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복음은 자본주의다?
한국 교회의 복음은 자본주의다?
  • 성기문
  • 승인 2008.01.17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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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가 한국 교회의 두 축

들어가면서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제도의 인정과 시장경제를 양 축(兩軸)으로 삼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심지어 교회 강단에서도 복음과 하나님나라는 온데간데없고, 자본주의 찬양 일색이다. 사실 한국 기독교는 오래 전부터 기복주의의 폭우에 흠뻑 젖어 있었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풍요와 진보를 목도했고 동경했다. 게다가 80년대 소비에트와 동유럽이라고 하는 공산주의의 중요한 블록의 몰락은 한국 교회에 있어서, 공산주의가 대표되는, 무신론과 폭압 정치의 몰락과,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서구 자본주의의 우수성을 확신하게 하는 기념비적 사건이 되었다. 애석하게도 (보수 기독교가 주장하는 대로) 공산주의가 무신론이라면, (보수 기독교가 감추고 싶은 것 이상으로) 자본주의는 다신론이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 변화와 영향은 한국 교회를 탈내세주의화하고 세속화하여 세상을 닮아가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동일시되도록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세상의 조류를 옹호하거나 대변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역할을 자처하기까지 한다. 예전에는 권력에 순응하였고 이제는 (국가) 권력을 통제하고 왜곡하며 남용하며 사유화하기까지 한다.

이들의 기복주의에 대한 열망은 단순히 세상을 닮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해석에까지도 영향을 끼쳐서 그들의 입맛에 맞고 그들의 열망을 지지해주는 방향으로 성경 해석을 전개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의 순환론리적 해석학은 다음과 같다.

1) 성경 구절과 신학적 사고를 사용하여 물질적 번영의 추구를 한국 교회의 이상과 목표로 삼으며, 그 이상과 목표를 견고히 할 목적으로 성경 구절을 왜곡하며 새로운 신학적 사고를 고안해 낸다.

2) 그와 같은 이상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본주의의 양축인 사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를 원용하여 기독교와 교회를 사유화하고 확장과 거대화를 위하여 무한경쟁을 옹호한다. 그 이상[理想]을 이루고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사나 축복의 결과로 보고, 그 이상을 이루지 못하는 자에게는 달란트나 은사론(심지어 역할분담론) 혹은 노력의 부족에 따른 축복의 부재라는 가설을 내세워 합리화한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합리화나 숙명론이기도 하다.

요약컨대, 한국 교회의 성경 해석은 기복주의를 목표로 사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를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분석이다. 그들은 이것을 전가보도(傳家寶刀)처럼 사용한다. 대한민국을 ‘살리는 데도’ 사용하고 한국 교회의 기복주의를 지키는 데도 사용한다. 구약에서 창세기는 한국 기독교의 자본주의화에 일조를 한 성경이기도 하다. 이뿐만 아니라, 솔로몬이나 욥을 (최근에는 야베스의 기도를) 자신들의 기복주의를 지켜줄 수호신(守護神)으로 삼고 있다.

사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는 여러 명의 부자가 나온다. 그것도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으니 복을 받았다. 여러 명이 동일하게 물질적인 복을 받은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 가운데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거부(巨富)가 되었다. 그러니 너도 나도 창세기의 족장들을 본받아 부자가 되는 비결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는 한국 기복주의의 18번, 애창곡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과연 본문이 그렇게 말할까? 독자들 가운데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전혀 없는가? 정말로 성경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가? 창세기는 자본주의적 해석을 용납하는가? 그래서 필자는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를 ‘제대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자세한 논의는 http://www.cyworld.com/moses_torah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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