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하기(2)
창세기, 자본주의적으로 해석하기(2)
  • 성기문
  • 승인 2008.01.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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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본문, 다양한 해석 : 기원, 발전, 그리고 귀결

창세기를 읽는 일이 쉽지는 않다. 소위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그곳에 있는데, 읽는 사람들이 각자 나름대로 읽어가며, 심지어 각자의 독서법에 ‘유일무이한’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창세기 독서에 대한 몇 가지 주장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창세기를 구속적 측면에서 읽는 사람들은 대략 신 중심적이다. 이들은 물론 모형론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알레고리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창세기는 인류 구속을 위한 시작을 보여주며, 알레고리나 모형론적으로 보았을 때, 그 구속의 성취(혹은 완결)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창세기의 족장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구속이나 고난을 발견하는 것이 그러한 명확한 예이다.

그러한 입장은 창세기 당시의 문맥이나 의도보다는 창세기를 포함한 구약의 일관된 구속사적 읽기에 유익이 있다. 물론 이러한 입장은 과연 창세기 자체가 그렇게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는가에 의문이 있기는 하지만, 창세기 독자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에 있어서 별다른 유익을 주지 못한다. “창세기는 그리스도를 위한 책이며, 하나님의 구속을 찬양하는 책이다. 그리스도를 발견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The End-. 이것 외에 더 이상의 유익은 없다.

창세기를 모범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대략 인간 중심적이다. 이들은 창세기의 모든 인물들의 사고와 행동이 신앙인들의 모범적인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물론 선택적이긴 하지만) 신자들은 이러한 행동들을 반드시 따라해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고향과 집과 아버지를 떠나야 한다. 아브라함처럼 십일조를 내야 한다. 야곱처럼 하나님께 매달려서 축복을 얻어내야 한다. 요셉처럼 순결하고 이집트의 국무총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가운데 알레고리나 모형론적 입장을 완전히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이 모범론적인 입장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족장 이야기가 얼마나 윤리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모범적인지 어떻게 결정하고 판단을 내릴 것인가? 이러한 행위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모방인가? 흉내인가?

창세기를 포함하여 모세오경은 18~20세기까지 문학적 표현과 신학이라는 범주(category) 속에서 주전, 9, 8, 7, 6세기에 만들어진 다양한 자료들(documentary 혹은 sources)로 이해되었다. 이것을 문서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이라고 한다. 즉 신명(神名)을 엘로힘이라고 부르느냐(E문서), 야웨라고 부르느냐(J문서), 신명기와 관련된 신학을 다루는가(D문서), 그리고 족보나 제사와 관련된 문서인가(P문서)에 따라서 구분되었다. 이 입장은 다분히 문학적이며 신학적이고 일부 정치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모세오경이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시기가 페르시아 혹은 헬라시대였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모세오경의 완성의 시기가 예수의 시대와 많은 차이가 없어진다. 이 후자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주위 환경과 민족들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 창세기 등을 저술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창세기의 저작 배경은 다분히 민족주의적이며 정치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이다.

창세기 본문에 대한 입장이 보수적이든지 진보적이든지 문자적이든지 알레고리적이든지, 모든 독서법은 나름대로의 독서법의 원칙을 갖고 있다. 게다가 그 나름대로의 독서법은 그 나름대로 읽혀질 수 있다. 이 독서법은 이데올로기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독서법의 맹점은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이데올로기(혹은 선입견)를 가지고 본문을 읽어간다는 점을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군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공격하기 위해서 기록하였다고 믿는 것이 특별히 이 이데올로기적 해석의 큰 맹점이다.

사실 <창세기의 자본주의적 해석>의 서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은 이제부터다. 현대 성경 해석학의 측면에서 볼 때, 자본주의적 독서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창세기의 족장이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해주길 바란다. 선민주의사상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거나 하갈과 이스마엘, 혹은 에서가 추방되는 것을 당연히 여길 수 있다. 혹은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이 갖고 있었던 타민족에 대한 배타주의나 편견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당연함에 대한 인식을 불쾌하게 여길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 가부장적인 측면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창세기는 읽기가 불쾌한 책일 수 있다.

과연 성경이 (현대 한국 교회를 위한) 친자본주의 책이거나, (이스라엘 왕조 시대나 귀환한 포로들이거나 혹은 현대 시온주의자를 위한)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책이거나, 당장 폐기되거나 재기록되어야 할 가부장적인 책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과연 본문이 왜곡된 것일까? 본문은 중립적인데, 보는 시야가 왜곡된 것일까?

최근에 영국 쉐필드대학교의 데이빗 클라인스(David Clines) 교수는 메타코멘터리(meta-commentary)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가 주석서의 저자의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권위 있는 해석과 해설자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한 면에서 모든 주석서의 독자들은 코멘터리(혹은 주석가)를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즉 그 책의 혹은 해석의 내면에 깔려 있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적절히 비판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많은 수의) 현대적 해석이란 본문 자체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고 있어서 독자가 그 본문의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밝혀내서 교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클라인스 교수 같은 경우에는 본문에 대한 주석가(해석가)들의 이데올로기를 분석해내고 적절히 비판하는 일을 적절히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의 입장은 클라인스 교수의 방법론에 많은 부분 동감을 한다. 물론 클라인스 교수의 학구적 태도나 입장 모두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번의 논의를 통하여, 한 본문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있을 수 있는데, 본문을 잘 주해하기 위해서는 그 다양한 입장이 깔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편견은 무엇인지, 그에 대한 대안은 무엇이고, 무엇을 교정하거나 수정해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것도 바르고 좋은 해석에 이르는 또 다른 접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할 수 있었다. 자세한 논의 사항은 http://www.cyworld.com/moses_torah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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