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학습 강조하다 잘못된 가치관 '주렁주렁'
영어 학습 강조하다 잘못된 가치관 '주렁주렁'
  • 이응도
  • 승인 2008.01.17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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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사회에서 자녀 교육 (7)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온 남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남매는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모 덕분에 여러 면에서 뛰어난 아이들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한국에 있을 때까지는 한 번도 좌절이나 열등감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자녀 교육'이라는 이유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오고 난 다음 아이들은 영어라는 큰 장벽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늘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성장했던 아이들은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1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다행히도 부모의 사업은 그럭저럭 잘 정착했고 성취 욕구가 높았던 아이들도 학교에 잘 적응하게 되었습니다. 남매의 어머니는 아이들로 하여금 집안에서도 영어만 사용하도록 했고, 미국 친구들만 사귀도록 유도했고, 학원과 과외를 통해서 가능하면 빨리 영어를 익히고 학교에 적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에 그리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1년 정도가 흘렀습니다. 제가 그 가정을 알게 된 건 그때였습니다. 두 아이는 웬만한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보다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미국 생활, 미국에서의 자녀 교육은 마치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늘 자랑했습니다.

저는 그 두 아이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마침 그때 한국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또래 아이와 다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한국말로 말다툼을 했습니다. 그 남동생이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를 펴다가 언성이 점점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누나가 합세해서 다른 아이를 영어로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영어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던 다른 아이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한참 영어로 떠들어대던 남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어도 못하면서 뭘 안다고 야단이야!" 그리고 그 이후에 그 남매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들과 싸웠던 아이를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남매에게 있어서 말과 생각의 옳고 그름보다 중요했던 것은 얼마나 영어로 잘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자신들의 아이들이 빨리 미국 학교에 적응하는 것을 자랑했지만, 제가 보는 관점은 달랐습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의 마음 깊은 곳에 중요한 것 하나를 잘못 심어주었기 때문이지요.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서 가치관을 학습하게 됩니다. 그 가치관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남매의 부모들은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관을 영어에서 찾았습니다. 빨리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했고, 적응하기 위해 무엇보다 영어가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남매는 사람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영어 구사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자신들을 나무라는 말도 영어로 표현하면 그것이 권위 있게 들리고 옳은 말로 인정했지만, 한국어로 표현하면 어쩐지 뭔가 인정하기 싫은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아무리 큰 잘못을 했다고 해도 한국말로 꾸짖으면 일단 거부하고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영어 구사 능력이 떨어지면 능력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과 한국 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이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사실만으로 다른 한국 아이들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 남매의 부모들은 자녀들이 미국에서 수준 있는(?)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정작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관,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에 대한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부모는 상담소를 찾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남매가 영어에 있어서 자신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부모의 훈계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 남매는 몇 년 전 영어를 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내뱉었던 말을 부모에게 그대로 내뱉게 되었습니다. "영어도 못하면서 뭘 안다고…." 남매는 부모의 훈계를 한국적인 권위로 몰아붙이면서 자신들은 미국적인 가정교육을 원한다고 항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한국 학생들에게서 따돌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가정에서는 부모와의 대화가 단절된 상태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입니다. 미국 사회의 적응이라고 하는 시급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녀의 마음에 잘못된 가치 기준을 심어두었더니 그 결과 자녀의 삐뚤어진 삶의 열매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한국인으로 미국에 살면서 영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는가. 이것은 사람의 됨됨이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좋은 기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 역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의 자녀가 친구들을 판단하면서 "공부도 못하는 게…" "영어 한마디도 못하면서…" "집도 가난한 게…" 혹은 "얼굴도 못생겨가지고…" 등등의 외적인 조건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지금 잘못된 가치관을 수정하지 않으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그 가치관의 뿌리에서 쓰고 악한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응도 목사 / 필라델피아 초대교회·가정상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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