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렉시아' 증세를 가진 아이
'하이퍼렉시아' 증세를 가진 아이
  • 강희정
  • 승인 2008.01.28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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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엿보기 15 - 이민 2세의 초기 언어 교육의 중요성

   
 
  ▲ 한국어 교육을 위해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을 만들어 엄마들이 돌아가면서 한국어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다. (강희정)  
 
작년에 민우(가명)라고 하는 남자 아이를 알게 되었다. 민우는 다른 한인 2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영어 발음이 분명하지도 않고 한국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민우는 '하이퍼렉시아‘(Hyperlexia)라고 하는 일종의 난독증을 겪고 있다고 했다. '디스렉시아’(Dyslexia)가 지능이 정상적인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읽지 못하는 증세를 가리키는 말이라면, '하이퍼렉시아'는 아이가 글을 잘 읽으면서도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난독증을 가리킨다.

민우는 한국에서 태어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미국에 부모와 함께 왔다. 민우 아버지는 미국에서 자랐던 한인 1.5세였고 어머니는 한국에서 대학을 마친 상태에서 영어 강사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한 뒤 민우를 낳은 후 미국에 건너왔다. 민우의 어머니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 초기에 심리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민우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가 한국어보다는 영어를 잘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아침에는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틀어주어 아이가 그것을 통해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오후에는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를 아이와 같이 보며 한동안 지냈다.

민우는 책을 남들보다 훨씬 빨리 읽기 시작해서 한때 부모들은 그 아이가 천재 내지는 수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민우가 언어 장애와 난독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세살 때 프리스쿨에 들어가고 나서다. 프리스쿨의 선생님이 아이를 진단받아 볼 것을 권유하여 여러 차례의 검진을 받은 끝에 '하이퍼렉시아'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민우의 언어 장애 및 난독 장애는 그 아이가 처했던 초기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의견이다. 민우는 한국어를 하는 어머니로부터 '어머니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다. 우리가 날 때부터 배운 언어를 모국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배우기 때문이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미국에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아이가 영어를 잘하게 되는 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여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통해 영어를 한국어보다 더 많이 접하도록 했다.

언어는 경험 속에서 체득되는 것이다. 그런데 민우는 삶의 경험이 분리된 채로 언어를 습득하면서 언어와 경험 사이의 불협화음 속에 놓이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초기 언어적 경험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어머니와의 친밀감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초기 언어를 배우고 경험을 쌓아가야 하는 시점에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와 같은 매체가 어머니를 대신하고 제2의 언어인 영어가 '어머니의 언어'를 대체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민우의 문제는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하지만 그것은 이민자들의 자녀들이 겪을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셋째 아이를 키우면서 나 자신도 비슷한 문제에 부딪혔다. 우리 셋째 아이의 경우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국말로 이야기하지만 언니들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쓰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 아이의 언어 발달이 한국에 있는 아이들의 경우보다 다소 뒤처진다는 것을 돌 무렵부터 알게 되었다. 그 아이가 말할 수 있는 한국어 단어 수도 적었고, 두 돌이 되어서도 문장으로 된 표현은 잘하지 못하였다.

   
 
  ▲ 한국어 동화책 읽기 모임을 하면서 아이들은 심리적 안정감과 친밀감 속에서 한국어를 더 잘 배우게 되었다. (강희정)  
 
'어머니의 언어'가 주변의 언어와 다른 데서 생기는 언어 발달의 지체 현상인 셈이었다. 주변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어를 하는 상황에서 그 아이에게 주어지는 한국어와 관련된 정보의 양은 극히 제한되어있는 탓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이 되었다.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두 돌이 되고 나서 여름 동안 한국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한국에 다녀온 뒤로 그 아이가 말하는 단어 수는 급속도로 늘었고, 곧이어 문장으로 된 표현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초기 언어 발달 지체 현상은 이민자들의 가정에 태어난 아이들의 공통적인 문제이다. 문제의 핵심은 제1언어를 한국어로 할 것인지 영어로 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개인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미국에 살 것이기 때문에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제1언어를 영어로 선택하고, 이른바 '영어 몰입 교육'을 하는 경우가 있다.

부모들이 구사하는 영어의 수준은 한계가 있어서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를 이용하여 아이에게 비정상적인 언어 환경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경우 대체로 아이들이 자라면서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간혹 '하이퍼렉시아' 증세를 가진 민우처럼 극단적인 경우의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대다수 한국계 이민자들은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처음 언어로 한국어를 가르친다. 후에 영어를 배울지언정 한국어가 제1언어로 자리 잡은 뒤에 제2의 언어로 영어를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부모들만이 소수 언어인 한국어를 쓰면서 아이들이 부모들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 정보의 양이 제한되어 있음으로써 초기에 언어 발달의 지체 현상이 잠시 나타나기도 한다. 발달이 늦어지기는 해도 제1언어가 '어머니의 언어'와 일치해서 심리적 안정은 유지될 수 있다. 이런 심리적 안정은 아이의 지적 발달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초기의 언어 발달 지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기간이라도 한국에 다녀오는 방법이 최선이지만, 다른 한국인 엄마들과 함께 책 읽어 주는 모임을 만들어 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된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엄마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아이들에게 한국어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이다.

나는 이런 모임을 작년 5월부터 만들어서 진행하고 있는데, 그 효과가 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낯을 가리기도 하고 서로 잘 놀지도 않고 책 읽어 주는 동안 집중을 하지도 않았다. 요즘은 아이들이 동화책을 다섯 권을 읽는 동안 25~30분 정도 걸려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이해 수준도 높아졌다.

한국계 이민 2세들이 초기 언어 발달 과정에서 심리적 안정감과 가족과의 친밀감 속에서 '어머니의 언어'인 한국어를 먼저 확실하게 배우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어는 이후에 공교육 과정을 통해 배운다 할지라도 늦지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민자 자녀들을 위한 언어 프로그램 등을 활용하면 된다. 아이가 어머니와의 친밀감을 통한 삶의 경험 속에서 언어와 인식의 바탕을 만들어 가고 있으면 이후에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이는 데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이것은 영어를 제2언어로 배우는 한국의 어린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모국어인 한국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2언어인 영어 교육이 제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한국어 속에 담긴 우리 민족의 집단적 경험과 지혜를 내버린 채 남의 나라 언어를 억지로 주입시켜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을 설령 배출해 낸다 해도 그 아이들이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영어는 잘 구사해도 이해력이나 분석력·창의력·비판 능력은 지극히 떨어지는 이른바 '영어 하이퍼렉시아' 증세를 가진 아이들을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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