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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원 한 장도 추궁, 시골마을 '민주 정치'에 놀랐다

"6만원 그 거 내년부터는 걷지 않는 거 워뗘?" 
"무슨 말씀이셔유? 그런 식으로 하면 기금 다 거덜 나고 말쥬." 
"두 분 말씀이 그러면, 지 생각인디 3만 원으로 낮차서 걷는 건 어떠까유?" 

지난해 12월 31일 오전 11시, 저희 동네 마을회관에서 연말 예산 결산 회의가 있었습니다. 2016년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예산의 틀을 짜는 모임이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최고 연장자는 89세의 옆집 할아버지였고, 연소자는 50대 중반인 이장님과 저였습니다. 나머지는 한두 분만 빼고는 최소 70세 이상일 것입니다. 성별로는 남자분이 대략 15명, 여자 분은 할머니들 중심으로 10분 정도 모였습니다. 

8년 전 이사 온 충남 공주의 시골 동네를 전 제2의 고향으로 여깁니다. 동네 분들이 모두 저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성격 탓도 있고 나이도 제일 어린 축이라 회의에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어르신들 말씀을 듣기만 했습니다. 

연말 예산 결산 회의는 제가 사는 동네만 하는 게 아닌 듯합니다. 전국적으로 엇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시골의 회의 모습, 어떻게들 상상하시는지요?

만 원 한 장까지, 마을 집행부 쓰임새 추궁

내가 사는 시골마을에서 민주주의 미래를 보다.ⓒ 픽사베이

저는 놀랍게도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를 저희 동네 시골 마을에서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집성촌입니다. 공식적으로 43가구가 적을 두고 있는데, 서너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가친척들입니다. 마을 회의에서 참가한 최고 연장자인 옆집 할아버지보다 10살 이상 어리지만 촌수로는 아저씨뻘도 적지 않습니다. 

혈연으로 얽히고설킨 자리지만 1시간여 이뤄진 회의에서 안건 하나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습니다. 단돈 1만~2만 원 지출도 꼼꼼히 따지고, 이사 감사 직책을 맡은 분들은 가능한 세세히 또 솔직히 답하더라고요. 

'(이분들) 청문회 TV중계 본 거 맞아?'

열띤 회의를 지켜보면서 순간 제 머리에 스친 건, 동네 어른분들이 국회의원 장차관보다 민주주의 실천에 대한 진정성 측면에서는 훨씬 앞섰다는 생각이었었습니다. 속된 말로 어영부영하면서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갈 수도 있는데, 만원 한 장까지 마을 집행부 등의 쓰임새를 추궁하는 모습에 살짝 놀랐습니다. 

지난 연말 '거룩하게' 전국을 밝힌 촛불로 아마 적잖은 시민들이 직접 민주주의의 힘을 체감했을 듯합니다. 그 촛불을 보면서 어디에 저런 힘이 응축돼 있다가 터져 나왔을까 의문이 있었는데, 마을 회의를 보면서 상당히 풀렸습니다. 

또 다른 놀라운 '발견'은 정치적 스펙트럼이었습니다. 정국이 정국이니만큼 자연스레 정치판도 화제에 올랐는데요. 마을회 감사 직책을 맡고 계신 노인 분께서는 거리낌 없이 현재 야권 후보자 중 가장 강성으로 지목되는 A후보가 돼야한다고 말하는 거였습니다. A후보는 충청도와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이에 대해 점잖은 반론도 뒤따랐고요. 눈치를 보아하니, 작금 언론에서 거론되는 후보 각각에 대해 마을 분 또한 각각의 호불호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나름의 논리도 있었습니다. 대북 '퍼주기'를 거론하며 보수적인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분이 가장 강경한 보수파 아닌가 싶었고요. 

집성촌, 혈연관계인데 왜 정치성향 다를까

시골에 살면서 세상사를 과학이라는 창문을 통해 보는 것이 취미인 저에겐 충청도에 사는 게 어쩌면 정치적으로는 행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충청도 특히 충남은 한국의 전통적인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아니겠습니까? 충남과 청주를 포함한 충북 일부 지역이 대선이든 총선이든 승부의 향배를 가르는데 매번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으니까요.

충청도는 지리적으로 남한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위아래로 좌우로 왕래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특히 제가 사는 충남 공주는 교통요지 중의 요지입니다. 저희 동네 집성촌의 경우 거슬러 올라가면 전라북도 김제 만경에 뿌리를 둔 성씨 마을입니다. 

과학, 그러니까 유전학에서는 정치도 '피 내림'의 영향을 받는다고 요즘에는 봅니다. 다소 과도하게 단순화하면, 보수냐 진보냐 하는 기질 그 자체를 타고 난다는 것입니다. 1979~1999년 무려 20년 동안이나 계속된 유명한 쌍둥이 연구 프로젝트가 미국에서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입양이 일찍이 활성화된 미국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가 각기 다른 집안으로 입양돼 자란 이들을 수백 쌍 추적 조사한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파생된 연구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쌍둥이가 각기 다른 집안으로 입양됐으니, 교육을 받는 정도도 달랐을 것이고, 양부모의 사고방식도 당연히 차이가 있었을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대한 태도, 정치적 지향점 이런 것들이 충격적일만큼 쌍둥이들은 비슷하다는 게 이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쌍둥이는 그 누구보다도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다는데 대해 이견은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쌍둥이들은 단순히 외모가 같은 걸까요? 유전학자들에 따르면, 유전자는 오롯이 외모만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성격은 물론이고 음악이나 체육 등을 잘하고 못하는 등의 소질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다면 저희 동네 같은 집성촌은 서로 혈연관계인데 왜 그렇듯 정치적 견해가 다양하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집성촌은 부계 중심이므로 모계는 서로 다른 점이 한 이유가 될 수 있고요. 또 하나는 개개인에 내포된 유전적 잠재성이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전쟁 때 형은 인민군에 동생은 국방군에 가담해서 집안이 풍비박산된 경우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또 아버지는 강경 보수인데 아들은 좌파 성향이 농후한 예는 지금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유전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할 가능성은 숫자 70조를 수만, 수억 만 번 곱해야 한 번 나올 정도로 낮다고 합니다. 이론상으로만 유전적으로 동일한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 뿐 실제적인 가능성은 0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전적으로는 얼마든지 진보적인 아버지 밑에서 보수적인 아들도 나올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물론 정치적 견해나 신조가 모조리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건 아니지요. 교육이나 각자의 특유한 경험도 당연히 상당한 영향을 미칩니다. 

당황스러운 최근 1~2개월 사이 여론 흐름

'정치는 생물'이라고 말했던 전직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정치가 생물이라는 말은 끊임없는 변화의 가능성이 정치에는 상존한다는 얘기이겠는데요. 과학적으로 말하면, 정치란 본래 상당부분이 유전 즉 생물학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충청도를 위한 변호는 결코 아닌데요. 사람 개개인의 정치적 신념은 예상 외로 잘 변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충청도를 가리켜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는다"는 식으로 폄훼하는 언사를 접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 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넓다고 봅니다. 한국 기준으로는 말 그대로 중도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이 많은 지역일 수도 있고요.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최근의 1~2개월 사이 여론의 흐름에 나름 당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적인 예가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와 주요 대선주자들에 대한 선호도입니다.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대통령 지지는 한때 4%까지 떨어진 적이 있습니다. 헌데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세력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대선주자 가운데는 지지도가 25% 안팎을 넘나드는 분도 있는 게 현실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기존 여권에서 갈라져 나온 정치세력이 정당별 가상 지지도 등에서 2위까지 치솟은 여론조사 결과도 있고요. 

뿌리를 같이 하는 인물들 혹은 집단에게 거의 같은 시기에 4%와 25%라는 전혀 다른 지지를 보내는 것은 얼핏 보면 모순된 민심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답은 결코 모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촛불 정국의 와중에도 유권자 대다수는 각자의 기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사는 조그만 시골 동네 마을 회의를 보고, 올해의 대선 정국을 예상하는 건 가당찮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가능성 높은 상황을 점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줄기를 잡고 들어가면 현 대통령과 같은 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대선주자가 승패에 관계없이 30%를 훨씬 넘는 득표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정치적 견해는 성격처럼 잘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수적인 분들은 여전히 보수적인 표를 행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동네 어른들의 표심은 진보에서 보수까지 매우 고르게 분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숫자로는 중도 근처가 가장 많은 듯 했고요. 진보와 보수 어느 한 쪽으로 강하게 기울지 않은, 즉 중도적 기질을 가진 분들이 결국 올해 대선을 좌우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올해 대선 결과 여부에 관계없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아주 어둡지 많은 않다는 게 이번 마을 회의에 참가해 얻은 개인적 수확이라면 수확이겠습니다. 저의 시골 이주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도시에 살면서 지켜본 우리 사회 민주주의 유전자의 결핍도 한 사유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시골마을에서 민주주의 미래를 보다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한국에 진보다운 진보는 정의당으로 대표되는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정의당 지지도의 외연은 넓게 봐야 10% 아니겠습니까. 좌우의 이런 불균형, 거기에 이런 불균형의 상당 부분이 시민들의 기질에서 비롯됐다면 낙담 밖에는 더 할게 없었거든요. 

시골 촌부의 시각에서 건강한 정치세력 분포는 두툼한 중도층을 중심으로 좌우가 균형을 이루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과학기술적' 관점에서는 생물이든 기계든 좌우가 균형을 이뤄야 최고의 효율을 발휘하는 건 상식이잖아요. 낱낱이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직관으로 봐도 그렇고요. 한데 한국이라는 큰 공동체는 좌우 균형은 크게 무너진 상태이고, 겨우 몸통(중도)으로 버티는 형국이니, 미래의 희망을 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마을 공용 경비 갹출을 두고 6만 원, 3만 원, 징수 유예 등 3가지로 나뉘어 열띤 토론을 벌인 건 사실 액수는 얼마 안 될지언정 작은 일이 아닙니다. 이 안건은 진보와 보수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 같은 사안인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공적 지출에 대한 주민 각자의 사고를 드러내 보인 케이스이거든요. 마을 회비 징수를 하지 않거나 최소화하고 마을 기금을 복지 등에 활용하느냐, 아니면 마을 기금을 최대한 살찌우는 방향으로 마을 재정을 운용하느냐는 보수와 진보가 첨예하게 시각을 달리하는 국가 세수와 재정 운용 논란과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저희 마을에서 결론은 어떻게 났느냐고요? 일단 올해는 마을 기금을 기존과 같이 6만 원 걷기로 했습니다. 그간 해오던 대로 하기로 결정했다는 측면에서 보수적지만, 공공 재원 확보에 방점을 찍었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사는 시골 마을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봤다면 지나치게 호들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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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newsm@news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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