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일회성 실수인가 습관성 행위인가
표절, 일회성 실수인가 습관성 행위인가
  • 박지호
  • 승인 2007.06.02 0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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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한인침례교회 양승원 목사, 표절 사례 부지기수

버지니아한인침례교회 양승원 목사가 표절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사실이 보도된 이후에도 양 목사에게서 회개와 각성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자에게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으니 지켜봐 달라”며 애원하던 태도와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표절'이라는 표현 안 쓰고 '인용'과 '도움'으로 왜곡

이 사건이 보도된 후 5월 20일 주일예배 시간에 한 중직자는 집사회에서 결의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는 양 목사의 논문 표절 기사가 보도되기 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성경에도 깨끗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냐"며 양 목사의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던 사람이다.

그는 교인들에게 “So what?”(그래서 어쨌다는 거냐)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목사님의 논문에 대해서 상황을 알아보고 협의한 결과 목회하시는 것과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또 “청빙 시 조건에 박사 학위가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번 일을 빌미로 (양 목사를) 사임시킬 수 없다”며 양 목사를 옹호했다. 일부 교인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그는 또 “교회 일과 목사님의 논문에 대해 제보한 사람과 또 이 일을 함께 진행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밝혀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했다.

곧이어 양승원 목사는 논문 문제와 관련해서 약 1분가량 간단하게 언급했다. 아래는 양 목사의 발언 내용이다.

“제가 딱 7~8년 전에 썼던 논문입니다. 한국에서 목회하면서 새벽 시간을 이용하면서 쓸 때 히스토리에 관련된 백그라운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사려 깊지 못한 자세도 있었고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에 한 책을 제가 인용했던 것이 이제 밝혀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 제 일로 인하여서 상처받으신 분들에게 사과드리고,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번 일을 통해서 제가 좀 더 주 앞에 글을 하나 쓰는 사람으로서 설교하는 하나하나가 더 주 앞에 쓰임 받는 삶의 자세로 또한 그런 전환점에 섰고, 그로 인해서 덮어주고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타나는 그런 영광을 바라보는 교회가 되는 기회가 되길….”

‘표절’이라는 단어 대신 ‘인용’이라는 말을 썼으며, “덮어주고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바라보는 교회가 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는 모호한 말들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이전에 자신을 반대하는 여러 교인들을 ‘덮어주고 이해하는’ 대신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그가 베낀 <평양대부흥운동>의 저자 박용규 교수에게도 교회 사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불거진 것이 일부 교인들의 루머와 뒷조사 때문인 것처럼 호도했다. 그는 기껏 “교수님의 책을 읽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만 했다. 이번에도 ‘표절’이라는 단어 대신 ‘도움’이라는 말을 썼다. 그는 기자가 표절을 인정하느냐고 집요하게 따질 때에만 마지못해 시인했을 뿐, 자발적으로 고백해야 하는 시점에서는 모두 ‘인용’ ‘도움’이라는 엉뚱한 표현을 썼다. 그는 학위를 받은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도 전화해서 이 사건을 교회 내부 문제로 몰고가려고 애를 썼다.

자신에게는 "넉넉하게 품어 달라"…반대 교인들에게는 '출교'

양 목사는 지난번 인터뷰에서 “한 목사의 정직에 대한 척도는 논문일 수도 있고, 전체적인 사람의 됨됨이 속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논문으로 인해 자신이 부정직한 목회자로 몰리는 것을 억울하게 여겼다. 일부 하자는 있을지언정 전반적으로는 정직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 목사가 교회에서 이런 해명성 발언을 한 것은 처음이 아니다. 교회 게시판에 양 목사가 올린 글들이 인터넷에서 베낀 글이라는 소문이 교회 내에 나돌자, 지난 2월 22일 양 목사는 게시판에 ‘인터넷의 글 글’이라는 제목으로 해명하는 글을 실었다. 아래가 당시 실었던 글의 일부다.

“… 우리 교회 홈피가 다양하고 재밌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혹시 눈살을 찌푸리는 표현이나 글의 내용상 불투명한 출처에 대해서 이해를 구합니다. 좀 더 조심스럽게 글을 써야 되겠지만, 인터넷의 글을 활자화의 성격보다는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오해될 요소도 많습니다. 넉넉하게 표현하고 넉넉하게 품어주는 눈길이 있을 때에 더욱 많은 글들이 올라올 것입니다.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박사 학위 논문까지 표절한 사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인터넷의 글은 활자화된 것이 아니라서 가볍게 생각하고” 그랬다는 변명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지난번에 “넉넉하게 품어 달라”고 말하고, 이번에는 “덮어주고 이해해 달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박사 논문 표절을 게시판의 글 하나 베낀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2007년 1월 7일 교회 홈페이지 '양승원 목사의 생각'이라는 코너에 올라왔던 글(왼쪽)이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라는 글(오른쪽)과 동일하다. 양 목사는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각색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이름과 화폐 단위를 바꾸기도 했다.  
 
당시 문제가 되었던 글들 중 하나를 소개한다. 2007년 1월 7일 교회 게시판 ‘양승원 목사의 생각’이라는 코너에 올라왔다가 잠시 후 사라진 글이다. ‘상호(가명)와 엄마와의 대화’라는 제목의 글이다.

“상호가 공책에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집사람이 상호에게 물었습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쓰고 있니?" "엄마에게 청구할 돈을 계산하고 있었어요." "궁금하구나. 어디 한번 보자." "예, 지금 막 계산이 끝났어요. 보시겠어요?" 집사람은 상호가 꼼꼼하게 적어놓은 계산서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우유 받아오기 세 번 30$, 부엌 청소 두 번 40$, 마당 청소 세 번 60$. 구두 닦기 네 번 8$, 식탁 차리기 네 번 40$, 합계 총 178$. 상호 엄마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청구서를 써볼 테니, 네가 한번 봐주겠니?" "엄마도요?" “응." "엄마도 저한테 용돈을 타시려고요? 엄만 저를 위해서 한 게 없잖아요." 그러면서 상호는 엄마의 청구서를 써 내려갔습니다. 팔년간의 식사 제공 0$, 수없이 많은 설거지와 빨래 0$, 아플 때 병간호 0$. 숙제 도와준 것, 온갖 시중들기 0$, 합계 0$. "그런데 왜 엄마는 0$이라고 적으셨죠?" "왜냐하면 엄마는 너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엇이든 주고 싶어서지. 그러나 네가 청구한 178$은 주마." 이야기가 끝난 후 집사람은 상호에게 돈을 주기 위해 지갑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상호는 엄마를 껴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에요. 엄마, 저도 엄마에게 한 푼도 안 받겠어요." 받을 사랑, 받을 것만 계산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네요. 이미 받은 것은 전혀 계산하지 않는 이기적 모습이지요. 받은 것을 늘 감사하고 기억하여서 베푸는 삶이 되었으면….”

모자의 대화는 정말 눈물겹도록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 글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들을 모아 놓은 사이트에 있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라는 글의 내용과 동일하다. 양 목사는 등장인물 중에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엄마’를 ‘집사람’으로 바꾸고, 화폐 종류를 원화에서 달러로 바꾸는 재치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것만이 아니다. 박용규 교수가 쓴 평양대부흥에 관련된 글을 별도의 설명 없이 올렸다가 교인들의 지적이 잇따르자 그제야 Godpia에서 가져온 것이라며 출처를 밝히기도 했다. 이밖에 수차례에 걸쳐 다른 사람의 글을 ‘양승원 목사의 생각’이라는 게시판에 실어서 마치 자신의 글인 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당시 목회하느라 몹시 바빴던 상황에서 쓴 논문이라 실수를 했다는 변명은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남의 글을 내 것인 양 상습적으로 표절해온 것이다.

기생 라합의 거짓말과 논문 표절을 동일시?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그는 5월 27일자 주보에 ‘주님 앞에 긍휼을 구해야 할 이유’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그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성경의 내용을 인용해, 표면적 현상보다 배후에 있는 동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사 학위 논문을 표절한 사실보다 이면에 어떤 동기가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해 달라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서 양 목사는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강조하며, 긍휼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아래는 칼럼 내용이다.

   
 
  ▲ 5월 27일자 주보에 실린 양승원 목사의 칼럼이다. 양 목사는 이 칼럼에서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을 인용하며, 표면적 현상보다 배후에 있는 동기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라합의 거짓말 사건은 상황윤리의 대표적인 케이스였습니다. 상황윤리는 상황에 맞추어서 윤리적 판단을 내리자는 기독교 윤리의 한 분야입니다. 이 상황윤리에 반대하는 복음주의 윤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라합이 히브리 정탐꾼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믿음을 행사했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수용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해 왔습니다.

거짓의 표면적 현상보다 그 배후에 있는 동기를 보면, 라합의 거짓말 동기는 정탐꾼을 살리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목적이 정탐꾼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거짓과 함께 거짓의 배후를 살핀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라합을 믿음의 인물로 평가한 것입니다. 물론 저는 라합이 비록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지만, 아마도 후에 자신이 거짓말을 한 것을 두고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고 생각합니다.

거짓과 마찬가지로 진실도 그 진실의 표면적 현상보다도 그 배후에 있는 동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배후가 진실을 더욱 진실로 부각시키기 때문입니다. 거짓이나 진실의 가치는 나타난 현상보다 그 배후가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라합의 표면적 거짓말을 기억 안 하시고 그 거짓말의 배후 동기를 믿음으로 인정한 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입니다.

신자는 거짓, 진실의 상황과 같이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삶의 여정에서 반드시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닌 제3의 해답을 하나님께서 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의견의 일치 여하를 떠나 우리가 이런 진실을 말하기 어려운 결단 앞에서 얼마나 치열한 고민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즘 제 자신을 많이 살펴봅니다. 삶의 한 과정이 스쳐 지나갈 수 없고, 어제가 오늘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한 목회자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얼마나 연약한지를, 그리고 그 연약함은 강한 투명성 속에서 회복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이런 거짓과 진실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나누었으면 합니다. (늘 여러분의 사랑 앞에 서 있는 여러분의 목사가….)”

<미주뉴스앤조이>는 양 목사의 논문 표절 건을 취재하면서 논문 표절 외에도 양 목사의 정직하지 못한 정황을 여러 가지 발견했으나, 논문 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서 보도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논문 표절 사건이 단순한 실수가 아닌 양 목사의 습관적인 태도임을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만 예로 들었다. 양 목사는 지난번 인터뷰에서 “한 목사의 정직에 대한 척도는 논문일 수도 있고, 전체적인 사람의 됨됨이 속에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양 목사가 왜 표절이라는 표현을 안 쓰고, 교인들과 박용규 교수와 신학교에 사건의 진상을 호도하려고 했는지, 칼럼에서 말한 것처럼 표절의 이면에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수차례 전화 통화를 시도하고 이메일을 보냈으나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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