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강만원
  • 승인 2014.09.17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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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만원 ⓒ <뉴스 M>

교인들의 정당한 비판의식을 ‘훼방’하기 위해서 특히 한국교회에서 즐겨 인용하는 세 개의 구절이 있다. 이미 여러 곳에서 말했던 적이 있지만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비판하지 말라”(마7:1)는 구절인데, 이는 ‘송사하다’, ‘판결하다’, ‘판단하다’, ‘비판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닌 헬라어 동사 ‘크리노(krino)’를 한글 성경에서 문맥에 걸맞지 않게 ‘비판하다’로 잘못 번역한 경우다.

비판은 본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비방이나 비난과 달리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낱말이다. 오롯이 비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정의와 불의를 판단할 수 있으며, 무슨 근거로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과 사탄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가? 아니, 비판의 정당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가 어떻게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감히 꿈꿀 수 있는가?

‘비판하지 말라’는 명백한 오역이며, 문맥을 통해서 본래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을 함부러) 판단하지 말라’가 바른 번역(정역)이다. 실제로 영어성경NIV나 프랑스어성경TOB와 대부분의 역본에서 비판하지 말라(Do not critisize!)가 아니라 판단(심판)하지 말라(Do not judge!)라고 번역한 사실에 주목하라.

같은 문맥 안에 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구절과 연결지어서 보다 분명하게 의미를 파악하자면, “(다른 사람을) 헐뜯지 말라” 라고 옮기는 것이 가장 정확한 ‘의미론적 번역’이다.

‘비판하지 말라’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비판금지용 예문’으로 널리 애용하는 구절들 가운데 하나로 다윗이 “내 손으로 기름 부음 받은 종을 치지 않겠다”라며, 끈질기게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던 사울을 절대절명의 순간에 살려둔 구절을 예로 들 수 있다. 다른 구절들과 달리 본 절은 종종 대상이 한정된다. 즉, 하나님이 기름부어 세우신 ‘주의 종’을 함부러 비판하지 말라는 예문으로 등장한다.

물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주의 종’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다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구절이지만, 본 절은 다윗과 사울의 특별한 관계에 적용되는 내용일 뿐 무턱대고 일반화시킬 수 있는 ‘원리’가 아니다.

다시말해 한국교회에서 종종 보듯이 목사의 천부적인(?)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서 의례히 인용하는 것처럼 ‘비리 목사’의 악행을 무마하는 빌미가 될 수 없다. 이미 ‘목사는 사울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기 때문에 다시 반복하지 않겠지만,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면 목사는 종교의식에 따라서 교단에서 안수를 받았을 뿐, 성경에서 말하는 ‘기름 부음 받은 종’이 아니다.

이른바 ‘기름 부음 받은 종’은 구약시대에 왕이나 대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에 제한되는 특별한 의식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의 사제에 맞서 종교적인 이유와 필요에 따라 개신교에서 급조한 목사는 교회의 사역자로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교사일 수 있을망정, 사실상 성경적인 의미에서 ‘기름 부음 받은 종’이라는 이름 자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장황하게 논쟁할 이유조차 없다.

 

세 번째가 바로 이 글의 제목인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이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구절이며 주제가 주제인 만큼 이미 문학작품이나 성화, 또는 연극이나 오페라를 통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성경의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유대인들이 예수께 데려온다. 그들의 의도는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물었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율법에 따라서 간음한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있기 때문에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응당 “간음한 여자를 즉각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해야 하지만, 예수는 유대인들과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은 자칫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 어찌보면 예수를 진퇴양난의 위기에 가두는 간교한 함정이었다.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쳐서 죽이라고 말하면 그때까지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가르쳤던 것이 모두 거짓이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잠깐 땅바닥에 무언가 글을 쓰고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조용히 말했다. 613 조항의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성경은 “하늘 아래 있는 자는 모두 죄인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율법에 따라서 상대의 죄를 묻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율법에 대해서 정결해야 하지만, 자신의 죄에 가책을 느낀 유대인들이 모두 떠났고, 마침내 예수와 여자만 남았다. 예수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여자에게 말했다. 이미 모두가 알고있는 내용인데 다시 반복하는 이유가 있다.

본문을 두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용서’에 초점을 맞추거나 심지어 “비판하지 말라”는 말과 동의어로 주저없이 인용하기 때문이다. 본문이 과연 “비판하지 말라”는 뜻일까?

만약에 간음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예수는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범한 것이 된다. 유대인들에게 간음이 도대체 어떤 죄인가? 율법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초대교회에서도 간음은 살인, 우상숭배와 더불어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중죄다. 예수께서 간음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했다면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부정한 것이된다.

과연 그럴까?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이혼증서를 주고 여자를 내쫓는 장로의 전통을 비판한다. 그때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절대로 이혼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간음’만큼은 예외로 인정했다. 그만큼 예수께서도 다른 죄와 달리 간음을 중죄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용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면 이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명백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예수에게 모순과 왜곡이 있을 수 있는가? 예수의 오류가 아니라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자들의 오류다. 예수는 ‘용서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돌로 치지 말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다시말해 간음은 중한 죄이지만,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을망정 천하보다 소중한 생명을 빼앗지 말라는 명령이다.

또한 예수는 여자에게 “내가 너를 용서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하지 않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여자가 저지른 죄를 무턱대고 용서한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에 따른 정죄, 이를테면 “나도 너를 율법에 따라서 돌로 치지 않겠다”라는 말이다.

예수가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 것은... 여자를 무조건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본문은 어떤 경우에도 ‘비판하지 말라’는 말과 동의어가 될 수 없다. 비판하는 교인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어설피 성경을 인용하지 말라. 비판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정당한 능력’이다. 다시말해 정의와 불의를 구별하는 지혜를 부정하는 것은 불의를 은연중에 방관하는 오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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