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 5년 만에 교회 간판을 떼면서'
'개척 5년 만에 교회 간판을 떼면서'
  • 한재경
  • 승인 2011.09.14 10:53
  • 댓글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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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사람 2011-09-17 16:46:35
목회의 골 깊은 아픔속에서 울고있는 수많은 목사들의 눈물과 고통은
어쩌면 믿음너머 생명을 향한 주님의 손길이시리라 돌려 생각합니다.

지나가다 2011-09-17 12:17:18
꼭 목회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냥..평신도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도 되지 않나요? 그러다가 기회를 주시면 또 하시면 되죠..
수고많으셨습니다..하나님께서 또 다른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곤지암 2011-09-17 11:51:15
한목사님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저도 5년차 개척교회 목사입니다.그 마음을 십분이해합니다.건강추스리시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실 일을 소망하면 될것같습니다.

Man 2011-09-17 06:00:07
한 목사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며 저의 생각을 적어봅니다.

한 목사님은 죄책감과 실패라는 단어로 글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단어가 목사님의 머리에 떠오르는 이유부터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목회의 실패라는 것을 규정한 것은 누구입니까?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인지요? 죄책감이라는 느낌도 실패라고 결론지어진 결과에 따른 감정일뿐입니다.

예수는 목회에 성공했을까요? 현재의 기독교의 제도로 본다면 예수는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예수는 기껏 열 두명만 모아놓고 또 그 가운데 하나는 예수를 팔아먹어서 사형까지 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온 유대인들은 그를 비난하며 그에게 등을 돌렸죠.

예수는 실패자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말이죠.

한 목사님도 실패자입니다. 세상의 제도적 기독교의 관점으로 본다면 말이죠.

한 목사님은 스스로 성적표를 만들어서 자신의 성적을 적어 넣었습니다. 그 성적표를 보면 모두 F 학점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기준은 온전히 세상의 기준일 따름입니다. 한 목사님의 글 뒷 부분에서 성공지향주의에 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한 목사님은 그 기준을 따라 성적표를 만든 것입니다.

죄책감도 실패감도 그리고 초라한 성적표도 모두 세상의 조류에 휩쓸려 가는 변질된 기독교의 기준을 충실히 적용하면서 나타난 생각뿐이라는 것이죠.

초기 기독교는 목사님의 말처럼 유대교의 개혁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혁보다는 새로운 매력을 지니는 신흥종교를 만들었죠. 그리고 그 종교를 통해서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권력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거룩하게 보이고 신실하게 보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며 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하였지요.

무소불위의 권력을 보여주며 시대의 조류에 맞추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시대의 조류를 스스로 형성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시대가 흘러가면서 기독교는 본질과 가치를 변질시켰고 습득된 형질이 본질을 대체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루터도 카톨릭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그가 외친 개혁은 결국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출했습니다. 그 이후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공통분모로 지니고 있는 수 많은 종교를 만들어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진정한 예수의 정신이 품고 있는 본질을 찾기조차 어려운 상황속에서 헤매이고 있습니다.

예수는 기독교라고 불리우는 종교를 창시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념적 사상을 형성한 위대한 지도자의 이념은 틀을 만들어 사람들의 생각을 가두려고 하려는 의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도자를 추종하는 자들은 틀을 만들어 사람들을 구분하기를 좋아합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초기 정통주의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정통이라는 틀을 만들어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빈주의자들도 알미니안주의자들도 그들만의 틀을 만들어서 예수가 말하는 자유를 빼앗아갔습니다.

한 목사님도 그 희생양일 뿐입니다.

목사가 되어야 종교적 수준에 있어서 지극함을 증명받을 수 있는 틀을 만들었고 교인을 많이 모아야 예수의 가르침을 바로 따르는 은혜받은 성도라는 기준을 만들었고 일요일에는 교회라고 부르는 건물에 모여서 예배라는 형식에 참여해야 기독교인이라고 인정되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것을 가르친 적도 없고 오히려 이런 것들을 타파하라고 가르쳤지요.

예수가 말하지도 않은 것을 성경에 집어넣어 그것을 통하여 교세의 확장을 정당화시키기도 했고 예수가 말한 것을 비비꼬아서 자신들이 세워놓은 교리를 강요하며 종교적 폭력을 일삼은 것이 오늘 날의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런 틀 가운데에서 한 목사님은 자신의 신앙적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목사가 되었고 목사의 가치를 제도적 장치의 기준에 맞추어 평가하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성공이란 단어는 성경에는 없는 단어입니다. 성공이란 부질없는 것이고 흙으로 돌아갈 것을 많이 모으는 끝이 없고 어리석은 행위이며 성공이란 것은 상대적인 사고에 물든 자들의 평가 기준입니다.

이사야도 아모스도 말라기도 자신을 따르는 자를 한 사람도 거두지 못하고 살아갔습니다.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목을 베임 당하는 삶을 살았고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려다가 동료들에게 욕을 얻어 먹었습니다.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이름을 날린 자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외치는 자입니다. 그들이 외치는 목소리는 크고 쩌렁쩌렁할지는 몰라도 그들의 외침에 사람이 모이는 이유는 세상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미워했습니다. 예수를 바로 따르고 있다면, 그것이 목사든 교인이든 상관없이, 세상이 그 또한 미워할 것입니다. 그가 들고 있는 성적표는 초라한 F 학점의 성적표일 것이고 그의 족적은 실패라는 그림자만 드리우는 족적일 것입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따랐던 자들은 세상에서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예수가 갈릴리 바다의 주변만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처럼 그들도 세상의 중심에서 떨어져 소외된 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바다입니다. 파도에 따라 풍랑이 일기도 하고 때로는 잠잠하기도 하지만 이것을 벗어나는 일은 바다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미 바다라는 세상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도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바다라는 이 세상에서 마음을 떼어놓았기 때문에 바다의 풍랑이 아무리 거칠어도 그것을 염려할 아무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다의 파도가 거세지면서 그들은 흔들렸습니다. 바다와 같은 세상의 조류를 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갈릴리 바다에 떠 있는 배 위에 올라가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가 굳이 배 위에 오른 이유는 바다 같은 이 세상에서 떨어져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와 같은 존재가 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잠언에서 바다를 지나가는 배의 자취를 알 자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을 벗어나 살아간 자들을 기억하는 자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지요.

세상을 가리키고 있는 바다 속에서 본능만 가지고 살아가는 물고기 같은 존재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도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줄 때에 물고기의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던 것이죠.

창조주가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는 존재이니 이름을 지어주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은 세상을 섬길 힘이 없다고 자학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섬길 존재가 아니라 벗어날 존재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모였을 때에 그 모임을 에클레시아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런 이름을 얻은 곳은 세상과는 이미 동떨어진 삶을 사는 자들만이 모인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얻을 것을 위해 가이사가 있는 세상에서 육적인 수고는 하지만 그곳은 그들이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마음을 떼어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어떤 광풍이 일더라도 그들이 염려할 일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가 세상으로 보낸 제자들이 무엇을 가지고 세상을 갔는지 보십시요. 그들은 세상에서 필요한 신발 여러 켤레를 지니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는 이 세상에서 이미 마음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세상에 발을 떼려고 노력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이 세상과 분리하는 신발 한 켤레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 신발 한 켤레는 예수의 가르침이고 예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면 충분하기 때문에 다른 신발은 필요하지 않았지요. 세상을 살아가기에 세상에서 만든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예수는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헤어지고 닳아서 없어질 것이기에 세상의 길을 가다가 신이 닳게되면 세상과 분리되지 못하고 결국은 그 땅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은 이 세상을 어떤 신을 신고 가십니까? 그리고 목사님은 또 다른 신발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목사들과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브랜드 네임이 있는 신을 신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신발이 닳으면 새로운 신발로 갈아신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랐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이처럼 십자가를 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 십자가를 언제 내려 놓아야 할지에 대하여 아무 말을 하지 못합니다. 마치 평생을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예수는 그런 것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끝에 가면 내려 놓아야 하는 십자가를 교회에서는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지고 갈 때가 있는가 하면 내려 놓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서 그것을 땅에 박고 그 위에서 죽었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이 죽어야 할 곳에서 내려집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면 외친 첫마디는 자신을 부인하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외침을 십자가가의 죽음으로 증명하였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런 예수를 단번에 자신을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자신을 죽여야 할 곳에서는 내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을 제물로 하여 자신을 죽이는 산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더 이상 십자가는 필요한 것이 아니지요.

한 목사님은 이렇게 십자가를 등에서 내려놓고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는 산 제사를 드리셨습니까? 아니면 매일같이 울고 불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외침만 하셨습니까?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세상에는 크리스찬이라고 기독교 교인이라고 예수의 제자라고 혹은 성도라고 부르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등에 십자가를 지고 있지도 않고 십자가를 내려 놓고 자신을 제물로 하여 단번에 드리는 제사를 깨닫고 있지도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만 가득합니다.

이렇게 단번에 드리는 제사를 위해 내 안에 세워질 영적 성전이 필요한 것이고 그 제사의 제사장이 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제사장이 지녀야 할 것들을 배우고 가르치며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영적 성전을 쌓을 때에 세상의 철학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쌓게 되면 바벨탑이 벽돌과 진흙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쌓는 일과 같은 것이기에 그곳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너지는 성전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리고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전을 쌓을 때에 먼저 부정하지 않고 거룩함을 잃지 않은 손으로 쌓기 위해 먼저 마음의 할례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성령의 검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의 더러운 것들의 찌꺼기가 있는 부분을 도려내야 그것이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인은 이런 행위를 육적으로 행함으로 그 의미에 대하여 체험적인 습득이 여구되었지만 그것을 인간의 욕망으로 제도화시킴으로 인해서 그 의미는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것을 지적하며 신과 의를 버렸다고 말하고 또 율법을 페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렇게 완전케 되어야 할 율법의 가르침과 의미를 모조리 가두어 버리고 변질시켰습니다.

나를 드려야 할 제사가 헌금이라는 돈을 창조주에게 드린다고 가르치는가 하면 그것이 나의 마음의 정성을 보인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창조주는 이런 행위를 가증한 것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 이런 제사는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인간들은 이런 창조주의 분노를 무시했습니다.

창조주가 원하는 것은 부정함을 벗어나는 영적 제사입니다. 그것을 행하고 나야 정한 자로서 말씀의 돌로 성전을 쌓고 그 성전이 완성이 되면 내가 제사장이 되어서 대제사장인 예수를 본 받아 나를 제물삼아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이런 제사는 예수는 단번에 드리는 것이기에 한 번 드리고 나면 더 이상은 필요 없는 제사이고 따라서 그 이후로는 세상과는 떨어져서 사는 에클레시아를 마음에 세우고 살아가면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입고 안식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일요일에 모여서 에배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제사가 아닙니다. 인간들이 모인 곳이니 제도가 있을 수도 잇고 또 제도에 따라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모일 수도 있지만 그 모임에서는 복음에 대한 가르침과 배움이 전부인 것입니다.

인간은 각자의 삶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에게 세워질 영적 성전을 준비할 뿐이고 그것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 자신이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의 주체가 됨과 동시에 그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정결함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에는 제법이 있습니다. 이런 제법 또한 복음을 통하여 배워서 제대로 된 제사를 지내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본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고 육적으로 모여서 성경에는 있지도 않은 목사제도에 의해 목사가 된 사람들의 설교를 듣고 돈을 봉투에 넣어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자신의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자신을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는 증거를 삼습니다.

그런데 신은 이런 것들을 가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십니까?

교회는 단지 입으로만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잡다한 사람들의 모임은 정말로 아닙니다.

세상에 기독교인은 허다합니다. 그러나 한 목사님의 말처럼 깨어있는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는 찾기가 매우 힙듭니다. 더군다나 십자가를 지고서 세상을 가는 고난의 삶을 사는 기독교인도 찾을 수 없거니와 그것이 내려질 자리에서 자신을 죽이는 영적 제사를 드릴 준비를 하는 사람은 더 더욱 찾기 힘듭니다.

그들이 아무리 이런 것을 깨닫고 영적 성전을 쌓으려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제대로 된 성전을 쌓을 수 있는 말씀의 돌이 없습니다. 그들이 배운 말씀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돌이 아니라 썩어서 흙으로 돌아갈 인간들의 생각과 철학과 신학적 교리로 만들어진 벽돌이기 때문입니다.

한 목사님은 진정으로 돌로 성전을 쌓고 자신을 단번에 드려 제사를 지내는 그런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라는 것은 세상의 종교적 제도에 의해 세원진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라는 호칭은 잊고 먼저 예수의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찾으시고 그 본질을 통해 인간이 지녀야 할 세상에 대한 태도를 발견하시면서 자신의 제사를 준비하십시요.

저도 이런 것을 깨닫고 준비하고 잇지만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협착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은 문자 그대로 외롭고 어려운 길입니다. 끊임없이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걸음이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느끼며 좌절과 고통을 느끼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만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메시아로서의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그의 가르침대로 인생의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는 경배하고 높일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와서 가장 낮은 삶을 살다가 가장 낮은 곳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런 예수를 만나기 위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은 내 자신이 예수가 있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다다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목사로서 유명해지고 기독교의 지도자로 역사에 이름을 날리는 일은 결국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의 높은 곳에 걸어 놓은 오력만 하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혹 다른 제자들도 그들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높아진 것은 종교적 권위와 세력을 드높이려던 자들의 소행일 뿐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짝을 간다고 찬송을 하고 나서는 세상에서 이름을 높이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다니며 사람들을 모은다고 해도 그것은 예수가 말한대로 예수 없이 모으는 자의 행동이고 따라서 그것은 모으는 것이 아니라 헤치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잊지 마십시요.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녕 예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져 간 사람들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있었다면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우주소년 2011-09-17 05:59:45
한 목사님의 고백이 진한 아픔으로 닥아옵니다. 그러나 용기-홈도-광훈 이런 분들의 탈색된 광란으로부터 느끼는 아픔과는 전혀 다른 아픔입니다. 아픔이 되려 기쁨이 되고, 그 아픔 속에 희망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말하였듯 '가장 용감하거나 때로 무모한 자만이 목사가 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목사님 같이 순수한 분이 있다는게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모쪼록 지금 같은 고백이 주님 오실 때까지 변치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새부대"에 대한 담론은 바로 목사님같은 '남은자'들에 의해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래 '목사'라는 어떤 분이 '사업이나 하며 인생 멋지게 살다 주님 부르심 받으라'는 악담을 하는 분들은, 욥의 시대에도 있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