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파 성도'와 '안주파 성도'
'비판파 성도'와 '안주파 성도'
  • 정병선
  • 승인 2008.01.3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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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인' 심층 분석 리포트 ②

우리가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냉소적인 비판파다. 이들의 수는 아직 많지 않지만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냉소적인 비판파는 아멘파와 순종파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교회에 염증을 느낀 자들이다. 지식이 없는 신앙의 자기중심적인 고리타분함에 질린 자들이요, 쉽게 흥분하는 가벼움과 천박한 자본주의에 종노릇하는 교회의 현실에 딴죽을 거는 자들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한국 교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들도 많다.

한국 교회의 지나친 권위주의, 목회자에 대한 일방적인 순종 강요, 지나친 세속화, 비윤리적인 교회의 관행, 성장 제일주의, 편협하고 전투적인 승리지상주의 등등 많은 문제에 대해서 개혁의 목소리를 외치면서 교회 변화를 위해 몸을 던지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진 자들도 있고, 교회에 절망한 나머지 교회에서 은혜 받는 것조차 포기한 자들도 있다. 심한 경우 아예 교회를 떠난 자들도 있다.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왜 나오는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너희가 하는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니 비판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정작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마 7:1~6). 목회자들도 비판하지 말라는 설교를 많이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점점 냉소적인 비판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왜 그럴까? 목회자들이 성경 말씀과는 동떨어진 가치관과 교회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기 때문이다. 자기들 편리한 대로, 목회에 유익한 대로 진리의 말씀을 농단하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가 먼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야 성도들도 기쁘게 순종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보니 성도들이 점차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순종이 아름다운 미덕이 되기는커녕 더 이상 목회자에게 순종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판단과 분별은 다르다

우선 판단과 분별이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고 넘어가자. 분별은 정직하고 진실하게 실체를 보는 눈이다. 편견이나 장막을 걷어내고 진실과 거짓, 옳고 그름, 실체와 그림자, 본질과 껍질을 구별할 줄 아는 것이 분별이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거짓과 유사품이 가득한 세상, 오염 물질로 더럽혀진 세상을 살아가려면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분별이 없이 어떻게 선을 추구하며, 분별이 없이 어떻게 진리의 좁은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옳고 그름을 파악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아야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다. 바울이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한 것도 분별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판단(비판)은 분별을 넘어서서 상대방에게 비난의 활을 쏘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재판관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왕좌에 앉아서 상대방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방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판단과 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고, 자기 판단이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야고보도 말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약 4:11,12). 이처럼 성경은 ‘분별’은 강조하면서도 ‘판단’은 금하고 있다.  

비판의 네 가지 속성

비판에는 몇 가지 속성이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마 7:1~6). 비판하는 자들을 잘 살펴보라. 그들은 자기는 보지 않고 남들의 잘못만 본다. 다른 사람 비판하고, 세상 비판하느라 정작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돌아보지 못한다. 이처럼 비판하는 자들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기 때문에 비판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이기보다는 상대방과 공동체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둘째, 모든 판단의 근거와 기준이 자기 자신이 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약 4:11~12). 특히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자기들이 의와 진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자기들이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하는 환상과 확신에 사로잡혀 있다. 이건 질병이다. 그것도 매우 뿌리가 깊은 질병이다. 이 질병을 좀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자기 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는 일반적으로 성경 절대주의, 하나님 절대주의, 믿음 절대주의, 기도 절대주의 등등 절대주의가 넘쳐흐른다.

그런데 비판자들 역시 교회의 절대주의와는 정반대되는 또 하나의 절대주의에 빠져 있다.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옳지 않다는 또 하나의 아집, 또 하나의 ‘자기 절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들은 내심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은 비판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를 보면 공동체를 세우기보다 파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바로 이것이 비판하는 자들의 슬픔이요 돌이킬 수 없는 질병이며 한계다. 

셋째, 비판에도 관성이 있다. 알다시피 모든 사물에는 관성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이려 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계속 정지해 있으려 한다. 사물뿐 아니다. 마음에도 관성의 법칙이 작용한다. 한번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하면 모든 걸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게 되는 시각의 고정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보자. 한번 미운 털이 박힌 놈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운털을 벗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미운 놈이 하는 짓은 밉게만 보인다. 왜 그럴까? 이미 마음의 눈에 밉게 보이는 관성이 붙어서 그런 것이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대해 한번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면 그때부터는 비판거리를 찾기 시작하고, 비판거리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즉각 모든 걸 부정하며 싸우려 드는 것은 바로 관성 때문이다.

넷째, 유아독존의 성향이 강하다.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나 제도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전통∙제도∙경험∙어른 등등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도 이 사람을 건드릴 수 없다. 자기가 최고다. 자기 위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며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이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지체라는 말이다. 지체란 모든 신경과 핏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요, 피차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손은 발의 도움이 필요하고 발은 손의 도움이 필요하듯 너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지체다. 그런데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유아독존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지체성을 허물어뜨린다. 바로 이 점이 냉소적인 비판자들의 가장 큰 해악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의 한계

비판의 속성이 이러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본래 분별과 판단의 거리는 매우 짧아서 분별이 비판이 되는 것은 순간이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라. 분별한다고 분별했는데 분별에서 그치지 못하고 판단하고 비판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더욱이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 죄악을 뒤집어 쓴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 삶은 애당초 비판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모순 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모순된 존재다. 그러니 비판하고 비판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치 않는 진실은 비판이 본인이나 공동체에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비판하는 것으로는 공동체의 문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살림의 공동체다. 복음이 죄를 보게 하는 것도 윽박지르기 위함이 아니라 죄로부터 돌아서게 하기 위함이요, 죽음과 죽임에서 해방되어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비판으로는 삶을 일으킬 수 없다. 절망이 스스로를 죽이는 병이듯, 비판은 상대를 죽이는 병이다.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죽임의 문화다. 비판하는 것으로는 결코 삶을 일으킬 수 없다. 그런데 냉소적인 비판자들은 작은 흠만 보여도 윤리적으로 고소하고 비난한다. 교회 왕국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비난하다가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까지도 팽개쳐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이들은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은 잘 하나 헌신적으로 공동체에 참여하지는 않는다. 하여, 그들은 살림을 지향하는 교회에 죽임의 똥물을 끼얹을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자체를 약화시키며 무너뜨리기까지 한다.  

긍정의 힘?

그러면 도무지 비판하지 말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라는 말인가? 냉소적인 비판이 공동체를 세우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니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보라는 것인가?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다. 요즘 긍정적인 사고, 긍정의 힘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긍정적인 사고가 성경 말씀에 부합하는 것인 양, 긍정적인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인 양 호도되고 있다. 물론 긍정의 힘을 인정한다. 긍정적인 태도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진리를 따라 사고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는 단지 긍정적인 사고일 뿐이다. 부정적인 사고보다 나을지는 몰라도 진실을 보고 진리를 깨닫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현실에 굳건히 서게 할 수는 있겠으나 현실을 넘어서게 하지는 못한다. 기존의 신념을 강화하는 데는 효과가 있겠으나 신념을 넘어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그것이 긍정적인 사고의 한계다.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은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정직하게 보고, 진리를 따라 사고하는 것이다. 본래 진리란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 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니까. 

비판과 진리

그리스도인은 진리이신 예수, 예수의 진리를 은혜로 깨닫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예수의 진리를 붙잡고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런데 진리이신 예수의 눈을 뜨면 그와 동떨어진 현실 세계에 대하여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현실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믿음의 길이고 진리의 운명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비판은 진리의 부스러기인지도 모른다. 비판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구체화하겠다고 몸부림치는 자에게서 떨어지는 먼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비판은 진리를 말하는 자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오물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쩌면 진리의 빛이 인간을 통과하면서 드리워지는 그림자라나 할까. 아니, 좀더 긍정적으로 말하면 비판은 진리의 아들일 수도 있다. 때문에 비판은 철옹성 같은 교회의 권위와 위선을 질타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외침으로써 교회의 변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서도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비판하셨듯이 교회에도 선지자는 필요하다. 선지자가 없는 공동체는 희망이 없다. 비판의 소리가 사라진 공동체는 죽은 사회다.

하지만 사람이 하는 비판이라는 게 창조적이기보다는 파괴적인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많다. 사람이 본래 온전치 못한 존재이기에 비판이 가진 부정적 속성으로부터 자유하기가 어렵다. 하여, 사람이 비판의 똥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의 날을 세우고 자신을 살피며 조심해야 한다. 자기 입장을 상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이해가 절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선입견과 편견을 내려놓아야 한다. 진리의 말씀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눈을 맑게 해야 한다. 그래야 비판의 똥물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냉소적인 비판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주변인으로 전락하는 개인적 안주파

한국 교회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개인적 신앙에 안주하는 안주파다. 이들은 교회야 어떻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당연히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다. 이들 중에는 신앙인으로서의 기본 의무를 다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나 분명한 것은, 이들에게서 말씀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라든지 의에 대한 굶주림 같은 걸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피차 사랑하고 돌보는 지체적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이들은 그저 신앙생활이 편안하면 된다. 신앙적인 쇼핑을 적당히 즐길 수 있고, 살아가는 데 위로와 힘을 얻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이런 자들도 냉소적인 비판파처럼 그 숫자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물론 주변부에 머무는 사람들이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는 건 자연스런 이치다. 모든 사람이 중심부에 설 수는 없는 법,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부에 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달라야 한다. 교회 안에 주변인이 많아지는 것은 교회의 교회됨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하찮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건 교회의 본질이 걸린 문제다. 그런데 교회 안에 점차 주변인이 많아지고 있다. 개인의 평안에 안주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예삿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 주변인들이 많아지는 것일까? 그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 예전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교회와 목회자 때문에 시험이 들어 더 이상 교회 안으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인격적인 교제가 소원해져 자연스럽게 주변부로 밀려나는 자들이 양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인이 주변인 생산의 주된 요인이면서 가장 심각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먹고사는 데 쫓겨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는 자들이 경제적인 열악함 때문에 교회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적인 생존 경쟁의 어려움과 경제적 상황 때문에 교회의 주변으로 밀려나간 자들이다. 넷째, 신앙이 나태해지거나 회의에 빠져서, 혹은 본인의 신앙은 확실하지 않은데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이끌려 나오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앙의 부족으로 인해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대 80인 교회 풍경

암튼, 교회 안에 냉소적인 비판파와 안주파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 예삿일이 아니다. 교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심각한 징후임에 틀림없다. 그 수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충 어림잡아 본다면 아마 5% 정도는 비판자 그룹에 속하고, 60% 정도는 개인적인 신앙에 안주하는 주변인들일 것이다. 큰 교회는 주변인이 80% 정도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사실은 예수님의 경우도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과 권능을 보고 놀라며 따랐지만 제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때의 호기심과 자기 필요를 얻기 위해 모여든 군중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은 이와는 또 다르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게 무엇일까?

흔히 말하는 20대 80 법칙을 들여다보면 한국 교회의 문제가 보인다. 이 법칙은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레토가 말한 것인데, 전체 결과의 80%는 전체 원인 중 20%에서 비롯되더라는 관찰 결과를 토대로 형성된 이론이다. 다시 말하면 20%의 소비자가 전체 매출의 80%를 차지한다든지, 국민의 20%가 전체 부(富)의 80%를 차지하는 경향, 직장에서 20%의 근로자가 80%의 일을 하는 경향 등을 함의하는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물론 이것이 불변의 사회 법칙은 아니다. 과거의 촌락 공동체 시절에는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함께 생산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 사회였다. 각각의 역할은 다르지만 전체가 참여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도시화되고, 지식 정보사회로 발전하면서 개인의 능력에 따른 생산력의 차이가 극대화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개인의 경쟁력과 능력의 차이가 생산력의 차이로 연결되면서 능력 있는 20%가 전체 생산량의 80%를 생산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능력 있는 20%가 전체 부의 80%를 차지하게 되는 부의 집중 현상이 나타났다. 요즘에는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면서 20대 80이라는 사회 현상은 세계 전체로 확산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20대 80이라는 사회 현상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이기적인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의 자화상을 읽어낼 수 있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고 하는 끝없는 탐욕이 결국 20대 80이라는 사회 불균형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걸 찾아낼 수 있다. 때문에 20대 80 법칙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얼마나 비정한지를 말해주는 인간 고발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참담한 사실은 20대 80이라는 사회 현상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를 보라. 전체 교인의 20%가 교회 일의 80%를 감당하고 있다. 20%의 대형 교회가 전체 성도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20%의 교회가 전체 자산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정부와 국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고 중소기업을 살리자는 목소리라도 들리는데, 교회에서는 그런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교회가 하는 말은 이렇다. 대형 교회는 하나님이 축복하신 결과라고. 작은 교회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고. 대형교회를 문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이 아니라 인간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라고. 그러면서 입도 벙끗 못하게 한다. 교회는 참 이상하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하셨다고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라고만 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교회의 편차를 줄일 수 있는지, 작은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갈 수 있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다. 오직 더 크지 못해서 안달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교회 안에까지 20대 80이라는 자본주의의 법칙이 들어왔을까? 왜 현대 교회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구조를 그대로 빼닮았을까? 간단하다. 교회가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탐욕과 이기심이 교회 안에서도 가감 없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주변인이 많아지고, 또 많아질 수밖에 없으며, 주변인이 많아지면 교회의 본질이 훼손된다는 것은 너무 자명한 사실.

그런데 교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교회는 여전히 교회 성장에 몰두하고 있다. 교회의 교회 됨이 무너지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큰 교회를 이루어야겠다는 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다. 왜? 큰 것 속에 담겨 있는 온갖 영광이 너무 달콤하기 때문에. 바로 이 달콤함, 큰 것 속에 담겨 있는 온갖 영광의 달콤함 때문에 교회 안에 아멘파, 냉소적인 비판파, 개인적인 안주파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었다. 정리하자. 교회 안에 개인적인 축복과 가정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안주파, 교회 중심에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주변파(관망파)가 많아지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무너뜨리고, 교회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냉소적인 비판파는 교회를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못하고 차가운 냉기가 돌게 할 위험성이 있다. 어린 양 같은 아멘파(순종파)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데 참여하기보다는 교회 왕국을 건설하는 용병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이들로서는 한국 교회를 회복시키고 건강하게 세워나가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면 교회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자들은 어떤 자들일까? 

정병선 목사 / 전 수원 한길교회 담임

* 필자는 한길교회를 개척하고 16년 동안 목회하다가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몸을 돌보며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대장간에서 만든 <어느 목회자의 고백>, <신앙의 마스터클래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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