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회복 운동은 그릇된 사상
이스라엘 회복 운동은 그릇된 사상
  • 정이철
  • 승인 2012.02.16 03:42
  •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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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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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점 2012-02-23 06:41:18
얼마 전 1월29일자 김하중 장로에 대한 글을 쓴 정이철 목사님은 분명히 캔톤한인교회로 되어 있었는데, 여기는 반석장로교회 목사로 되어 있네요. 그럼 다른 분인가요? 아니면 교회 이름을 바꾸신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교회를 그 며칠 사이에 옮기신 건가요? 만일 교회를 옮기신 거라면, 목사 경험상 교회를 옮기자마자 이런 글을 쓸 시간이나 여력이 없을 텐데, 대단하신 것 같네요. 그리고 정 목사님은 그냥 봐도 온누리교회 쪽을 대단히 싫어하시는 것이 쉽게 느껴집니다. 홍정길 목사님의 자세를 배우시면 어떨지요? "기윤실, 우리 자신부터 윤리 점검하자."라고 하셨더군요. 그럼 목사님은 "신학의 문제, 우리 자신부터 신학 점검하자."

오제근 2012-02-27 21:11:39
구약의 절기는 단순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재림의 그림자가 아닙니다. 그림자이자 실체입니다. 구약의 절기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진리를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복음은 외워서 믿는 것이 아니라(성경에 있는 '문자그대로' 들음에서 믿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절기의 회복과 이해는 성경 전체에 대한 맥락을 파악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진리를 변증하고 확증하여 '믿음'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실체입니다. 구약과 신약 속에 서로 얽혀있는 말씀과 진리를 풀어 주는 지름길이 바로 절기의 이해입니다.

나그네 2012-03-07 11:54:30
새대주의도 말고 개혁주의도 말고 오직 성경주의로 가면 안될까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니요...그렇다면 개혁주의를 모르는 사람들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세대를 나눈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게 아닌데요...정말 아리송합니다. 만약에 이북에서 성경만 가지고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휴거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서 읽어야 할까요? 모근게 상징이라면 심각해지네요...참으로 안타깝습니다.

abcd 2012-03-08 00:26:45
절기라는 말은 appointed time이라는 말인데요, 정해진시간 또는 예정된 시간을 이야기 하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주신 절기가 7절기가 있지요 봄에 지키는 4절기는 이미 완벽하게 성취가 되었고 나머지 세절기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시간에 성취가 될텐데요... 이것도 상징으로 보시나요 그렇다면 이미 이루어진 절기들은 어떻게 해석이 되는가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글, 즉 문자 그대로 보면 되지요. 해석이 필요한건 해석을 달아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ㅂㅂㅂ 2012-03-12 20:55:03
'승리합시다' 님

현미경을 가지고 달을 볼 수 있나요?

님이 제가 남긴 글이 핵심을 잘 짚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님의 시각으로는 제가 말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거시적인 시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보통 댓글에서 본 기사의 내용에 담긴 상세한 부분에 대하여 언급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기독교 전체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 이 기사만 가지고 논할 때에 복음주의 신학의 기저내에서는 세대주의적 운동인 이스라엘 회복 운동이 당연히 틀린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또 님이 요약한 내용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려는 것은 본 기사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 암묵적인 전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세대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기준이 되는 복음주의적 성경의 해석이 과연 정당하고 절대적인 기준인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복음주의 기독교의 목사에게는 그것이 기준이 되겠죠. 그러나 한발 뒤로 물러나서 본다면 이 세상에는 복음주의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독교의 종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글을 종교학자나 사회작자가 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복고주의적 근본주의 기독교의 부활 대한 논란일뿐이라고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복 운동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 운동의 핵심이 되는 신사도 운동이라는 것부터 봅시다.

그들은 복음주의자들이 아닌가요? 그들도 복음주의자입니다. 복음주의의 핵심적 사상은 공유하지만 일부 실천 사항이나 행동적 양식을 놓고 구체적인 방법을 도식화 하는 과정에 있어서 다른 복음주의자들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핵심적 주장인 사도의 권위의 부활이라는 내용을 검토해 봅시다. 이런 개념이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일까요?

절대 아니죠.

초기의 기독교 정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위와 자신들이 위치하는 기독교 분파의 정통성을 내세우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부분이 바로 사도적 권위의 전승입니다. 로마 카톨릭이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하는 유일한 기독교적 종파라는 기치를 내세운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고 정경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위경과 정경을 구분하는 기준을 사도적 권위성이라는 기준으로 확립시켰던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신조(creed)를 만들면서도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는 근거 없는 근거를 내세운 것을 보아도 또한 이런 사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사도적 전승이라는 개념이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에 현대에 와서 희미해진 상징의 부활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복음주의에서는 이와 유사한 것을 추구한 적이 없냐는 말입니다.

이미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사도적 권위에 대하여는 눈꼽만한 의심도 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아놓았죠.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을 보면 바울이나 베드로나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서 바르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경우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도 예수를 세번이나 부인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복음주의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해석을 하지요?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라는 식으로만 해석합니다. 사도적 권위의 희석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단지 사도적 권위를 보존하려는 태도 때문만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태도는 복음주를 잉태하고 복음주의 뿌리에 깊숙히 박혀있는 근본주의적 성경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적 권위에 조금이라도 흠이 나게되면 근본주의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성경무오설은 매우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쓴 글로 신약은 구성되어있는데 사도들에게도 인간적인 실수를 할 수 있는 가증성을 열어놓게 되면 문제는 겉잡을 수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근본주의 기독교의 기초적 모토인 성경무오설이나 동정녀 잉태설 그리고 육적 부활과 같은 테넷은 칼빈주의의 5대 교리와 유사하게 각각의 테넷이 독립적이지 못합니다. 따라서 한 가지가 무너지게 되면 모두가 무너지게 됩니다.

저는 이런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이 기사를 읽으면서 복음주의 내의 여러가지 신사도 운동 중의 하나로서 이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이후로 미국의 개신교에 나타나는 근본주의와 그것이 잉태하여 변형된 복음주의 그리고 미국식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한국의 기독교의 지난 두 세기 동안의 기독교의 전반적인 역사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가 기독교의 절대적이고 가장 정통적이며 성경의 가르침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은채 바른 기독교의 정신을 추구하는 운동이자 기독교적 사상입니까?

절대 아니죠.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복음주의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빌리 그래함의 시대는 가고 이제는 복음주의 내에서도 다양한 기독교의 해석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신복음주의라는 이름이 들린지도 오래 전의 일이고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교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신학적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자들 가운데 미국에서 근본주의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영지주의적 부활이라는 분석을 내놓는 학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본 기사에서는 개혁주의를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개혁의 시조이자 주체였던 루터나 칼빈은 유대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지독한 반유대주의자였었습니다. 오죽하면 히틀러가 성경도 필요 없고 루터만 있으면 된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개혁주의를 받아들인 18세기의 개신교에서 세대주의적인 성경의 해석이 나타나고 그것이 사라지는가 싶더니만 다시 이 시대에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터지나요?

미국의 기독교적 사상에 충실한 한국의 개신교는 복고주의적 사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순환이 기독교는 예외가 되나요?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이런 시각을 가지고 기독교에 대하여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지고 보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저의 의도를 이해할 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수를 위한 댓글이 아니라 소수를 위한 댓글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신교의 상황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 시기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느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시각을 볼 때에는 이렇게 종교적 혼란이 급증한다는 것은 인간성의 상실과 함께 허무주의적 사회상이 만연한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명의 발달이 인간성을 앗아간 이 시대, 그리고 일, 이차 대전을 지나 냉전 시대마저 종식되어 오직 극도의 경쟁력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이 시대나 이 천년 전 로마가 세계를 평정하고 제국주의의 건설이 각 개인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앗아가고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유대인들의 인간적 정체성에 대한 회의감을 불러 일으키던 그 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사도 운동이나 이스라엘 회복운 동 같은 것은 현상적인 노출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시시콜콜한 현상만 현미경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지 말고 그 현상을 표출하는 기저의 사상과 역사의 순환적 발동력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라는 의도를 전달하려는 것이 저의 댓글입니다.

신사도 운동에 관련해 몇 개의 글을 쓰면서 비난을 서슴지 않는 정이철 목사의 시각도 절대로 복음주의의 전투사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정 목사가 손가락질 하고 있는 온누리교회는 하용조 목사의 신학적 사상이 그 토양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용조 목사는 한국에서 복음주의의 선구자 역할 하던 복음주의 사인방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온누리교회에서 그것도 장로이자 지성인이라고 불릴만한 사람들이 이런 운동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준다고 봅니까?

같은 우물에서 먹고 자란 사람들의 기독교적 사상의 토양이 이토록 다른 방향의 기독교관을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복음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현상이 복음주의에서만 나타났습니까? 아닙니다.

칼빈주의에 반기를 들던 알미니우스도 칼빈의 수제자인 베자와 한 배를 타던 사람입니다. 분열의 역사의 시작이 17세기였을까요? 아닙니다. 기독교 초기부터 배를 갈아타는 역사는 여기 저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기독교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립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포용적이냐 아니면 배타적이냐의 두 갈래로 나뉜다는 사실뿐입니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배타적인 성향을 타고 났습니다. 지금 이 기사도 그런 배터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와는 다르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배운 것과는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배타성을 서슴없이 나타내는 기준은 언제나 자신의 생각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성경의 해석과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교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자신이 반대하는 쪽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일한 배타성의 원리에 의하여 상대방을 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양자 간의 차이란 단지 숫적 우세와 열세의 차이일 뿐입니다.

100년전만 해도 미국은 세대주의가 주된 개신교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죠.

이것을 달리 말한다면 지금 한국은 74년의 엑스포 이후에 복음주의가 점점 주류를 이루어 가고 있지만 앞으로 2-30년 뒤에는 지금의 세대주의자들처럼 복음주의는 그 영향력이 많이 누그러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절대적인 것이며 그런 것을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합니까?

기껏헤야 100년을 넘지 못하는 시대적 조류에 기독교를 묶으련느 것인지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세대주의. 개혁주의, 복음주의, 신복음주의, 근본주의....

예수가 이런 것들이 난무하는 세상을 예상하면서 천국을 말했을까요?

이 모든 이데올로기적 단어들이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단어입니까?

맞;막ㅇ,러 한마디만 하지요.

이 글을 쓴 정 목사도 자신의 신앙적 열정과 자신의 정체성의 가치를 가장 뚜렷하게 함축하는 자신의 종교성에 대한 방어를 위해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 그리고 그 이후에 기독교 역사에 나타나는 이단이라고 정죄받은 종파를 포함하는 많은 기독교의 종파들, 이 모든 자들 가운데 정 목사와는 달리 열정도 없고 단지 사리사욕과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서 분열의 역사를 서나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단이라고 불린 사람들 가운데 중세에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은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을 순교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현재 정통이라고 부르는 기독교의 주류에서는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을지라도 그런 순교를 무릅쓰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했던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은 모두 그릇된 열정이며 정 목사의 열정만 바른 열정일까요?

그리고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누가 만든 기준이며 그것이 영원히 옳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또 무엇인가요?

십 수년전만해도 한국의 개신교 역사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던 목사들에 대한 평가는 칭찬과 존경의 평가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는 조심스럽게 부정적인 면에 대한 평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남기고 그들이 가르친 것 또한 부정적이며 바르지 못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교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우리는 계속해서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까?

역사를 보면서 왜 역사가 남긴 교훈은 배우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제 댓글 마지막에 쓰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