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동양선교교회의 역사는 '분쟁사'?
LA 동양선교교회의 역사는 '분쟁사'?
  • 박지호
  • 승인 2008.09.2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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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목사와 장로들, 담임목사가 맺은 갈등의 엉겅퀴

올해로 38년째를 맞는 LA 동양선교교회(강준민 목사)의 '교회사'는 '분쟁사'라고 바꿔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이 교회 개척자인 임동선 원로목사가 은퇴한 이후 새로운 담임목사가 올 때마다 분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2대 이병희 목사와 3대 박광철 목사는 갈등 끝에 사퇴하고 나가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했다. 4대 담임목사로 강준민 목사가 부임한 이후에도 갈등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이 교회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는 원인은 다양하게 제기된다. 교회의 전통과 신앙 스타일이 다르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으며 반대하는 장로들이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은퇴 이후에도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면서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원로목사가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교회 성장과 목회 성공을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 분쟁을 자초하고, 저주 설교나 표적 설교를 통해 편 가르기를 하며 갈등을 증폭시키는 담임목사가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아마 이 세 가지 요소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우러지면서 교회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동양선교교회의 분쟁 역사를 거슬러 훑어보면 알 수 있다.

   
 
  ▲ 올해로 38년째를 맞는 LA 동양선교교회(강준민 목사)의 '교회사'는 '분쟁사'라고 바꿔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4대 담임목사로 강준민 목사가 부임한 이후에도 갈등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다.  
 
담임목사의 영적 교만이 문제 vs. 장로들의 간섭과 제재가 문제

동양선교교회를 1970년에 개척해 1990년까지 이끌었던 임동선 목사는 은퇴하면서 이병희 목사에게 바통을 넘겼다. 이병희 목사가 동양선교교회 창립 19주년 기념부흥회 강사로 왔을 때 임동선 목사가 임시당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며 청빙을 수락해달라고 부탁했고, 이병희 목사가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여 동양선교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이 목사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회는 분쟁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고, 이병희 목사는 채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발단은 이병희 목사의 신앙 노선에 대한 논란에서 비롯됐다. 동양선교교회의 전통을 버리고 오순절 계통의 성령 사역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장로들과 담임목사와의 감정 다툼이 갈등의 발단이다. 당시 시무장로 중 한 명은 담임목사의 '영적 교만'을 원인으로 꼽았다. "당회를 할 때 반대 의견이 나오면 받아주면 되는데, 반대했던 장로들을 다음해에 보직을 줄 때 일률적으로 한직으로 보내면서 보복성 공격을 했다"고 했다. 또 다른 장로도 "이 목사가 처음부터 당회를 싫어하고, 당회원 편 가르기를 하는 등 불신을 조장했다"고 말했다.

91년 2월 3일 당회의 7인 위원들이 이 목사에게 보낸 건의서다. "△ 오순절 교회 스타일 및 신앙 노선으로 오해 받을 소지의 목회를 지양한다 △ 본 교회의 신앙 및 목회 전통을 존중하고 헌법에 명시된 예배 의식을 준수한다 △ 원로목사와 관련되는 선교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 △ 교회의 치리는 당회를 중심으로 운영할 것을 재확인한다 △ 사모가 목회에 참여할 때에는 당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

   
 
  ▲ 당시 이병희 목사가 "오순절 교회 스타일로 목회를 하지 않겠다"며 당회에 제출한 각서.  
 
이에 이병희 목사가 "동양선교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해 충성 봉사하겠사오니 행여라도 본인이 오순절 교회 스타일 및 신앙 노선으로 목회를 하거나 본 교회의 신앙 및 목회 전통과 어긋날 때는 즉시 주지시켜주시기 바란다"는 답변서를 당회에 제출했다.

이희숙 씨(이병희 목사의 아내)가 쓴 <목사와 결혼한 죄밖에 없어요>라는 책을 보면 이병희 목사의 입장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이 씨는 문제의 발단을 "원로목사와 일부 당회원들이 교회의 전통과 다르고 신앙 스타일이 다르다고 교회가 부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여러 가지 조건을 걸어놓고 제재를 가했다"고 언급했다. 이 씨는 "많은 간섭과 제재 속에서 이 목사님은 소신껏 목회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표를 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기도는 강단에 오르기 전에 미리하고 설교 전에 기도하지 말 것, 설교 전에 성도들과 인사를 할 때에 할렐루야로 인사하지 말 것, 설교 중에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하지 말 것, 설교 중에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말 것, 금요기도회에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것을 금할 것, 병자들을 위해 안수기도하는 것을 금할 것,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교회와는 관계를 갖지 말 것." (<목사와 결혼한 죄밖에 없어요> 중에서)

이병희 목사가 "오순절 교회 스타일로 목회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 양식의 답변서를 당회에 제출한 이후에도 "이 목사의 아내가 안수 행위와 인위적 방언을 유도했고, 장로 4명이 원로목사에게 협박을 했고, 이병희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을 규합해 기도회를 가졌다"는 것 등의 불만이 추가로 나오면서 이 목사와 장로들의 갈등은 커져갔다. 이후 장로들은 이 목사가 장로들과의 약속을 이행치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이병희 목사를 해임하기로 결의했고, 그 결의안을 이병희 목사에게 건넸다. 새로운 목회지 개척에 성의껏 협조하겠다는 조건과, 자원 사직서를 제출할 경우 해임을 사직으로 대체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 목사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동양선교교회 일부 교인들과 함께 라성세계복음교회를 개척했다.

박광철 목사, '내게 맞지 않는 옷인 것 같아서'

1993년 이병희 목사를 이어 박광철 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박 목사도 당시 장로들과 임동선 원로목사의 적극적인 청빙 요청에 의해 부임했다. 하지만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갈등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부흥회에서 소설가 김성일 장로가 한 강연 내용이 시비의 원인이었다. 집회 이후 "김성일 장로가 예수님의 신성을 왜곡하고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고 일부 교인들이 주장했고, 박 목사 측은 일부 교인들이 순수하지 못한 동기를 가지고 목사를 비난하고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논란이 확산됐다.

이것뿐이 아니었다. 당시 5명의 장로들은 “박광철 목사가 지도력이 없고, 법을 안 지키고, 거짓말을 한다”며 박 목사를 반대했다. 사택 비용 중에서 500불을 교회에 반납하지 않았고, 가스 카드(자동차 급유 카드)를 아내에게 발급했고, 목회 활동비 지출 근거를 밝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박 목사 측은 "그들의 주장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재판을 통해 모두 밝혀졌다"며 5인 장로의 주장을 반박했다.

갈등은 갈 데까지 갔다. 96년 12월 공동의회를 열고 박광철 목사 유임투표와 시무장로 시무투표를 실시했다. 박 목사는 재신임을 얻고, 박 목사를 반대했던 장로 6명(5인 장로 포함)은 장로직을 박탈당했다. 장로 5인은 박광철 목사, 임동선 원로목사, 일부 장로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걸었다. 5인 장로가 중간에 법정 싸움을 포기하면서 소송은 유야무야됐다.

   
 
  ▲ 박광철 목사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또다시 갈등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부흥회에서 소설가 김성일 장로가 한 강연 내용이 시비의 원인이었다. 사진은 당시 지역 신문에 난 관련 기사.  
 
이때는 원로목사가 노골적으로 나서서 박 목사 손을 들어주었다. 임동선 원로목사가 공동의회 사회를 보았으며, 조사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아 박 목사를 적극 지지하면서 '5인 장로'를 출교하는 데 앞장섰다. 재판에서는 임 목사의 아들이 박 목사 측 변호사를 맡기도 했다.

그렇게 교회 문제가 종결되는가 싶었는데, 또 다시 당회 내에 박 목사를 반대하는 그룹이 생기면서 불화가 일었다. 게다가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박 목사는 98년 8월에 돌연 사표를 냈다.

원로목사 측근 중 한 명은 "동양선교교회가 선교 지향적인 교회인데 박 목사가 선교에 소극적이라고 임 목사가 느꼈던 것 같고, 창립기념일 때 행사 하루 전에 행정목사를 통해 순서를 알려준 것 때문에 임 목사가 많이 섭섭했던 것 같다"며 임 목사와 박 목사의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한 배경을 설명했다.

박 목사는 기자를 만났지만 당시 논란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랜 교회 분쟁으로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컸다. 동양선교교회 담임목사라는 옷이 내게 맞지 않은 것 같더라. 옷을 줄이던지 내가 살을 찌우던지 해야 하는데, 내겐 둘 다 어려웠다. 장로들이나 원로목사가 사퇴하도록 직접적으로 압박한 것은 아니다"고 대답했다.

좋지 않은 패턴 반복되는 것 vs. 담임목사와 당회의 갈등일 뿐

박광철 목사에 이어 강준민 목사가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은 2001년이다. 교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1,900여 명에서 3,900여 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강 목사 역시 부임한 지 4년 만에 분쟁에 휩싸였다. 강 목사를 비롯한 당회원 일부가 당회 결의를 얻기 전에 주차장 부지를 매입하려고 계약서에 서명했던 일로 당회 내부에서 논란이 일면서 문제가 촉발됐다.

갈등이 전면에 부각된 것은 2006년 10월, 강준민 목사가 돌연 사의를 표명하면서다. 이제는 교인들도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강 목사의 사의 표명은 교인들로 하여금 장로들에 대한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강 목사를 지지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강 목사는 한 달 뒤에 열린 공동회의에서 원로목사와 90%라는 교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교인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원로목사의 지원을 받아 힘을 받은 강 목사는 빠르게 교회 시스템을 바꿨다. 당회를 해산하고 운영위원회 체제로 나갔다. 동시에 편 가르기 설교를 통해 자신을 반대하는 교인들을 공격하고 지지하는 교인들의 결속력을 다졌다. 강 목사를 반대하던 장로들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강 목사가 부임한 이후부터 이단 문제가 불거지기 전인 올해 중순까지 원로목사는 강 목사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런데 갑자기 임 목사가 올해 8월 강 목사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단 침투 문제가 불거진 시점과 맞물린다. 임 목사는 "강 목사가 교회를 위해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고, “강 목사가 이단인 레마선교회 출신 사역자를 감싸고 돈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했다.

하지만 원로목사의 사퇴 촉구 발언에 대해 강 목사 지지자들은 '벌써 세 번째' 일어나는 점을 강조하며 임 목사를 겨냥했다. 임 목사가 이단 문제를 구실로 강 목사를 내보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동양선교교회가 두 번에 걸쳐서 담임목사를 잃어버렸고, 지금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 목사 이전에 동양선교교회 담임이었던 두 명의 목회자가 사임하게 된 배경에는 임동선 원로목사가 있었고, 지금도 그런 영향이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병희 목사와 박광철 목사의 경우도 신학 검증 혹은 이단 시비로 압박했고, 이단 침투를 이유로 강준민 목사의 사퇴를 요구하는 것도 과거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임동선 원로목사가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갈등의 고비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임 목사의 판단력이 흐려진다며, 임 목사의 존재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임 목사 측은 "강 목사를 집요하게 반대했지만 (임 목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기자회견 한 달 전까지도 강 목사를 100%로 지지했었다"며 측근에 의해 이용당했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또 "임 목사가 자신을 얼마나 지지했는지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이용했으면서, 이제 와서 '내쫓으려 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병희 목사 때부터 시무장로였던 한 장로는 "지금껏(이병희 목사부터 강준민 목사까지) 1차적으로 장로들과 목사 간에 갈등이었다. 교회가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을 때 중재를 위해서 원로목사가 조언했을 뿐 간섭하거나 몰아내려고 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병희 목사의 경우는 당회가 담임목사의 사임을 결의했고, 박광철 목사 때는 임 목사가 철저히 목사의 편을 들어줬고, 강 목사가 부임하기 전에는 종신제였던 장로직은 3년 임기제로 바꾸면서까지 담임목사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임동선 목사가 강준민 목사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강 목사 측도 반박 기자회견을 열고 난 다음 교인 숫자가 곤두박질쳤다. 약 400명 정도가 예배에 출석하지 않았다. 끊이지 않는 교회의 혼란스러움에 진저리를 친 교인들이 떠난 것이다. 원로목사의 발언 이후 한 달이 지나면서 교인 숫자는 서서히 회복되고, 교회 분위기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폭탄이 다시 터질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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