는 말은 터무니 없는 말입니다.

신약의 27권이 정경화된 것은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정경화 작업은 3세기부터라고 볼 수 있지만 공식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입니다. 그리고 중세를 거치면서도 로마 카톨릭에서 정확하게 정경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은 것은 17세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경에 포함된 신약을 포함하여 포함되지 않은 문서들도 늦어도 2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은 그 최초의 모태인 니케아신경을 기준으로 삼아도 4세기 초반 이후에나 기독교 사회에 나타났습니다.

본문에서 언급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 라는 것은 최초의 니케아 공의회가 있었던 그 당시에는 이미 사라지고 초기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로마 카톨릭이 제도적 종교로서의 로마 카톨릭을 세우던 때입니다.

따라서 신약이 사도신경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면 연대의 차이를 가지고 보았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반대로 사도신경이 신약성서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문장에서 "양측 모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적 기준이었다는 말이다."라는 주장도 너무도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대하여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라는 것이 예수 승천 이후인 1세기 중반부터 언제까지를 말하고 있는지 정확한 정의가 없기도 하지만 최소한 기독교가 콘스탄틴에 의해 공식적인 로마의 종교로 승인된 4세기초까지의 기독교 공동체라고 볼 때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지금의 교회와는 완전히 다른 공동체였습니다. 거기에는 예배라는 종교적 형식이 없었습니다. 사도신경과 같은 종교적 신조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교리가 초기 교부들을 포함한 2-4세기의 초기 정통주의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의 교리가 형성이 되면서부터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의 신인설도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이 났는데 사도신경이 초기 기독교 공종체의 신앙적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도 마찬가지 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는 신약이라고 불리는 정경화된 성서가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베드로 복음, 도마 복음, 바울의 복음, 베드로 행전 등등 지금은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한 많은 문서들이 여러 지역의 다양한 기독교 분파들에 의해 읽혀지고 성문서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기독교의 중심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공동체에서는 도마 복음도 다른 사복음과 함께 복음서로 인정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신약과 사도신경이 신앙의 기준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의 승천 이후인 1세기 중반부터 2세기 말까지는 현재 정통주의 기독교의 교리를 지니고 있는 초기 정통주의자 (proto-orthodox)들의 영향이 크지 않았습니다.

특히 콘스탄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기독교인의 수는 로마전체의 7%도 되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존재하였던 초기 기독교는 크게 세 갈래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에비오나이트와, 마르시온의 해석을 따랐던 마르시오나이트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 세 분파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관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관과는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27권의 신약과 사도신경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제가 본 기사에서 말하는 내용 가운데 틀린 부분을 지적하고자 한다면 거의 모든 내용이 다 됩니다.

역사적인 면이나 신학적인 면이나 모두 사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평범한 기독교인은 진위를 알기 힘든 초기 기독교의 형성사와 성경의 역사를 간단히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자기 생각에 끼워 맞추려는 식의 글은 이제는 사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본 기사에서 사도신경이 마치 우리의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을 간추리고 있기 때문에 예배에 채택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사도신경의 모체인 니케아 신경은 니케아 신경을 만든 초기의 정통주의자들의 교리적 원리를 간추린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따르는 예배의 형식에 도입이 된 것입니다. 즉, 예전(liturgy)은 자신들의 교리에 맞추어 구조와 요소가 결정이 되는데 그 예전에 교리의 함축적 내용을 담은 사도신경이 포함되었고 또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의 교리적 원리에 의해 기독교라는 종교가 기독교 개개인의 신앙의 기준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당연히 신앙의 핵심이 사도신경에 나타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본문의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선후가 바뀌었다는 것이죠.

예배의 제도적인 형식은 교리적인 틀 안에서 정해지고 한 개인의 신앙적 기준도 그 교리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인데 교리의 핵심을 정리한 신교 혹 신조가 마치 그냥 정리하다보니 우리의 신앙을 간추리고 있다는 것이 발견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죠.

본 기사를 자세히 보면 초기 정통주의자들이 추구하던 종교적 노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믈론 일반 기독교인은 초기 기독교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 노선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모태인 초기 정통주의자들은 역사적 전통과 사도적 전승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신약의 정경 27권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이 사도적 전승입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볼 때에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본 기사에서도 기독교 신앙의 전승과 역사성을 손상시킬 위험성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의 전승과 역사성을 손상되기도 전에 상실된지가 이미 1,700년을 넘어섰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 승천 이후 1세기가 지나면서 이미 초기 기독교 사회에는 예수 당시와는 너무도 다른 사상과 철학과 문화적 배경과 민족적 전통을 지닌 자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초기의 교부들만 보아도 유대인은 하나도 없고 모두 그리스 철학과 이방종교에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어거스틴도 이방종교에 의해 가치관이 형성되고 난 20대 이후에 기독교를 접하면서 자신이 원래 지니고 있던 이방종교적 신관을 가지고 들어왔고 교부 저스틴이나 터툴리안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필로의 신플라톤주의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다시 14-16 세기를 거치면서 르네상스를 통하여 복고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중세를 거치며 또 다시 그리스 로마의 사상적 원류의 물꼬를 열게 됩니다.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이 16세기 초반에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단지 카톨릭의 부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의 부패는 그 전부터 매우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패에 대하여 입을 열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뒤 늦게 16세기 초반에서야 나타났기 때문에 1513년에 이르러서야 개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 루터로 하여금 입을 열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을 알린 것 뿐입니다.

역사에 관해서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어서 그만하겠지만 최소한 본 기사처럼 이런 식으로 몸통은 다 자르고 머리와 꼬리만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은 독자를 우롱하는 짓입니다.

홍성은 2011-12-16 1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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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허 2011-12-17 15:49:05
어떠한 두꺼운 교리서보다 기독교 신앙을 잘 표현한 '사도신경'을 버리고 '초대교회'를 지향한다는 말은 해선 안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