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쇼를 펼치는 열쇠공 하나님
깜짝쇼를 펼치는 열쇠공 하나님
  • 양재영
  • 승인 2015.05.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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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을 통한 성서의 평화
지난 26일(화) 정의평화제자학교에서 박은철 선생의 <동양고전의 평화사상과 성서의 평화>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15년간 고등학교 한문교사로, 그리고 최연소 중학교교장으로 재직했던 박 선생은 <한자는 즐겁다>, <노빈손 동양고전 시리즈 1,2>(뜨인돌 출판사) 등을 저술했고, ‘크리스챤의 한문독법 : 동양고전으로 큐티하기’ 집필 중에 있다 - 편집자 주

동양고전은 한문을 쓰는 나라인 한·중·일을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베트남도 프랑스 지배 이전에 한문을 썼다고 합니다. 호치민같은 사람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애독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자문화권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다산 정약용을 뽑습니다. 전방위적 학문을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초기를 대표하는 삼형제 중 한명이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한문을 좋아했습니다. 함축적인 함의가 들어있는 한문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는데, 당시 배웠던 시들은 거의가 음풍농월(吟風弄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공을 하면서 다산 정약용의 시들을 보면, 음풍농월하는 시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애절양(哀絶陽) -다산 정약용의 시관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시대의 불의를 가슴 아파하지 않고 여론이 타락함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며,
  정의를 아름답다 하며 그릇된 것을 풍자하고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

 

위의 정약용의 글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시가 아닌 목회, 신앙, 전도, 삶 등을 대입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조선후기 삼정의 문란으로 수탈 받는 민중들의 삶에 대한 화석화된 지식들이 이 시를 읽으면서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다산의 시인 ‘애절양’(哀絶陽)을 읽으면 조선후기 조상들이 경험했던 삶이 어떠했는가가 살아 꿈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애절양’은 남자의 성기를 잘라낸 슬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전남 강진에 유배됐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을 읊은 것입니다.

강진의 찌그러지는 초가집에 한 아낙네가 방안에 들어가니 남편이 자기 성기를 잘라낸 것을 발견하고 피를 토하는 듯한 슬픔으로 웁니다. 백골진포와 황구첨정으로 수탈당한 힘없는 남편이 “내가 애를 낳아서 그렇다. 성기가 있으면 또 애를 낳을 것이니 자르자”며 자신의 성기를 시퍼런 낫으로 자른 것입니다.

부호들은 일년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낟알 한 톨 바치는 일 없습니다. 이 시는 당시의 정의가 무너지고 평화가 깨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평화는 정의가 실현된 토대에서 옵니다. 사회정의가 무너지니까, 백성들의 삶은 이런 고통과 아픔들로 신음합니다.

우리에게는 동양사상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동양고전하면 무당 ‘굿’하는 것, ‘점’치는 것 정도로 생각합니다. 동양고전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비성경적이라는 오해들이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동양고전은 그리 단순하고 무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서구적 시각에서 사고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동양고전은 무개척 분야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 다산 정약용과 함석헌 선생

 

영양괘각무흔(羚羊掛角無痕) -영양은 뿔을 거는데, 흔적이 없다.

영양이란 동물은 잘 때 천적을 피하기 위해, 점프를 해서 나무에 뿔을 걸고 잡니다. 그래서 사냥꾼들이 영양을 잡기 위해서 발자국을 쫓아가다 어느 순간 발자국이 끊긴 것을 발견합니다. 수준 낮은 사냥꾼들은 발자국이 끊긴 자리에서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성경이 침묵하며 답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게 뭔 말입니까?’라며 앞이 안보이고 캄캄할 때, 즉 발자국이 끊겼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린 완전 초보 사냥꾼 티를 냅니다. 그때야 말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시점인데, 우린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합니다.

말씀이 끊긴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배우고, 원하는 길로 걸어갈 수 있기 위해선 말씀과 아울러 인문적 소양, 균형잡힌 역사의식, 성숙한 상상력들이 겸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러기위해 제일 좋은 것이 동양고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은 <열두바구니>라는 글을 통해 다윗이 사용한 조약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골리앗을 때려 넘겼기로서 조약돌을 비단에 싸서 제단에 둘거야 없지 않은가? 위대한 것은 다윗이지 돌이 아니다. 그것쯤은 다 알면서 또 다윗은 하나님의 손이 역사의 냇가에서 되는 대로 주워든 한 개 조약돌임을 왜 모르나. 세상에 조약돌 섬기는 자 어찌 그리 많은고! 골리앗 죽었거든 돌을 집어 내던져라! 다음 싸움은 그것으론 못한다.”

 

동양고전은 이를 득어망전(得魚忘筌,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어버린다 - 장자)이나 사벌등안(捨筏登岸, 언덕에 올랐으면 뗏목을 버려라 - 금강경)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신앙관이 너무 서양 일변도입니다. 대부분 미국에서 서양의 신학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신학만 움켜쥐고 동양고전을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문화, 사상들 속에 하나님 속성의 편린, 조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경이로움을 읊은 것이 시편뿐 입니까? 제 친구 중 한명은 “성경이 다 답이데, 왜 다른 책을 읽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성경에 대한 도발적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성경의 계시로 다 알 수 있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이 하나님을 다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과학을 다루신 분들이 성경 66권으로 다 증명하려다 무리수를 두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다음 화염병이 날아들 곳은 교회이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조상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와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그런 것들을 고민했습니다.

‘역사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족신이었는데, 아들을 보내 십자가에서 죽여 세계적인 신으로 성장한 것입니까?’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 진시황에게 객들을 쫓아낸 것에 대해 반박문을 올리다)

진나라는 오랑캐 취급을 받던 나라였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합니다. 진나라가 유목민으로, 늘 옮겨다녀야 하기 때문에 싸움은 잘했지만, 문화는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진나라는 국적을 불문하고 인재들을 등용합니다. 하지만, ‘대토목공사’에서 소위 뒤통수를 맞은 후 외국인을 쫓아냅니다. 이때 외국의 인재들을 쫓아내면 안된다며 올린 상소문입니다.

“태산을 어떤 형태의 흙이든 사양하지 않는다. 고로 거대함을 이룬다.
 황하는 가는 물줄기들을 가리지 않았다. 고로 깊음을 취한다.”
  (泰山不辭土壤故能成基大 河不擇細流故能就基深)

 

성경만 읽으면 다 됩니까? 한국 교회가 시대적 현실 앞에서 침묵하고, 방관하는 이유는 목사님들이 깊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 끊겼을 때 판단을 못하는 사람들이 강대상에 서 있으니, 시정잡배들의 소리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우린 젊은 친구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85년도에 유행했던 말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화염병이 날아들 곳은 교회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4대강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헤쳐졌는데 우리는 침묵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지식만 있지, 역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책을 읽어보지 않았기에 알지 못합니다. 이 시대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고, 어떤 현상들이 있는가에 대한 기초적 이해도 없는 상황에서 동성애자들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만 말합니다.

기독교인의 윤리가 없습니다. 높은 수준의 윤리적 소양이 없습니다. 기독교 학교에서조차 특정한 학교 가는 것이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깊이가 없으니 판단이 즉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발자국만 끊기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고민을 그대로 하고, 해결책을 엉뚱한 데서 찾습니까?’

   
▲ 박은철 선생 © <뉴스 M>

 

“평화는 연습을 해야 한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28살에 썼습니다. 그 사실이 저에겐 너무 큰 충격이었습다. 제가 농담으로 ‘공자는 책을 몇 권 읽고, 맹자는 책을 몇 권 읽었을까?’라고 묻습니다. 단언컨대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그들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늘의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열악한 문화 속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무궁화를 영어로 ‘the Rose of Sharon’ 이라고 합니다. 무궁화를 왜 ‘샤론의 장미’라고 했을까요? 아마도 무궁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본 것 같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덕우드(DOGWOOD)라는 게 있는데, 영국에서 개의 피부병을 고칠 때 썼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서양의 선조들이 이 나무를 많이 심은 이유가 이 나무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닮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미국의 신앙의 선조들은 이 나무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과 수난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많이 심었다는데, 참 좋은 묵상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경건에 이르기 위해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경건에 이르기 위한 연습이 아닌 허상만 쫓는 연습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국에 인문학공부 열풍이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완전히 식지 않았는데, 사실 그것이 다 허상이었습니다.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취직하는 데 필요하다니까, 경제적 흐름과 관계가 있었다고 하니까 '논어'를 읽습니다. 논어를 읽고 삶이 변화되고, 시대를 읽어내고, 이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논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점차 개인의 기독교가 되고 있습니다. 불교의 소승불교처럼 말이죠. 어느덧 하나님은 남자친구처럼 되었고, 깜짝쇼를 펼치고, 무엇이든 열 수 있는 열쇠공 하나님으로 전락했습니다. 기독교가 소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찬양은 상처받은 나를 치유를 도구이며, ‘메시지’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마사지’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쓰는 책 중에 ‘동양고전으로 큐티하기’란 책을 쓰고 있습니다. 성현들이 말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바다의 편린들을 엿볼 수 있다면, 거대한 과일나무의 한 과일을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쓰고 있습니다.

동양고전이 서양 일변도의 신학과 소승화된 기독교를 벗어나, 역사의 주인으로서 웅혼한 하나님을 맛보도록 하는 도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양고전을 통해 평화에 이르는 연습을 매일매일 쉬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강의: 박은철 선생
정리: 양재영 기자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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