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의 망언... “나는 영적 아버지다!”
목사의 망언... “나는 영적 아버지다!”
  • 강만원
  • 승인 2016.07.20 00:1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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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원 (<미주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한국교회의 왜곡된 사제주의로서 이른바 ‘목사 성직주의’와 치명적인 교만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망언이 아마 ‘영적 아버지’라는 이름일 것이다. 이미 오래 된 일이지만,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진 어떤 중형교회에서 새로이 장로들을 선출했었다. 다섯 명의 신임 장로들을 임직한 직후에 담임목사는 의례히 그랬던 것처럼 즉각 당회를 열고는, 장로들의 군기를 잡았다.

“교회에서 당회장은 영적 아버지다. 교양 있는 가정에서 자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복종하듯이, 아니 그 이상으로 신임 장로들은 담임목사인 나를 영적 아버지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회에 영적인 위계질서가 있어야 하며, 질서가 있는 교회라야 하나님의 정의가 넘치며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다. 영적 아버지인 담임목사를 높이 섬기는 것이 장로의 책임이며 의무다.”

감히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신임 장로들 가운데 한 장로가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담임목사가 신임 장로들과 상견례를 겸한 첫 당회라서 유난히 질서를 강조했으리라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불편한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그런데, 지금까지 장로들이 그랬듯이 그저 ‘똘마니’처럼 졸졸 따를 줄 알았던 신임장로의 태도에서 어딘지 모르게 뻑뻑한 분위기를 감지한 담임목사는 마음을 다잡고는 연거푸 ‘군기 당회’를 열었다. 계속해서 당회장인 자신이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라고 강조하며...

세 번째 당회가 열리는 날, 마침내 그 장로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목사의 주장에 반기를 들었다.

“너희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마23:9)

장로는 이 구절이, “설령 목사라 해도 ‘땅에 있는 자’에게 영적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라는 뜻이 아니냐고 목사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목사는 그런 질문이 나오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전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장로를 엄히 꾸짖었다.

 

“어떻게 장로쯤 돼서 ‘영적 아버지’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성경의 한 구절만 알고, 더욱 중요한 다른 구절들은 모르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자신이 마치 사도 바울인 양, 목사는 장로들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성경을 펼쳐들고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후서를 거침없이 읽는다.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고전4:17)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딤전2:2)

한국교회에서 목사와 논쟁해서 이길 수 있는 장로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여전히 미덥지 않았음에도 성경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장로로서는 성경구절을 조목조목 들이대며 성경적인(?) 주장을 펼치는 목사와 더 이상 맞설 수가 없었다.

담임목사는 성경에 기록된 바울과 디모데의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영적인 부자관계’라고 자신만만하게 설명했지만, 주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는 구절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바울과 디모데의 경우처럼 하나님 외에도 실제로 영적인 아버지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땅에 있는 어떤 자에게도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인가?

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독자인 우리는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두 구절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야 한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경을 읽는 자의 자의적인 해석에 오류가 있을 뿐 ‘말씀’에 결코 모순이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형제들 사이에서 어떤 자라도 – 설령 사도라 할지라도 - 감히 영적인 권위를 과시하면서 스스로 ‘높은 자’가 되려 하지 말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너희는 다 같은 형제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즉,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뿐이다. 너희는 다 같은 영적인 형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특별히 우월한 존재로서 영적인 아버지가 있을 수 없다”라는 명백한 가르침이다. 반면에 노년의 바울이 젊은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로서 특별한 영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믿음이 부족한 ‘어떤’ 신자에게 영적 아버지의 우월한 지위를 강요한 것이 아니다. 우선 바울은 디모데에게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이미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서 지도자로 존경받는 디모데에게 아버지 같은 특별한 애정을 보인 것이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행16:2).

그러나 바울은 다만 디모데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나아가 바울이 ‘아들 디모데야’(딤전1:18)라며 특별히 다정하게 부른 이유를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바울과 디모데의 어머니, 그리고 외조모와의 개인적인 친분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 “이 믿음은 네 외조모 로니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1:5).

바울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구절을 논거로 내세우면서 ‘영적 아버지’라는 특별한 지위를 목사에게까지 일반적으로 적용시키려면, 바울이 디모데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도한 초대교회의 모든 교인들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불렸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살펴보아도 바울은 디모데나 디도처럼 ‘나이 어린’ 제자 외에 어떤 교인에게도 ‘영적 아버지’로 자처하지 않았다.

요컨대 바울은 영적인 주종, 또는 상하관계에서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나이 어린 디모데에게 친밀한 이름으로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제부터는 물만 쓰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마셔라”(딤전5:23)

바울이 디모데에게 느낀 ‘아버지’의 친밀한 감정은, 병이 있는 디모데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는 주께서 엄히 금하셨던, ‘높아지려는 자’, ‘섬김을 받으려는 자’, ‘으뜸이 되려는 자’의 계급적인 의미가 아니다. 또한, 목사들이 교회의 위계질서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종종 내세우는 ‘영적 아버지와 아들의 상하관계’가 결코 아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주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주께로부터 특별한 영적권위를 부여받았다. 오직 하나님만이 지니신 ‘죄 사함’의 권세를 부여받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특별한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지만, 사도들은 한 순간도 신자들 앞에서 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자신에게 무릎 꿇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베드로 사도가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이튿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다가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그를 맞이하며 발 앞에 엎드려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세우며 이르되, ‘나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하며...”(행10:24-26)

반면에, 목사들이 스스로 ‘영적 아버지’라고 자처하는 의도는 전혀 다르다. 교인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목사 성직자’와 열등한 ‘평신도’를 제멋대로 차별하며,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목사라는 거창한(?) 직함에 스스로 현혹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목사들이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미국의 한인교회에서도 젊디젊은 목사가 원로 교인들 앞에서 ‘영적 아버지’ 행세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장소에 상관없이 유교적 가부장의식에 사로잡힌 한국 목사들의 교만이 곳곳에서 추태를 보이는 것이다. 젊디젊은 목사의 입에서 어른들을 모신 자리에서 감히, “목사인 나는 영적인 아버지이다. 아버지를 따르듯이 모든 성도는 나를 따르고, 내 말에 복종하라”라고 말할 정도라면, 그런 자는 이미 ‘온유와 겸손’의 섬김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30-40대의 젊은이가 60-70대의 어른들에게 “내가 당신들의 영적 아버지요!”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영적이든 육적이든 가당키나 한 일인가? 목사들은 ‘아버지’라는 소중한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지 말라. 세상의 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한 채 자식들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는 아름다운 이름이며, 하늘 아버지는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제물로 바치신 거룩한 이름이다.

‘영적 아버지’를 자처하는 목사들에게서 언제인들 ‘아버지’의 아름다운 희생을 본 적이 있었던가? 목사는 감히 바울에 빗댈 수 있는 사도도 아니거니와, 어떤 논리를 내세운들 목사는 ‘영적 아버지’가 아니다.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는 명령은 ‘땅에 있는 자’와 하늘에 계신 분을 어설피 혼동하지 말하는 것이며, 누구인들 ‘땅에 있는 자’를 감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양 ‘영적 아버지’라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육신의 아버지를 공경하되 “(영적)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다”라고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목사가 영적 아버지라고 자처하는 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엄연한 ‘신성모독’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사는 성도로서 주 안에서 동등한 영적 형제이며, 다른 형제들을 섬겨야 하는, ‘종 된 형제’가 목사의 정확한 자리다. 목사는 아버지가 아니다. 교회의 사역자인 목사를 형제로 사랑하며, 형제로 존중하라.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에 대해 배역하는 것이다.

강만원 / '아르케 처치' 대표,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저자, <루나의 예언> 역자, 종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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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여기저기 2016-07-20 21:55:28
말씀에 공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영분별 2016-07-20 13:10:33
옳은 말씀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택한 종이였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느라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족이 없는 관계로 항상 외로웠을 것으로 보여지며
그래서 나이어린 디모데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애틋하게 대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목사들처럼 권위의식을 갖고 자신을 영적 아비라 부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처럼 여기고 아들이라 부른 것입니다.
지금의 삯군들은 자신들이 상좌에 앉아 섬김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영적아비라 칭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그들은 쫓겨날 자들입니다.
감히 영적아버지라니!... 하나님 한 분외에 누가 영적 아버지겠습니까?
십자가로 날 낳아주신 하나님 외에 누가 날 낳았다는 말입니까?
자신들을 영적 아버지라는 삯군들은 예수께서 왜 자신들을 낮추라고 말씀하셨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마귀가 자신을 높이려다 마귀가 된 것을 모릅니다.
여기서 실컷 높임받으라고 하십시요.
겸손하지 못하고 높임받은 자들은 가장 낮은데로 떨어질 것입니다.

항상 잘못나가는 교회들을 일깨워 주시는 강만원님을 응원하며
이 글을 퍼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