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지 마라, 그리고 아이 낳지 마라
결혼하지 마라, 그리고 아이 낳지 마라
  • 양국주
  • 승인 2009.01.28 12: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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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빈민 운동가의 병상에서 쓰는 육필 일기

기독교 빈민 운동의 대부가 누워 있는 병상에서 새해를 맞으며 이 글을 쓴다. 이 어른은 현재 심각한 뇌 질환을 앓고 있다. 선택의 여지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생사의 마지막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고 있다.

뇌백질 손상을 입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인생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운 기독도의 자화상을 본다. 그러면서 힘껏 움켜 쥔 어른의 다부진 손끝에서 삶에 대한 마지막 절규도 느껴진다. 평생을 빈자(貧者)의 편에 서서 이들과 더불어 살아온 어른의 이름 석 자를 굳이 밝히지 않는 소이는 모든 인생은 하늘의 판단을 받기 전에는 결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탓이다.

필자가 이 어른을 만난 것은 40여 년 전의 일이다. 도시 산업 선교와 빈민 운동가로 일했던 어른은 필자가 박정희에게 미운털이 박혀 강원도 최전방에서 문제 사병으로 24시간 감시받던 시절, 같은 시기에 군목으로 계셨다. 그 무렵 갓 서른을 넘긴 목사님은 내게 '하늘을 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무언의 힘을 가진 분이었다.

군부는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돕기 위해 유신헌법에 대한 몰표 지지 행각을 벌였다. 목사님의 섬기던 부대 교회에서 사단장 임석 하에 단 한 표라도 이탈표가 나올 경우 해당 지휘관은 옷을 벗기고 군법에 회부하겠다는 서슬 시퍼런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만용이었겠지만 필자와 목사님이 부표를 던졌다. 정의에 민감한 양심수로 살려고 했던 나름의 안간힘이었다.

목사님은 제대 후 좋은 교회의 청빙을 뿌리치고 하월곡동 달동네 빈민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밤이면 포장마차를 끌며 부랑배들과 소외 계층을 만나 그들의 허물어진 심장을 아울렀다. 도시 빈민들의 삶에 다가서려는 그분의 집념은 끝이 없었고 어쩌다 돈이라도 생길 경우라면 결코 사사로이 챙기는 법이 없었다.

▲ 정의로운 아버지의 대의가 가족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십자가로 다가설 때 설사 그것이 제 아무리 옳은 일일지라도 자녀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가족은 언제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것이다.
부인과 어린 딸들, 가솔에 대한 배려보다 빈민들에 대한 연민이 항상 우선이었다. 목사님의 무책임(?)에는 언제나 사모님의 희생이 강요되었다. 식구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겠지만 목사님의 오른손은 언제나 약자의 몫이었다. 빈자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찼던 남편의 무심한 행동 등 이런저런 이유로 두 분은 갈라서게 되었다. 이혼한 지 몇 해 후 목사님을 존경하던 현재의 부인과 재혼을 하고 시골로 낙향했다. 무주 상오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대안 학교도 만들고 생태 운동도 벌렸다.

필자가 목사님의 현재 부인에게 물었다.
"존경하는 분과 만나 사시니 어떠신가요?"
"남다를 줄 알았더니 남자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요."

인생에 도통했던 소크라테스는 악처로 소문났던 부인 크산티페 덕에 인생의 철리를 깨닫기도 하였다. 크산티페는 남편에게 오줌 바가지를 퍼부었을 망정 이혼은 하지 않았다. 인류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어두운 가족사의 대표적인 인물로 마하트마 간디와 아들의 이야기가 회자되곤 한다. 간디 사후,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부도덕한 이야기가 비서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살아 있는 인도의 정신으로 추앙받던 간디를 아버지로 두었던 아들의 방종과 비극적 종말은 성자의 가정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식민 치하에서 백성의 고단한 삶에 다가서려던 간디의 결단은 가족들에게 늘 희생만이 강요되었다.

위대한 마하트마의 진실 뒤에 가려진 가족들의 그늘진 삶. 정의로운 아버지의 대의가 가족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의 십자가로 다가설 때 설사 그것이 제 아무리 옳은 일일지라도 자녀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가족은 언제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어두운 가족사, 그리고 지금 나는 지난해 만났던 다수의 선교사 자녀들이 복음 전도자로서 자랑스러워야 할 부모의 직업을 증오하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의 충격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조선 교회사에서 대부흥운동의 아버지로 떠받드는 길선주 목사의 어두운 가족사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사가 된 둘째 아들 길진경도 있지만 큰 아들과 셋째 아들 길진섭의 비극은 목회자의 한계에 대한 좋은 교훈이 된다.

길진섭은 일찍이 이중섭과 같은 시기에 동경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이후 서울대학 교수로 봉직하다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어 자진 월북한 이래 공산 정권의 첨병 노릇을 하다 죽었다. 얼핏 보면 혹자는 부모로서 자녀나 가족 관계에 있어 실패한 아버지를 말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실패한 아버지가 아닌 실패한 관계성을 말하려는 게 진정한 의도이다.

현재 병상에서 파리한 목숨을 연명하는 빈민 운동의 성자도 지난 15년 동안 가족들 특히 세 자녀와 생이별을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오죽했으면 옛 부인이 남편의 성자적 삶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녀들에게 가르친 평생의 교훈이 "결혼을 하지 마라. 결혼을 하더라도 절대로 아이는 낳지 말라"는 것이었을까?

빈자의 친구, 이 시대의 흔치 않은 그리스도인으로 올곧은 삶을 살아오신 성자에게 필요한 마지막 자비는 생명의 연장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자녀들과 갈라섰던 마음의 장벽도 벗겨졌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지키는 자녀들이 아버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은 마지막 유언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본 자는 원수마저 사랑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 마지막 입을 열어 '사랑'을 말해야 성속도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사랑하는 내 딸들아, 그동안 얼마나 너희를 그리워하며 사랑했는지…. 나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너희를 사랑한다"

주여, 빈자의 삶을 살았던 주의 사람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아비의 음성을 그리워했던 딸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주소서!

양국주 / 열방을섬기는사람들 국제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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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ra 2009-01-30 12:32:44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여 미혹함으로 일어난 표상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