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설교와 죽은 설교
산 설교와 죽은 설교
  • 김무영
  • 승인 2017.02.03 01: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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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설교자라면 산 설교와 죽은 설교 중 어느것을 택할것인가?

그동안 교회를 열심히 나오던 사람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잠간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아예 교회를 떠난 것이다. 어디에 문제점이 있는가?

예배에 참석한 사람이 가장 인상을 깊이 받는 것은 강단의 설교이다. 설교에는 산 설교(Living Sermon)와 죽은 설교(Dead Sermon)가 있다. 산 설교는 사람들을 모은다. 그러나 죽은 설교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세월이 변해도 교회의 강단이 산 설교로 채워진다면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 성과 같이 든든할 것이다. 당신이 설교자라면 산 설교와 죽은 설교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더 말할 것 없이 산 설교일 것이다.

산 설교 (Living Sermon)

설교를 듣는 사람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설교는 산 설교이다. 생명의 역사는 변화의 역사이다. 더러움에서 일어나 성결함을 향해 가는 변화이다. 속된 것을 버리고 거룩한 것을 향해 일어서는 변화이다.

깨달음을 일으키는 설교는 산 설교이다. 이전에는 모르던 것을 알게하는 설교이다. 듣는 사람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보게하며 자신이 다른 길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설교이다. 감사를 유발하는 설교가 산 설교이다. 나에게 내려진 그 크신 은혜에 감동하여 누가 강요해서가 아닌 자발적인 감사를 표하게 되는 설교는 산 설교이다.

산 설교는 생명에서 나온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설교자가 임의적으로 만든 설교가 아니라 생명에서 나온 설교를 하려면 설교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설교자 안에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된 상태에서 산 설교는 생산된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는가?

바울(St Paul)의 경우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바울은 하나님을 열심이 섬기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그로 하여금 예수를 핍박하는 선봉장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남으로 변하였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에서 하나님을 품은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이제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표현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되었다. 생명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합일 됨으로 그는 산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설교학을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힉위를 받았어도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을 이루지 못하였다면 그는 결코 산 설교를 할 수 없다. 백과사전 식으로 많은 지식을 그의 설교에 나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요즘 같이 쉽게 자료를 구하기 쉬운 때가 또 있었을까? 신문 칼럼을 쓰는 의사(MD)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물어본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솔직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얻는다는 것이다. 요즘은 약간의 배열과 정열의 재주만 있으면 인터넷에서 얻은 자료로 얼마든지 멋있어 보이는 글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만든 설교가 보기에는 멋있어도 그 지식의 나열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를 일으키게 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산 설교(Living Sermon)를 하기 원하는가?

무릎을 꿇어라. 무릎 꿇고 있는 시간을 늘여라. 주 성령님께 사로잡힐 때까지 기다리라. 이것은 산 설교를 하기 위한 기초작업(Foundation)이다.

성경을 읽어라. 성경 속에 파묻혀야 한다. 이 말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연구할 대상의 책이 아니다. 성경연구가 일으키는 피해는 막심하다. 성경을 매일의 양식으로 끊이지 않고 읽어야 한다. 설교준비를 하기위해서 펴는 성경책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것이 삶이 되어야 한다.

성경의 난해한 귀절에 잡히지 말라. 성경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만나면 그것을 해석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안방 따스한 아랫목 구석의 큰 다라이 위에 시루를 얹어 놓고 콩나물을 키우던 것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매일 다라이에 담겨 있는 물을 퍼서 시루에 부으셨다. 물은 시루에 들어가자 마자 아래로 흘려 내렸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콩나물은 먹기에 좋을만큼 자란 것을 보았다. 어느 귀절에 잡히지 않고 매일 계속하여 성경을 읽을 때 물은 빠져도 자라났던 콩나물을 기억하라. 매일 읽는 성경이 시루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같아도 내 안에서 신앙은 자란다는 확신을 가져라.

말씀(Rhema)을 잡아라. 이렇게 매일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다 보면 성령께서 전광석화와 같이 내 안을 환히 비치게 하는 말씀(Rhema)이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원어 사전을 펴라. 성경 원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은 연구를 위한 작없이 아니다. 확인을 위한 작업이다. 잘못된 이해와 해석으로 강단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삶의 현장을 살펴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모르고서는 생명력 있는 산 설교가 효과를 발할 수 없다. 아무리 산 설교를 준비하여 강단에 섰다 할지라도 들을 귀가 없으면 그 설교는 무용지물이다. 산 설교를 준비함의 중요성 못지 않게 설교를 듣는 이들의 귀를 여는 것도 중요하다. 어린 젓먹이에게 헤겔의 철학을 이야기 한다면 무슨소용이 있겠는가? 들을 귀를 열기 위해서는 설교 들을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살펴야 한다. 그들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찾아가라. 그리고 말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들어라. 들어주는 것은 좋은 치유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삶과 설교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이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설교를 듣는 어떤이의 감격의 연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작품의 한 줄거리가 될 수도 있다.

죽은 설교

설교를 들은 사람이 그 설교의 제목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설교는 죽은 설교이다. 산 설교는 기억에 살아 남지만 죽은 설교는 쉽게 잊혀진다. 설교자가 산 설교를 하지 못하면 그는 죽은 설교를 할 수 밖에 없다. 죽은 설교는 시간을 좀먹는 벌래와 같다. 설교자가 죽은 설교를 피하는 방법이 있을까?

상자(Box)에 갇히지 말라. 자신은 물론 사람들을 만들어진 어떤 박스에 쳐 박아 넣으려 하지 말라. 소위 교회력(Church Calendar)이란 것에 의해 만들어진 성경 분문(Text)을 가감없이 받아 들고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가 생각보다 많다. 역사가 오랜 교단(Main Line Denomination)의 교회일수록 더하다. 교회력에 따라서 하는 설교는 약은 꾀를 부리는 목회자들이 선호한다. 주어진 본문(Text)이 있으니 말씀(Rhema)를 얻기 위한 노력을 안해도 된다는 편리함을 그들은 알고 있다. 더러는 그 본문(Text)이 어쩌다가 말씀(Rhema)이 될 수도 있지만 이것은 복권에 당첨되는 비율 정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설교(Sermon)는 강의(Lecture)가 아니다. 설교는 설교이지 강의가 아니란 사실을 잊지 말라. 강의는 같은 레벨의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대학 강의는 대학생들을 위한 것이고 중학교 강의는 중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일반 교회의 설교는 모든 레벨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곳에서 행해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이 강의하듯 하는 설교를 고집한다면 어느 레벨의 사람에 맞추어 할 것인가? 모든 레벨의 사람에 맟주어 설교하기는 불가능하다. 신학교에서 신학생을 위해 한 교수들의 강의를 교회 현장에서 그대로 사용하지 말라. 교인들이 모두 도망간다. 그리고 예배당은 텅텅 비고 마침내 교회 문을 닫을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의 말로 시간을 때우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신의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를 잠간 이용할 수 있겠지만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경 본문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말아야 한다. 설교시간은 당신의 의견발표(Opinion Presentation) 시간이 아니다. 기도하면서 준비한 말씀에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 주일은 설교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은혜로운 타인의 설교를 금기시 하지 말라. 기도하면서 말씀을 얻으려고 노력했는데도 잡히는 것이 없다면 은혜로운 타인의 설교를 효과적으로 활용해도 좋다.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한다. 설교자의 목표는 교인들로 하여금 말씀을 통해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은혜와 복을 얻을 수 있다면 어째서 주저하는가? 자신의 설교도 그렇게 이용되도록 허용하라. 설교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지 자신의 영역확보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탤런트를 아끼지 말라. 찬양의 텔런트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훌륭한 자산이다. 언변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텔런트이다. 같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감동을 받게 하는 것은 은사중의 은사이다. 사람을 끌어 모이게 하는 피플스킬(People Skills: personal effectiveness, interaction effectiveness, and intercession skills. from Wikipedia Encyclopedia)은 대단한 축복이다. 설교를 함에 이것을 아끼지 말고 활용하라.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도 자신을 과신하는 것은 죽은 설교를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이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은 자신을 차에 맡긴 사람이다. 자신이 차를 끌거나 밀고 가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인도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의 양을 채워야 한다. 매사에 기도가 없이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라.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목회자는 물론 교인들도 바라는 소원이다. 어떤이가 말했다. “교회가 들어오는 문은 활짝 열어 놓고 나가는 문은 모두 닫아버리면 년말에 가면 교회가 많이 성장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나가는 문을 닫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나가는 문이 너무 넓게 열려 있어서 들어왔던 사람이 나갈 때는 넓게 열린 문으로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 죽은 설교는 나가는 문을 더 넓게 열어 놓는 마스터 키(Master Key)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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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17-02-07 07:15:20
글쎄요... 정말 산 설교를 하면 다 도망가지 않을까요? 글고... 교회력을 따라 하는 설교가 그리 쉬운가요? 교회력은 오히려 우주와 함께 우주 속에서 일해오신 하나님의 역사(history)이기에 이걸 뒤쫓아 본문을 선정하고 해석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작업일 듯한데요. 글쓰신 분의 다분히 선언적인 여러 명귀들에 동의는 하지만... 이걸 설교 현장에서 어떻게 풀어내느냐 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을 듯 보입니다.

ysjhi-0776 2017-02-04 00:16:51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된 상태에서 산 설교는 생산된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합일의 경지에 도달하는가?" 기사내용중 합일과 연합의 차이를 잘 구별하여 사용하였음 합니다. 그리스도와는 연합교리이고 합일은 이방종교에서 사용되는 교리라고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