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회가 대안입니다"
"가정교회가 대안입니다"
  • 이광하
  • 승인 2007.11.0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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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서울침례교회 최영기 목사를 만나다

올 초에 ‘수평 이동 교인의 등록’을 거절하기로 선언해서 한국 교회에 신선한 도전을 준 교회들이 있었다. 이 교회들의 공통점은 가정교회를 기초로 불신자 전도에 힘쓴다는 것이다. 산울교회(이문식 목사)와 분당샘물교회(박은조 목사)는 장로교의 제도를 유지하면서 가정교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이와 같은 선언을 했다.

한국 교회에 가정교회의 모델을 제시한 이는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63세)다. 최 목사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원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실에서 근무하던 중, 마흔한 살이던 1985년 신학 수업을 시작했다. 1993년부터 텍사스 주에 있는 휴스턴 서울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시무하고 있다.

최 목사는 “가정교회는 신약 교회의 원형 즉, 본질을 회복하려는 운동”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가정교회는 소그룹이나 제도적 형식이 아니다. 삶을 보고 배움으로써 제자가 되고, 동시에 제자를 삼는 재생산이 일어나는 삶의 방식이다.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지역사회에 침투하는 개척 교회인 것이다. 과연 어떤 점에서 가정교회는 우리 시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대안일 수 있는가. 지난 9월 17일 온누리교회에서 강의를 마치고 나온 최 목사를 만났다. 

   
 
  ▲ 소그룹이나 제도적 형식이 아니다. 삶을 보고 배움으로써 제자가 되고, 동시에 제자를 삼는 재생산이 일어나는 삶의 방식이다.  
 
왜 가정교회인가.

생각 있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말한다. 첫째, 교회 수가 줄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이탈 현상이 심각하다. 그렇다고 삶의 변화가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옛날에 특별히 초기 교회에서는 첩을 돌려보내고 도둑질한 돈을 도로 주인에게 돌려주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 또 교회가 사회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있다. 애초에 교회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주라는 메시지만은 양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독단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서 비난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런데 비난의 질이 다르다. 옛날에는 ‘교회 다니면 제사 때 절을 하지 않는다’거나 ‘교회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고, 주일 날 일을 안한다’ 식의 비난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뭔가 지조를 지킨다고 할까, 자존심을 지킨다는 게 있었는데, 요즘의 경우는 ‘너희도 물질주의, 권위주의에 빠져 있지 않냐. 너희도 우리와 똑같다’는 것이다. 이를 부인하기 힘들다.

가정교회란 무엇이냐 신약 교회를 회복해 보려는 것이다. 운동선수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정석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위기인데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신약 교회를 회복해 보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요것(제도)만이 신약 교회다’고 한다면 당장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만 하더라도 당장 다른 형태의 신약 교회가 등장한다. 장로에 대한 명칭만 하더라도 히브리 사람들이 주가 된 교회는 장로라고 했지만, 헬라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는 감독이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의 정신을 찾아 가야 한다.) ‘성경이 그렇다고 그러면 그런 줄 알고, 아니라고 그러면 아닌 줄 알고, 하라고 그러면 하고, 하지 말라고 그러면 안하고.’ 잠시 신학이나 전통을 유보하고 성경대로, 가능하면 단순하게 신약 교회에 가깝게 가보자는 거다. 가정교회하면 자꾸만 형태를 묻는데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가정교회는 신약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정교회는 네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으면 여러 의견이 많다. 사회 정화, 가난한 사람 구제, 치유, 전도, 예배 등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활동이지 존재 목적은 아니다. 목회자들도 교회 존재 목적 보다는 사역을 말한다. 왜 많은 목회자와 성도가 피곤한가. 그것은 존재 목적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 말고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돌아가보자. 그 답이 예수님이 주신 대사명에 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은 개척자들에게 주신 것이다. 교회 개척자들에게 주신 거니까 (대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헬라어 원본에서 보면 네 개의 동사가 나온다. 가서 전도하고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 여기서 명령형은 제자를 ‘삼으라’다. 제자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 그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쳐서,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다. 성경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면, 예수님이 제자를 만들라고 하면 만들어야 한다. ‘제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면 배우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맞기는 맞는데, 제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전수와 재생산이다. 대학에서도 누구 누구 교수의 제자라고 소개하는 것은 배운 것을 전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다.

가정교회에서는 수평 이동 교인은 안 받는다. 이유가 있는가.

왜냐하면 가정교회에서 불신자를 제자로 세우는데 보통 2~3년이 걸린다. 그래서 (거기에 집중하려면) 믿는 사람(수평 이동 교인)을 관리하는 에너지가 안 나온다. 또 큰 교회가 하나 생기면 주변 작은 교회 다 죽는다. 그래서 가정교회는 가서 영혼 구원해서 제자 삼는 것을 교회의 존재 목적으로 삼는다. 혹자는 교회 개혁은 민주화, 투명화, 당회 바로잡기를 얘기하지만 내가 보기에 문제의 핵심은 교회의 존재목적을 상실한 것에 있다. 이것이 한계다. 그런데, 가정교회에서는 이런 게 저절로 해결된다.

무엇보다 교회는 교회의 존재 목적을 뚜렷이 해야 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없어서 혼동이 온다. 확실한 존재목적이 없다 보니까, 숫자에 관심을 갖는다. 요즘 교회는 성장 강박증으로 찌들어 있다. 요즘 교회는 문 열어 놓고 ‘오라’고만 한다. 그런데 문열어놓고 ‘와라’ 하면 믿는 사람만 온다. 답답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서 인구가 100만 명인 도시가 있다고 할 때 교인들이 17%라고 한다면, 17만 명은 천국 가고 83만 명은 지옥 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많은 교회가 지옥 가는 83만에 관심이 없고 천국 가는 17만에 관심이 있다. 그러면 지옥 가는 83만을 누가 책임지겠는가. 가정교회는 83만에 초점을 맞춘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가 즉, 하늘나라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 가정교회는 신약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가정교회는 형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교회가 우상이 되면 안된다.  
 
교회의 존재목적이 영혼 구원해서 제자 삼는다는 것이라고 하면 교회의 본질적 사명 중에서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사회적 책임이나 역사 변혁의 사명은 소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복음에 기초하지 않으면 사회 개혁 운동은 힘들다. 사회 개혁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나름대로 부조리를 만들게 된 것이 역사적인 사실 아닌가. 개인적인 생각인데,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셋방에 살고 있다고 본다. 셋방 사는 사람은 집을 개조하려들지 않는다. 어떤 사회운동이든지 위에서 내려와서 되는 것은 아니고 밑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분들은 비판하는 것이 빛과 소금의 삶인 것처럼 말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본다. 복음에 기초한 섬김이 몸에 배면 나중에 저절로 사회봉사로 나간다. 영국에서 무혈혁명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영국의 요한 웨슬리는 사회를 개조하려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해서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고 병든 자를 찾아보면서, 사회의 바닥에서부터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 아닌가. 우리는 사회 개혁을 구조적으로 바꾸려는 생각은 없다.

제자화를 통해 공동체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힘을 키우고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일반 교회에서는 주일에 예배 하고 평일에는 그 말씀대로 살 수가 없다. 목사님 하라는대로 하면 사회에서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한다. 또 목사님이 너무 이상적인 얘기만 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중적인 삶을 산다. 가정교회의 장점은 주일날 말씀을 듣고 가정교회에서 또 고민을 나눈다는데 있다. ‘어떻게 살았다’고 모임 안에서 얘기한다. 가정교회를 하면 추상적, 지식적인 얘기가 아닌 삶을 나누기 때문에 자신에게 정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가 직장이나 사회에서 겪는 갈등을 고백하고 나누기 때문에, 치유가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교회가 곳곳마다 빛을 밝혀가는 일을 해야 한다. 교회에서 섬김의 삶이 몸에 배이면 그 때 사회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사회 개혁을 목표로 한다고 그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고 본다.

성경적인 제자훈련의 방법은 무엇인가.

마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법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능력 배양이었다. 교실 강의가 아니라 현장 실습이었고, 가르쳐서가 아니라 보여주기였다. 지금의 제자훈련의 문제는 지식 전달에 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이들도 듣고 배우기보다 보고 배운다. 교실 강의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제자가 아니라 학자를 만든다. 예수님의 방식은 미운 사람이지만 화해하려고 애를 쓰는 노력, 목자들이 섬기는 모습을 보고 함께 부대끼면서 배운다. 가정교회는 새로운 교회의 형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보고 배우는 시스템이다.

가정교회를 교회성장 프로그램이나 제도로 인식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 가정교회는 신약 교회의 원형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가정교회는 형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교회가 우상이 되면 안 된다. 영혼 구원해서 제자 삼는 원칙은 살리고 형태는 바뀔 수 있다. 가정교회를 교회 성장의 도구로 시작하면 실패한다. 교회를 회복하는 것은 굉장히 에너지를 소모한다. 가정교회를 시작하려면 교회를 향한 열망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주님의 몸인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는 안타까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정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런 확신이 없으면 시작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키우려는 욕심으로 서둘러서는 안 된다. 가정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다. 준비기간이 필요하다. 교회가 크고 평균연령이 높을수록, 교회가 오래될수록 더 오래 준비해야 한다. 제일 어려운 점은 의식전환이다. 가정교회는 원형 줄기세포와 같기 때문에 장로교와 제일 맞다. 섬기는 집사가 안수 집사가 되고, 목자의 목사가 초원지기이고,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되면 굉장히 잘 될 것이다. 장로교를 살릴 수 있는 게 가정교회라고 본다.

교회 사역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가정교회에서는 사역을 분담한다. 목사는 목자를 세워서 목양을 하고 교회를 세우고, 사도행전이 가르치는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것을 담당한다. 휴스턴 침례교회 1994년 1월에 시작할 때 장년 출석이 140명이었다. 그런데 현재 청소년부까지 전교인이 모두 1,800명이다. 그리고 우리교회를 통해서 매주일 3~4명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침례를 받고 있다. 우리 교회가 있는 휴스턴은 인구로는 미국에서 4번째다. 그러나 한인은 굉장히 적다. 2000년 연방통계에 의하면 한인이 10,300명이 한국인이라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건 놀라운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건강한 17개 교회를 꼽았는데, 그중에 하나로 우리 교회가 들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장년이 1,000명일 때 까지 부목사가 없었다. 목자들이 다 부목사 노릇을 했다. 대신 유치부 청소년부 등 전문 사역자들은 많다. 평신도가 목양을 한 것이다.

가정교회를 해야 되겠다고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면?

로마서 16장을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언급하면서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문안하라”는 말이 나온다. (성경이 가정교회를 말하고 있다.) 나는 어떤 이론을 통한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심정으로 성경, 이것 하나를 붙들다 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됐다. 그리고 가정교회를 생각하는데 도움을 준 책이 두 권 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가 쓴 <제자입니까>와 랄프 네이버가 쓴 <셀 교회 지침서 >다. <제자입니까>를 읽고 마음이 동했고, <셀교회 지침서>를 읽고 구체적인 방법에 관한 길을 찾게 되었다. 1994년 교육목사로 사역을 시작했는데 사실, 가정교회를 하겠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왜 가정교회를 하고 있는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웃음)

정용섭 목사 설교비평을 보면 가정교회는 최영기 목사이기에 성공했다는 대목이 있다.

어떤 갱신 운동도 성공하려면 3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시작한 사람이 사라져도 교회가 유지된다. 21세기에 교회가 위기를 맞았다. 대안이 무엇인가. 현재로서는 3대가 형성된 가정교회가 아닐까. 미국이니까 된다. 텍사스니까 된다. 최영기니까 된다는 말이 무성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교회 없이는 세상에 소망이 없다.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교회를 비판하는 것 보다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 적어도 이런 대안(가정교회)이 있으니 진지하게 찾아보고 상처나 실망을 버리고 주님이 원하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고 사회가 나라가 밝아지면 좋겠다.

이광하 편집장 / <복음과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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