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
  • 송강호
  • 승인 2007.07.3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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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지역에서의 선교, 중단하지 말자

   
 
  ▲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22명의 형제자매들이 우리에게 분쟁 지역에서의 선교가 무엇인지를 고통스럽게 가르쳐주고 있다. 준비된 사람만이 선교현장에 가야 한다. 사진은 아프간 탈레반에 피랍된 샘물교회 교인들.  
 
분당 샘물교회의 단기선교팀이 아프간에서 피랍되고 급기야는 인솔자였던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씨가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충격에 빠졌고 많은 시민들이 한국 교회와 선교활동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확실히 이번 피랍 사건은 우리 국민들이 교회에 대해 얼마나 심한 반감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선교에 대해 얼마나 심한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교냐 봉사냐?

현재 살아남은 인질들에게 동정과 연민 대신 비난과 매도가 쏟아지고 있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이들이 한국 교회에 대한 국민들의 원망과 비난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희생양들처럼 보인다. 분당 샘물교회를 담임하는 박은조 목사는 이들의 활동이 순수한 봉사활동이었다고 했지만 나는 정직히 말해 이들이 순수한 선교활동을 했다고 믿는다. 이들을 안내한 ANF(All Nations Friendship)라는 단체는 의료 봉사를 수단으로 무슬림들을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이들로 이슬람권에 교회를 세우며 마침내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의 비전을 실현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피랍자들은 이런 장기적인 비전에 참여한 단기선교팀이다. 나는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며 유서를 썼든 안 썼든 유사시에는 순교를 당할 것조차 각오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운명의 시간이 온 것이다.

안타깝지만 한국 교회는 100년의 역사를 통해 이슬람을 적으로만 생각했지 이런 역경에 우리를 도울 이슬람 친구들을 사귀지 못했다.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인질 석방에 실마리를 쥔 미군은 인질들과 탈레반 포로들 간의 교환을 원하지 않고 있다. 피랍자들은 현재 심한 설사와 복통 고열과 심리적인 공황 상태이고 희생자들은 늘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금 한국 교회에게 선교는 무엇이며 더욱이 분쟁과 갈등 지역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책임은 무엇인가에 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 10/40 창 이론은 이슬람에 대한 배타심과 공격성을 고취시키는 반평화적이고 역사성을 상실한 신화적인 선교비전이다.  
 
지금 중동 지역에서 치열하게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여러 선교단체들이 공유하고 있는 ‘백 투 예루살렘 운동’과 ‘10/40 창 이론’이 이슬람에 대한 배타심과 공격성을 고취시키는 반평화적이고 역사성을 상실한 신화적인 선교비전이라고 생각한다. 이 비전은 비단 아프간뿐 아니라 아랍권 전체를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세계복음화의 일환이며 이는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 사형에 처하는 이슬람의 법을 생각할 때 무슬림들과 극단적인 마찰과 충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전과 함께 동반되는 유대인 귀환 프로그램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 이스라엘의 정착촌들을 확대시켜왔으며 그 결과 많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조상대대로 경작해왔던 토지를 억울하게 빼앗기게 되었는데 이런 일을 한국 교회들이 선교라는 이름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이슬람 선교가 죄악이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우리는 이슬람권에도 선교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선교가 이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떠해야 할 것이며 선교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와 정신으로 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특별히 아프간이나 이라크·팔레스타인처럼 분쟁이 진행 중인 지역에서의 선교는 더 더욱이나 신중한 숙고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슬람을 존중해야 하지만 개종을 금지하는 법처럼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까지 존중하자는 뜻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개종시킬 사람이 그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일 것인지 또 그런 개종자의 인생을 우리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의 숙고도 없이 사영리를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음역해 예수를 영접시키고 떠나겠다는 단기선교나 한나절의 평화행진이나 하룻밤의 축제로, 십자군 전쟁 이후 1,000년의 원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 무책임하고 주술적인 맹신처럼 보인다. 너무 오랫동안 영적 전쟁이니 땅 밟기니 하는 몰상식하고 몰역사적인 관점들이 보수적인 한국 교회의 선교관을 지배해왔다. 우리는 이런 자기도취적인 영적 세계로부터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내려와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온 몸으로 배워가야 할 것이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22명의 형제자매들이 우리에게 분쟁 지역에서의 선교가 무엇인지를 고통스럽게 가르쳐주고 있다. 준비된 사람만이 선교현장에 가야 한다. 경솔하고 무책임한 단기선교는 더 이상 분쟁 현장에는 적합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이들 속에서 하나님을 전파하기 이전에 알라가 누구인지를 배우고 성경을 가르치기 이전에 쿠란을 배우자. 그리고 그들과 친구가 되자.

언젠가 그란샤크의 지뢰밭에 폐허가 된 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나를 한 아프간의 어린이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런데 왜 아저씨는 그리스도인이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나는 처음에 묻는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 당혹스러웠지만 이후에 그 물음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프간의 어린이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들이 있다. 이것은 1,0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이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침략과 착취와 수탈로 인한 증오와 분노의 기억이고, 이것이 어린이들의 마음속에까지 깊이 뿌리박힌 편견이 되었다.

Quo Vadis, Domine?

   
 
  ▲ 위험하지만 목숨을 걸고 고난에 처한 사람들 곁에서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사진제공 김동문)  
 
나는 분쟁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개종도 교회 세우기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분쟁하고 있는 종족들 간의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있다. 서로 싸우는 종족들 간의 화해가 이들이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는 데 첩경이 된다. 우리는 국법을 초월하여 아프가니스탄·이라크·수단의 다르푸르나, 팔레스타인과 같이 전쟁과 분쟁이 있는 위험한 곳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 피스메이커들을 파견하기를 원한다. 국제적인 분쟁이나 종족·종교 간의 분쟁 속에서 평화를 만들려는 피스메이커의 일터는 전쟁과 분쟁 지역이다. 물론 희생자가 없을 수는 없다. 전쟁터를 두려워는 군인은 존재할 가치가 없듯이 희생을 두려워하면서 피스메이커가 될 수는 없다.

2001년 가을 아프간이 미국의 침공을 받아 곳곳에 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을 때 한 가녀린 자매가 우리에게 아프간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우리는 모두 안전상의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그때 그 자매가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아프간에서 강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피난민들의 발길에 채이고 밟히면서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너희들이 다 떠난 저 땅 안에는 아직도 자기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과 노약자들과 병자들과 장애인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 곁을 지키며 운명을 기다리는 수많은 나의 자녀들이 있다. 그들이 지금 두려워 떨고 있다."

시침은 이미 자정을 훨씬 넘어 있었고 우리 모두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차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주님의 평화를 빌었다. 이렇게 개척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평화를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

선교가 언제 안전하고 그리 쉽게 현지인들에게 호응을 받은 적이 있는가? 바울의 선교 여행은 오늘날 아프간의 선교보다 더 안전하지 않았다. 바울도 여러 차례 테러를 당해 돌과 채찍으로 수 없이 맞기도 하고 옥에도 감금당하고 노상강도들에게 붙잡히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한두 번 넘긴 것이 아니었다. 그가 현지인들과 심지어 동족들로부터 받은 핍박과 냉대도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고후 6:4~5; 11:23~22). 그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꾼다운 처신"이라고 말한다. 혼란스럽고 불안한 구한말에 우리나라에 파견된 외국인 선교사들도 안전만을 생각했다면 이 땅에 발을 내디딜 수 없었을 것이다.

원래부터 선교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었다. 오히려 분쟁이 일어나면 자신이 개척한 교회와 양들을 남겨둔 채 자신의 가족만을 데리고 선교지를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가 다시 안전해지면 돌아오는 '정상적인' 선교사들이 더 문제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분쟁 지역이 위험하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 정부가 반대하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선교를 접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이 이슬람을 믿는 지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런 분쟁 지역은 위험 속에서 가장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가장 절실하게 바라는 곳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불안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희생과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이들을 도와 생명을 구하고,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들을 준비하고, 훈련시키는 일이며, 분쟁 지역의 위급 상황에 유연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원 체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프간뿐 아니라 이라크나 팔레스타인·소말리아나 수단 다르푸르와 같이 위험하지만 목숨을 걸고 고난에 처한 사람들 곁에서 그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는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곳을 찾아가 이들에게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과 품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어디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말인가? 국가와 국민들, 심지어는 외신들조차 한 목소리로 한국 교회가 위험한 분쟁 지역에 경쟁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분쟁 지역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이 더 절실한 곳일수록 그 일을 수행할 하나님의 일꾼은 훨씬 적은 반면 안전하고 편리한 마닐라나 나이로비와 같은 대도시 등지에 선교사들이 불필요하게 많이 몰려있는 현실이 오히려 한국 선교의 더 큰 문제라고 여겨진다.

미군은 이라크에서 3,000명이 넘는 군인을 잃었지만 지금도 자신들의 미션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전쟁터에서 군인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은 평화를 만들 사람인데 애석하게도 이라크 특별히 분쟁이 치열한 수니 삼각지대 내에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어떤 기독교 단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위험한 분쟁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일꾼들을 훈련시키고 준비시켜 파송해야 한다. 그러나 본회퍼 목사의 말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를 바란다.

"안전하게 난 평화의 길은 없다." (본 회퍼의 <녹슬지 않는 검> 중에서)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 일이 내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고 자신이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지를 먼저 숙고해야 한다. 피랍이 된다고 하더라도 국가나 군대·UN을 통해 구조될 기대나 또 돈에 의한 흥정과 협상으로 구원받을 것을 기대한다면 분쟁 지역의 사역자로 적합하지 않다. 물론 국가는 국가대로 단체는 단체대로 구조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나의 운명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으로 이 역경을 견뎌나가야 한다. 한국 교회와 선교단체들도 더 이상은 이번 사례처럼 단기 선교에서 준비되지 않은 순교자를 만들거나 김선일 형제의 경우처럼 비즈니스 선교라는 이름으로 미군납업체를 위해 일하게 함으로써 한 젊은 선교사 지망생을 이라크의 사막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실수를 다시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아직도 피랍된 21명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계심을 잊지 말자.

송강호/ 한국 Frontiers 간사

* 이 글은 한국 <뉴스앤조이>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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