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정말 궁금해
나도 정말 궁금해
  • 길벗
  • 승인 2014.08.1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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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이 책의 영어 제목은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캔자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로,  1990년대 이전까지는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미국 중부의 캔자스 주- 농업이 주산업이고 대체적으로 소득이 떨어지는- 가 지금은 어떻게 공화당의 텃밭이 되었는지를 저널리스트인 토마스 프랭크가 예리하게 분석한 책이다. (김병순 역, 칼라파고스, 2012년)

미국이나, 미국식 정치제도의 충직한 견습생인 한국 모두 보수 진보의 양당제도를 기초로 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진보를 대표하는 야당(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미국의 민주당 역할을 하는 당)이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까닭에  여러 진보 정당이 명멸을 거듭해 왔지만 기본적으로는 양당 제도의 틀안에 있다. 보수당인 공화당(새누리당)은   공화주의의 시발이 그랬듯이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한다. 그래서 공동체가 바로 서기 위해 개인의 양보를 요구하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양보란 조금만 참으면 양보가 이득이 된다는 청사진을 기초로 한다. 이른바 낙수효과로 기업들에게 규제철폐와 같은 좋은 기업환경을 만들어 주면 기업 소득이 증대되고 결국은 그 돈이 물떨어지듯 서민의 가계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이다. 이 책에서는 낙수효과의 허구성을 캔자스에서 있었던 부동산세 감세의 경우를 들어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짐룬(캔자스 주 공화당 하원의원)은 레이건 이전의 미국 경제정책을 소련의 정책과 비교하고 부자들의 감세를 지지했다. 부자들은 이미 사회 발전에 초인적인 기여를 계속했기 떼문에 그에 따른 격려가 필요하다느 논리였다. 그는 부동산세가 가난한 사람들을 더 어렵게 한다는 거짓 이유를 내세우며 부동산세를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공화당의 부동산세 폐지 추진은 대게 불경기에 소농을 돕기 위한 정책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세금 폐지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부자들이었다. (중략)  당신은 그의 주장들을 하나씩 대조하며 열거할 수 있다. 룬의 열렬한 기독교 신앙은 내가 아는 한, 대기업과 관련된 어떠한 의제에도 벗어난 적이 없다. (97쪽)

노무현 대통령 시절 추진했던 종합 부동산세가 이러저리 뜯겨 누더기가 된 것을 생각나게 하는 에피소드다.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부과했던 종합 부동산세가 부동산 거부들의 반대에 직면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이익이 침해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합 부동산세의 가장 큰 저항세력은 종합 부동산세의 과세를 받지 않는 강남의 대형 아파트 소유주들이었다. 가족이 가지고 있는 부동산을 모두 종합해 과세하겠다는 종합 부동산세의 취지는 강남에 아파트를 한 채 소유한 대학 출신의 지식인들에게 조차 큰 아파트를 갖고 있으면 무조건 ‘세금 폭탄’을 맞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런 상황을 보면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캔자스 주의  농부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는 것은 오히려 순진해 보인다.

여기서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대기업의 의제가 같다는 것이다. 캔자스 주의 보수적 기독교 신앙은 공화당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고 실제로 부자 중심의 정책이 국가 전체를 이롭게 한다는 생각에 따라 가난한 농부들은 기꺼이 그들의 삶을 희생한다.

저자의 “무엇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은 오늘날 미국인의 정치적 삶이 어떤 상황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10쪽)라는 말은 한국 상황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인들 조차 단기적 투자를 하고 있다

개인의 삶을  우선시 하겠다는 야당(미국 민주당 같은)의 주장은 영 미덥지 못하다. 조금 더 세금을 납세하면 부동산이 안정되고,  복지혜텍이 늘어나게 되는데 대중들은 그것을 참지 못한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위해서는 헌금이라는 희생을 잘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사회의 장기적 투자는 외면한다. 이렇게 보면 결국 헌금을 하는 것은 좋은 신앙의 표현이고, 그것이 종말의 때에 보상받는다는 전통적인 응보 사상도 아닌 것 같다. 장기적 안정을 위한 지금의 희생을 꺼려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헌금을 잘하는 것도 결국은 헌금 역시 (보상이라는)장기적 투자가 아니라 지금 당장 복받기 위한(남편의 진급, 보유한 부동산 가격의 급등, 자녀들의 진학) 단기적 투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 진다.

지난 7월 30일 한국에서 있었던 재보선 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했다. 세월호와 같은 호재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힘 한 번 쓰지 못했다. 의제를 제시하지 못한 야당의 무능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동작구에 출마했던 나경원 의원의 동작구를 강남 4구에 포함시키겠다는 성격의 공약은 유권자들에게 그냥 먹혀 들어갔다. 땅은 분명 강남인데 서초구나 강남구와는 다른 강북적 이미지를 갖고 사는 동작구 주민들을 강남 사람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이런 공약 앞에 세월호 비극에서 돌아보았던 가치의 문제, 진보 교육감을 뽑았던 한국 교육에 대한 불만 등의 수명이 채 두  달을 가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책에 따르면 캔자스는 미국 경제의 모든 면이 드러나는 곳이다. 캔자스시티 교외의 부자 동네는 사무직  인텔리 들이 살고, 위치토라는 외곽 지역에는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이 항공기 제작 공장에 다닌다.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도 있다.하지만 공화당 정권의  규제 철폐와 민영화로 농촌 인구는 감소하고 소도시 해체와 대도시 침체기를 겪는데 부자들은 거대한 저택안에서 화려한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이야 말로  공화당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다.

 2000년 미국에서 보수 대반동을 일으켰던 공화당의 주도 세력은 과거 전통적인 미국의 보수 중도파와 달리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기독교 우파였다. 이들은 캔사스 민중의 불만과 우려를 기독교 근본주의와 절묘하게 결합해 공격의 화살을 모두 자유주의 민주당과 지식인들에게 돌렸다. 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지역의 피폐함이 경제 구조와 그에 따른 계급 문제임에도 본질적인 문제는 피한 채 낙태와 동성애, 진화론, 총기 소지 문제와 같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화 현상에 민중의 분노를 집중시킨 것이다. 기독교 우파는 결코 경제 문제를 정치 의제로 내세우지 않는다.

결국은 가난한 사람들이 거짓 공약에 속아 투표하는 데에는 교회의 역할이 크다는 것이다. 캔자스 주에서 어느 선거를 앞두고 선거운동원들의 전화를 받으면 유권자들은 대개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한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를 다스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가 선거에 뽑히든지 걱정하지 않아요.”  선거일 몇 주 전에 위치토의 한 유권자는 AP통신사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되는게 더 낫기는 하죠.” (239쪽)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맘몬을 동시에 가장 잘 섬긴 사람은 캔자스주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 출신 가운데 하나인 샘 브라운백이다. 샘의 추종자들은 당신에게 샘이 워싱턴에서 얼마나 검소하게 생활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또 그가 인간 복제에 대해서 얼마나 단호하게 반대하는지, 그리고 제3세계 국가에서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열심히 지원하는지도 말할 것이다. (98쪽)

이 인용문을 재밌게 본 것은 샘이 인간복제를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입장에서 보자면 생명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복제 기술은 동성애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샘브라운 백의 입장은 일관성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 세력은 몇해전 황우석 사태에서 나타났듯이 황우석을 싸고 돌았다. 조용기 목사는  MBC PD 수첩의 폭로로 황박사의 허구성이 드러났을 때 그를  싸고 도는 설교를 했다. 희한하게도 동성애에는 치를 떠는 한국의 보수 기독교 세력은 복제에는 든든한 후원자다.

한국 보수 교회는 무슨 생각으로 살까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서 투표하는 것은  캔자스의 일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솔직히  덜 궁금하다. 이제는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에는 없는 독특한 현상이 우리에게 있다.  오래 전 일이기는 하지만 왜 한국의 보수 교회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복제라는 기독교 윤리에 역행하는 연구를 감싸고 돌았는지는 정말 궁금하다.  보수하면 국가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데 한국의 보수 기독교는 왜 친일파를 싸고 도는지는 더 궁금하다.

아! 진짜로 제일 궁금한 것이 있다.  왜 한국의 야당은 자꾸 우클릭을 못해서 안달인가? 유권자들이  우편향 정책에 관심이 있다면 더 확실한 보수 정당에 투표하지 굳이 야당에 투표할 일이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터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인기 없음이 좌클릭을 했기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한 번도 제대로 한 적도 없으면서.

교회도 다르지 않다. ‘성공’한 대형교회를 벤치 마킹함으로써 목회의 성공을 꿈꾸는 중소형 교회들은 대형교회 프로그램의 따라쟁이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그런 프로그램이 내 신앙취향에 맞는다면 나부터도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게 될 중소형 교회보다는 더 세련된 대형교회에 다니겠다. 그런데 중소형 교회들은 언젠가 해뜰날이 오겠지 하며 죽자사자 따라한다. 자신의 독특한 목회 영역을 개발하지 않고 이루어 질 수 없는 성공에만 목맨 이들을 보면 정치 영역에서 궁금증은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길벗 / <뉴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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