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이 그리운 시절
김교신이 그리운 시절
  • 김명곤
  • 승인 2008.10.31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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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평신도 일지] 한국 교회의 존재론적 의미를 곰씹게 한 선각자

1980년 11월, 그때는 우리 땅이 군화발 앞에서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들 정도로 캄캄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계속되던 때였다.

5·18을 부끄럽게 비켜서고 난 직후, 스스로 중생한 기독교인을 자처하던 나는 '우리의 지도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땅에서 복음이, 크리스천이,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따위의 뒷북치기식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버릇처럼 청계천 고서점을 뒤적이다 누렇게 변한 김교신의 <느헤미야> 강해 단편을 우연히 발견해 읽으면서 탄성을 내질렀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이미 1970년대 중반 내공이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던 어느 노인들의 성서 연구 모임에 참석해 지나치듯 몇 차례 '김교신'이라는 이름을 주워듣고 있었다. 보석은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것인가. 도서실 구석에서 그의 글을 읽으며 벅찬 감동에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아니, 모두가 숨죽이고 살던 일제시대에, 더구나 평신도가 이런 강해서를 쓸 수 있었다니.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광화문의 어느 기독교 서점에서 막 나온 회색빛 표지의 <김교신 인물 평전>을 발견했다. 그때도 그 책을 손에 넣자마자 단숨에 읽어 내렸다.

'한국의 예레미야' 김교신

이제는 '무교회주의를 비판한 무교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김교신에 관한 조각 글들이 신문, 잡지, 신학 대학 심지어는 일반 대학원 논문들을 통해서 발표되어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게 되었다. '미쳐버린 운전사'에 '졸고 있는 승객'을 태우고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는 것 같은 제도 교회 현실에서 '김교신'은 나에게는 숨겨놓고 즐기는 애인 같은 존재다.

전 연세대 교수였던 김동길은 한국 근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두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그중 첫 손가락에 김교신을 꼽겠노라고 했다.

한때 멀쩡하던 정신으로 '두레 공동체 운동'을 펼치던 김진홍 목사는 그의 여러 편의 설교와 글에서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 신앙을 깊이 흠모하는 마음을 토하였고, 어느 미주 집회에서는 한때 그가 주도하여 발간했던 <성서한국>이 김교신이 전력을 다하여서 발간하였던 <성서조선>에 담긴 신앙 유산을 이어받은 것임을 밝혔다.

김교신의 양정학교 제자였던 손기정은 동경 마라톤 예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자신을 보고 선도차에서 시종 눈물을 훔치던 스승 김교신의 눈물만 바라보고 뛰어 끝내는 우승했다고 한다.

김교신은 성품이 강직하다 하여 '양칼'이라는 별명이 붙여져 있었으나, 눈물 또한 많아서 '한국의 예레미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는 커닝하는 제자를 부둥켜안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고, 소외당한 소록도인에게 '문둥아!'라는 '연애편지'를 쓰면서 회개의 눈물을 훔쳤으며, 끝내는 흥남 질소 공장에서 '그리스도의 복음 심장에서' 마지막으로 체험한 '민족' 속에 누웠다.

공장에서 만난 '민족'

1902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김교신은 1920년 6월 동경 유학 중 결신하여 그곳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기성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과 위선에 회의를 느껴 일본의 반전·반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의 문하에 들어가 신앙 수업을 했다.

그는 1927년 귀국하여 함석헌·송두용·유석동·정상훈·양인성 등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 1930년 주필로 편집과 발행을 책임지면서 심혈을 기울였고 성서 연구와 중세기 수도승 같은 경건 생활을 계속했다.

김교신은 1924년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권두언 '조와'(죽은 개구리를 애도함)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에서 살아남은 한 마리의 개구리를 묘사하여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고 썼는데, 이 표현이 민족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하여 폐간과 함께 피검, 함석헌·유달영 등 13인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김교신은 1944년 흥남 질소 회사에 입사하여 노무자의 복리를 위해 진력하며 발진티프스 환자들을 돌보다가 감염 되어 해방을 4개월여 남겨둔 1945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여기 함께 일했던 외과의사 안상득 앞에서 그가 숨지기 전 힘없이 토한 마지막 말을 적어본다.

"안 의사, 나 언제 퇴원하여 공장으로 갈 수 있습니까…. 나 40 평생에 처음으로 공장에서 민족을 내 체온 속에서 만나보았소…. 이 백성은 참 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그들에게는 빵보다도 따뜻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제 누가 그들을 불쌍한 무리로 만들었냐고 묻기 전에 이제 누가 그들을 도와 줄 수 있느냐가 더 급한 문제로 되었습니다. 안 의사, 나와 함께 가서 일합시다. 추수할 때가 왔으나 일꾼이 없습니다. 꼭 갑시다."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김교신에게서 '조선'을 빼고 그의 신앙과 삶을 이해할 수 없다. 한국 교회사를 쓴 민경배는 "김교신의 신앙고백은 진리에 대한 충성과 함께 민족의 얼과 양심의 표현이었다"고 적고 있다.

김교신은 구미 선교사들의 성서 해석과 복음 이해의 유풍을 벗어나서 조선 사람의 다리로 체험되어지고 조선 사람의 심장으로 녹아진 순수한 '조선산 기독교'를 온몸으로 살아가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했던 인물이다.

함석헌과 문익환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뒤늦게 고난당하는 조선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부여하신 섭리사적 존재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하여 일제의 압제 하에서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던 고난은 김교신에게 '하나님의 시험문제'였다.

김교신은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말의 전달'과 '깨달음'에 그 궁극이 있지 않으며, 총체적 의미로서의 복음(말씀의 현현)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창조된 '민족' 속에서 영글게 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김교신 평전>을 쓴 김정환은 섭리사적 민족의식에 터전한 김교신의 신앙적 몸부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한다. 그렇다면 몇천 년에 걸쳐 이 땅에 터 잡고 영고성쇠의 역사를 경영해온 우리 민족의 섭리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외국의 신학자가 다듬어 줄 것인가? 또 외국의 역사가가 알려줄 것인가? '그게 아니다'고 외친 사람이 김교신이었다."

김교신이 그리운 시절

한국 교회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에 뒤범벅이 되어 지극히 사적이고 물질주의적 '외제 복음'에서 맴돌고 있다는 자성 어린 소리가 들려온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억겁의 역사에서 왜 하필이면 하나님은 20~21세기에, 그것도 '분단국가'에서 태어나게 하셨는지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김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성령의 자유롭게 일하심이 체험되어져야 하고 '성도가 서로 교통'해야 하는 교회 공동체가 인간의 잣대로 성공과 실패를 측정하는 CEO(목사) 주도형 조직체로 변해버린 지금, 소외된 인생들의 삶의 현장에 들어가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뒹굴던 '예수 따르미' 김교신의 '복음 심장'이 그립다.

한국 교회 강단은 오로지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진리의 말씀이 탐구되고 전파되기보다는 개인의 체험이나 주견과 '만담'이 난무하고, 기껏해야 생활 윤리나 성공 지향적 처세술이 전파되는 장소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진리 탐구에 대한 끝없는 충성을 바친 김교신 같은 지도자는 없는가.

개인주의적 이기와 정치적 경박함까지도 벗어나 고난당하는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깊은 영적·도덕적 구원을 기원한 김교신의 순영적 민족 구원의 신앙이 목마르게 그리운 오늘이다.

▲ 김교신.
"사랑하는 자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고 싶으나 인력에는 스스로 한계가 있다.
혹자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혹자는 문학을 주며,
혹자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절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도로서 혹자는 기도 생활의 법렬의 경을 주창하며,
혹자는 영적 체험의 신비 세계를 역설하며,
혹자는 신학 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하나,
우리는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을 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성서조선> 창간호 '성서 조선의 해'에서)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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