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해방? '노예에서 빈민으로'
노예 해방? '노예에서 빈민으로'
  • 이태후
  • 승인 2008.01.25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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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 대통령은 1865년 미국 전역에 노예 해방령을 선언했다. 240년 동안 신대륙 경제의 밑거름 역할을 한 흑인 노예들은 기나긴 노예 생활을 마감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법적 지위에 있어서만 자유의 몸이 되었을 뿐, 그들의 고달픈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고, 잠시 투표권이 주어졌지만 곧 빼앗기고 말았다. 세계 최고 강대국 미국의 뒷골목에서 이등시민으로 살았던 흑인들은 60년대 민권운동 이후에야 다시 투표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Chris Rock 같은 의식 있는 코미디언은 미국에서 노예 제도가 사라진 것은 1970년대 초반이라고 뼈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노예 해방 후 흑인 노예들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법적으로 더 이상 노예를 소유할 수 없게 된 백인 농장주들은 어쩔 수 없이 노예들을 풀어주었지만, 소위 그 ’해방’이라는 것은 그동안 목숨을 바쳐 수고한 흑인들을 아무런 보상 없이 자기 소유 영지에서 쫓아내는 형태였다.

한번 생각해보자. 노예로 산다는 것은 결코 대단한 일이 못 된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헛간 같은 숙소에 기거하며, 겨우 끼니를 면할 정도의 식사를 제공 받는 대가로 뼈가 부스러지게 일을 하는 것이 노예의 신세였다. 그래도 일을 하는 한 기본 의식주는 해결되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었다는 이유로 농장에서 기거하며 일하던 노예들은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없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노예 해방의 실질적인 결과는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북미주에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후예들의 신분이 농장에 예속되었던 노예에서 이제는 갈 곳 없는 빈민으로 변한 것뿐이었다.

노예 해방이 처음에는 농장주들에게 경제적인 손실을 입힌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교육받지 못하고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대부분의 흑인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동안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투자(?)였다.

자신들이 일하던 곳으로 돌아간 흑인들을 맞은 이전의 주인들에게는 예전처럼 그들을 먹이고 재워줄 의무가 없었고, 또 그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제공할 이유도 없었다. 결국 이전에는 노예로 고생했던 흑인들은 이제는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살아야 하는 일용근로자의 삶으로 전락한 것이다. 경제적인 보상이 전혀 논의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약간의 논의가 있었지만, 정작 링컨 대통령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부에서는 백인 농장주에게서 환원 받은 농토를 노예에게 분배하는 법안이 생기기도 했지만, 배분된 필지의 단위가 너무 커서 해방된 노예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구매할 길이 없었다. 간혹 해방 노예에게 주어진 땅이 있었더라도 얼마 후 백인들이 빼앗아버렸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역사적인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미국 퀘이커 교도들 사이에 있었던 조직적인 움직임이다. 미국 퀘이커 교도들은 노예 해방이 실시되기 훨씬 전부터 그들이 소유했던 노예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그 배후에는 존 울만(John Woolman, 1720~1772)이라는 한 사람의 지치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 뉴저지 주 출신인 존은 그의 상사가 노예 판매를 알리는 벽보를 작성하라고 요청할 때 노예 제도는 기독교 신앙에 어긋난다고 깨달았고, 그 이후로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힘썼다.

퀘이커 성직자가 된 후, 그는 뉴저지에서 노스캐롤라이나까지 이르는 1,500마일의 거리를 석 달 동안 여행하는 식으로 강행군하며, 가는 곳마다 퀘이커 교도들을 만나 노예 제도가 기독교 신앙에 부합할 수 없다는 것을 설득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기도하며 성령님이 그의 믿음의 동료들을 설득해주실 것을 구했다. 그는 간절하게, 노예 제도가 노예들에게 비인간적일 뿐 아니라, 노예를 소유한 주인들에게도 영적으로 해가 된다고 형제들에게 호소했다.

그의 설득으로 많은 퀘이커 교도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노예를 해방했고, 그들은 미국 노예 해방을 위해 의회에 청원하게 되었다. 퀘이커 교도들은 미 정부보다 거의 1세기 앞서 노예 해방을 했을 뿐 아니라, 노예를 내보내는 데에도 기독교 신앙에 부합한 방식을 택했다.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공수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2~14)는 말씀처럼, 퀘이커 교도들은 노예를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농장주들은 노예들에게 베풀어주느라 파산하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퀘이커 교도들은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 신앙에 따라 노예들에게 자유를 베푸는 데 적극적이었다.

   
 
  ▲ 1980년대에 KKK단에 의해 자행된 교수형.  
 

그러나 모든 해방 노예가 그런 축복을 누린 것은 아니다. 남부에서는 전쟁이 끝난 다음 해(1866년)부터 KKK(Ku Klux Klan)가 조직되어 흑인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들은 시작부터 자신들의 사명이 백인 기독교도들의 나라인 미국을 지키는 것이라고 내세웠다는 것이다 - 지금도 KKK의 웹사이트를 열면, “Bringing message of hope and deliverance to White Christian America!”라고 써 있다.

퀘이커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근거해서 흑인 노예 해방에 앞장섰고, 똑같은 신앙을 주장하는 남부의 백인들은 인종우월주의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며 폭력을 사용해서 흑인들과 유대인,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포를 조장했다.

남부에서는 노예 해방 직후에 자신들의 참정권을 행사한 흑인들의 노력으로 상당한 수의 흑인 지도자들이 의회에 진출해 괄목할 만한 활약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에 불만을 지닌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1877년 선거일에 질서를 유지했던 연방군대를 제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투표소로 향하던 흑인들은 KKK, Knights of the White Camelia 같은 극단적 백인우월주의 단체의 폭력과 위협으로 투표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흑인에게서 투표권을 제거하려는 백인들의 의지는 집요했다.

1890년대가 되면서 백인이 중심이 된 의회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 인두세, 읽기/쓰기 능력 검사, 성품 증명서(voucher of good character) 등. 겉으로는 인종과 아무 상관이 없는, “책임 있는 시민”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한 훌륭한 제도 같지만 실은 흑인들에게서 투표권을 빼앗기 위한 교묘한 전략이었다. 가난한 흑인들은 인두세를 낼 능력이 없었고, 아직도 대부분 문맹을 벗어나지 못했던 흑인들은 읽고 쓸 능력이 없었다. 특히 백인 선거위원이 흑인들의 자질을 문제 삼으며 자의적으로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음으로 남부에서는 실질적으로 흑인의 투표를 막을 수 있었고, 1910년에는 남부에 사는 흑인 전체에게 투표권이 거부되었다.

   
 
  ▲ 십자가를 불태우는 KKK 단원들.  
 

그 기간 동안 KKK를 중심으로 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흑인들이 사는 동네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리에 관심을 보이는 듯한 흑인이 있으면, 강제로 끌어다가 집단 구타를 하거나, 심한 경우는 올가미에 달아 처형했다.

그들은 다양한 수단의 협박을 사용했는데, 흑인 지도자의 집이나 교회에 불을 지르는 것이 그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한밤중에 말을 타고 흑인 동네를 습격하는 흰 두건을 쓴 이들의 존재는 흑인들에게 죽음의 사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이런 공포 속에 흑인 교회는 출애굽기와 예언서를 탐독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한 희망으로 여겼고, 눈물로 부르짖는 흑인들의 호소가 하늘의 공의를 이룰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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