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이다"
"이제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이다"
  • 송준인
  • 승인 2007.11.2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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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윤리학회 논문, ‘돈과 목회 윤리’ (1)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신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는 모든 면에서, 특히 윤리적인 면에서 교인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이 말씀은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이 좌우명으로 삼아야 하는 말씀이다. 목회자가 정직하지 않으면 목회자의 설교가 감화력을 갖지 못한다. 목회자가 성적으로 타락한다든지, 금전상의 불의·불법·탈법·부정과 연루되면 치명적인 영향을 받게 되어 성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이 성장의 문턱에서 쓰러지는 이유가 바로 목회자의 윤리적 미성숙에 기인한다. 목회자의 윤리는 곧 하나님의 뜻을 곧게 시현할 수 있는 그릇이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맑은 눈과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양심이어야 한다. 사회의 신뢰 지수가 낮아질수록 목회자에게는 더 큰 사명감이 부여된다.

목회자는 이러한 시대적 필요를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 자신의 건전한 윤리 의식에서 비롯된다.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깨끗할 때 설교에 힘이 생기고, 신뢰감을 주며, 결국 교회에 주어진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목사와 돈 :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

오늘날 목회자의 윤리와 관련하여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돈에 관련된 문제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면서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범사에 너희에게 본을 보였다”고 말하면서 목회자가 금전적인 문제에서 바로 서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21세기의 교회의 핵심 논점은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목사의 산물이라고 전제할 때, ‘돈과 목회 윤리’라는 주제를 논하는 것은 결코 오늘날의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을 지적하고 밝히는 데 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목표임을 먼저 밝혀둔다.

사례1 - 교회의 헌금 유용

목사가 교회 헌금을 유용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한겨례 21> 제342호 2001년 1월 9일자 커버스토리에 보면, 서울 구로구에 있는 모 교회는 담임목사의 교회 헌금 유용을 둘러싸고 교회가 둘로 나뉘는 심각한 분열 양상이 있음을 보도하고 있다. 담임목사가 사실상 교회 헌금을 혼자 관리하면서 유용했다는 의혹과 함께, 부흥회가 끝난 후 교인들이 낸 헌금의 일부를 횡령한 혐의가 있어 추궁한 결과, 개인적으로 헌금을 유용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는 내용이다.

같은 커버스토리에 의하면, 세종대 황호찬 교수는 전국 238개 교회를 대상으로 교회 회계제도를 조사한 결과, 일반회계와 특별회계를 구분하지 않는 교회가 47%에 달해 특별한 목적을 위해 걷힌 헌금이 적절한 통제 없이 전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해마다 9월에 열리는 주요 교단 선거 때마다 금권 선거로 얼룩지는 것도 돈을 우상처럼 여기는 한국 교회의 일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폐단을 막기 위해 교단의 총회장과 임원을 제비뽑기로 선출하는 교단이 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만든 교회개혁제자훈련 강의안 4~5쪽을 보면, 그 기관에서 서울의 모 교회의 간접 세습 문제를 다루면서 발견한 몇 가지 문제점이 기록되어 있다. 아들을 위해 교회를 건축하는 데 교회 재정 80억 원을 지출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지출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이미 그 돈이 지출된 다음이었다는 것이다. 애당초 처음 그 지출이 실행될 때에는 담임목사와 재정 담당 장로 등 최측근의 결정으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문 기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그 교회 당회 서기 장로는 개혁연대 측에 그 교회는 예산 지출 항목의 약 40%까지 예비비로 잡혀 있다고 시인했다.

물론 교회 재정의 수입과 지출이란 것이 워낙 불확실한 것이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예비비 항목이 총지출의 약 40%까지 차지한다는 것은 그 만큼 담임목사와 그 측근들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폭이 크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을 담임목사의 뜻대로 운용할 수 있는 것이 목회 성공의 기준인 양 내세우는 목회자들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교회 재정이 불투명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목회자가 부패할 가능성 역시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다.

사례2 - 상회의 헌금 유용

<한국기독신문> 2006년 6월 24일자를 보면, 어느 노회 서기가 노회 전도부 회계에게 사업비를 송금 받아 그 중의 일부만을 해당 교회에 송금하고 나머지는 유용했다가 전모가 밝혀져서 나중에 나머지 돈을 송금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노회의 재정은 각 지 교회가 내는 상납금에 의해 운영된다. 그 상납금은 물론 교인들의 헌금 중 일부를 규정에 따라 매월 노회 회계에게로 송금한다.

그런데 각 교회에서는 그런대로 헌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 양심으로 한 푼이라도 아껴서 쓰려고 하고 낭비를 줄이려고 엄격히 통제하기도 하지만, 그 헌금이 노회와 같은 상회로 올라가면 그 의식이 흐려지는 데 문제가 있다. 각 지 교회에서의 헌금은 그것이 노회로 올라가든, 총회로 올라가든 동일한 헌금이고, 또 동일한 하나님의 돈이다.

그런데 상회로 올라갈수록 그 의식이 흐려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소위 상회에서 쓰이는 회의비라는 것의 내막을 알고 보면 그것의 대부분은 식사비 내지는 교통비다. 대부분의 상비 부서는 신앙 양심에 의거하여 부끄럽지 않게 사용하고 있지만 아직도 일부 부서는 편리성을 이유로 호텔에서 모인다든지, 고급 음식을 먹는다든지, 소정의 교통비를 준다든지 하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낭비만 줄여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업을 더 많이 할 수 있다. 회의비 중에서 교통비만이라도 줄이거나 없앤다면 엄청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사실 장로들이야 그렇지 않다고 해도 목사들은 상회에서 일할 정도가 되면 각 교회에서 차량과 기름 값을 책임지기 때문에 교통비를 받으면 이중으로 받게 되는 셈이므로 사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례3 - 목사의 재산 증식

2007년 8월 23일 자 <충청뉴스>를 보면, 어떤 교회 목사의 재산 증식 의혹을 보도하고 있다. 목사 부부가 모 성도에게 찾아와 재정부장직을 권유하면서 자기 자녀들한테 물려줄 돈이 전혀 없기 때문에 재정부장을 하면서 퇴직할 때까지 7억 원짜리 적금과 45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해달라고 했다.

이후 알고 보니 본인 앞으로도 땅이 있으며, 아들을 비롯한 사위 앞으로 차명을 하여 건물과 땅을 사 두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도 않고, 심지어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강단에서는 자식들한테 재산을 물려주지 말고 교회에다 재산을 바치라고 설교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내용이 대부분의 선량한 목사들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신앙 양심과 높은 도덕의식으로 부끄럽지 않게 생활하고 모범적인 헌금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제에 목사들이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 외에 목사들은 외부에 강사로 나가거나 부흥회를 인도하여 별도의 사례비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투명하게 그 모든 것의 십일조를 바치고 있는지, 자신은 실천하지도 못하는 것을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사례4 - 목사의 헌금 강요

헌금 강요의 좋은 예는 오덕호 목사의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교회의 부흥회 기간 중에 그 교회가 속한 교단에서 교단의 선교대회를 위해 헌금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부흥 강사의 설교가 끝나고 광고 시간에 담임목사가 이렇게 광고했다. “이번 선교대회에 우리 교회가 작정한 헌금 액수는 500만 원입니다. 내일 밤 집회 때 이를 위해 헌금하겠습니다. 정성껏 준비하셨다가 헌금에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강사가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더니 담임목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돼. 내가 할 테니 봐!”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자, 이 귀한 사업을 혼자 할 사람 없어? 혼자 500만 원 헌금할 사람 일어나.” 그러나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교인들을 둘러보고 한 번 꾸짖은 강사는 다시 말했다. “그럼 두 사람이 나눠서 하지. 250만 원 헌금할 사람?” 하지만 아직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라고 다시 꾸짖은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 십일조 감당할 사람! 50만 원 할 사람 일어나 봐, 이건 많을 거야.” 과연 두어 사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고 얼마 후에 열 사람이 다 찼다. 이제 다 된 것 같은데 강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 “아, 여전도사 뭘 해. 빨리 이 사람들 이름 적어!”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다>, 오덕호 지음, 88~89쪽)

부흥회 중에 이런 모습은 아직도 한국 교회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헌금의 본뜻을 왜곡하는 좋지 않은 사례다. 헌금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헌금은 은연중에 자신을 과시하게 되어 바리새인의 헌금이 되고, 정작 하나님이 귀히 보시는 과부의 두 렙돈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뉴스앤조이> 인터넷 판 2002년 11월 29일 자를 보면, 이승균 기자가 쓴 ‘돈과 교회 직분의 부적절한 함수관계’ 라는 기사가 있다. 거기에 보면, 인천의 모 교회 담임목사가 2002년 6월 말 장로 후보자들에게 장로 자격 기준 14가지를 명시한 문건을 나눠주면서 ‘2,000만 원에서 3,000만 원의 헌금을 낼 수 있느냐’는 조건을 끼어 넣어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다고 한다.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안수집사·권사·장로에 임직하면서 일정한 헌금을 하게 하는 관행이 있다.

물론 임직하는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임직자 대표들이 모여 상의하는 가운데 직분별로 헌금 액수가 할당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행으로 교회 직분을 마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사도행전 8장에서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하다가 베드로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엄한 책망을 들은 것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직분자들이 임직할 때 자발적인 헌금이 아니라 일정액의 할당 받은 헌금을 강요당하는 것은 돈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직분을 사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다.

사례5 - 교회의 건축헌금

위에서 언급한 교회개혁실천연대의 교회개혁제자훈련 강의안 2~3쪽을 보면, 오늘날 교회 건축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물론 교회 건물을 건축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짓는가를 마치 신앙의 척도요, 목회 성공의 비결이요, 기준인 양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거두고 그것도 모자라 대부분 은행에서 차입하여 건물을 짓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건축헌금하고 축복 받은 사례들을 강조함으로써 헌금의 그릇된 동기 부여를 한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은 복 받기 위해 헌금하게 되고, 교회는 무거운 부채의 짐을 지게 되기 때문에 설교나 목회 방향이 하루 빨리 돈을 갚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경이 왜곡되기도 하고 복음의 균형이 깨어지기도 한다. 그나마 건축 후에 헌금이 잘 거두어지고 성도 수가 늘어나 은행 빚을 정한 기간 내에 청산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교회는 갈등과 분쟁에 휘말려 분열되기도 한다.

같은 강의안 4쪽을 보면, 서울의 모 유명한 목사는 설교 중에 어떤 장로의 예를 들면서 모 교회의 한 장로가 IMF 위기가 터져 사업이 부도나기 직전에 건축헌금을 드리고 보자는 심정으로 2억을 드렸더니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다는 예를 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엄격히 말하면 채권자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의도적으로 건축헌금으로 빼돌린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무책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헌금의 액수보다도 헌금의 질과 헌금의 출처도 중요한 것이다. (계속)

송준인 / 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
 
* 이 글은 한국복음주의윤리학회(회장 박득훈) 제7차 정기 논문 발표회에서 11월 17일 발표한 송준인 교수(총신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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