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레이엄과 마틴 루터 킹이 손을 맞잡는다면?
빌리 그레이엄과 마틴 루터 킹이 손을 맞잡는다면?
  • 짐 월리스
  • 승인 2008.02.01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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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대각성, 21세기 신앙의 부흥이 정치를 변화시켜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사회정의에 신앙의 힘이 발휘되고 있다. 영적 권능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들을 해결해가는 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 우리의 상황을 명백하게 변화시켰던 때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종종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이라 불리는 이때는, 신앙의 ‘부흥’(revival)이 사회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때를 말한다. 사실 역사가들에 따르면, 영적 활동성은 사람들의 내적 삶뿐 아니라 사회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킬 때 비로소 부흥이라 불린다. 신앙부흥은 종종 정치가 붕괴될 때, 즉, 정치가 당시의 가장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그 때 사회 운동이 일어나 정치를 변화시키는데, 가장 힘 있는 운동은 대개 영적인 기반을 지닌다.

   
 
  ▲ 짐 월리스의 신간인 <대각성 운동 : 포스트-기독교 우파의 미국에서의 신앙과 정치의 부활>.  
 
전국 곳곳을 다니다 보면, 신앙의 부흥이 사회 정의를 세우려는 새로운 소명과 헌신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목격하고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신앙의 회생과 갱신은, 도덕과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전 세계적 빈곤과 이곳 미국 내 만연한 빈곤 문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커다란 위협을 가하고 있는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의 위기, 그리고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공격하는 온갖 부끄러운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중차대한 사회 문제들, 즉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전염병과 세계 인구의 반을 비참한 삶의 조건 속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몰아넣는 거대한 불평등, 지구를 뜨겁게 데우고 있는 위험한 기후 변화, 누구도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인종 대학살,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짓밟는 무수한 위협들, 끊임없는 인간 존엄성의 파괴, 그리고 가족과 지역 사회 전체의 놀라운 해체, 이 모든 것들은 움직일 수 없는 커다란 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새로운 세대가 성경에서 중요한 통찰을 발견하고 있다. 즉,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산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씀이다. 다행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오늘날 이 세상에 움직여야 할 육중한 산들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 산들은 정말 큰 문제이며 도전이기에, 사회 변화를 일으켜내는 영적 권능으로서의 신앙이 감당해야 할 일이 되었다. 실로, 이 때문에 ‘신앙’인 것이다.

특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우리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가능성은 적대적으로 보일 때 더욱 필요한 것이 신앙이다. 아마도 신앙의 부흥만이 정말로 커다란 문제에 있어 대중의 여론과 정치적 의지에 있어 불가결한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으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영적 변화가 필수적일지 모른다. 그러한 변화는, 공적 영역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가 믿는 것의 뿌리를 위협하는, 많은 중대한 도덕적 문제들을 향한 마음과 정신이 변화를 겪는 것을 말한다. 부흥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행하실 수 있는 것이며, 특별히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표류하며 사회가 위험에 빠져 있는 바로 지금 하나님이 새롭게 행하고 계시는 일이다.

가장 중차대한 사회적⋅공적 도전의 과제들을 해결할 사명에 붙들린 그러한 신앙의 부흥은 또한 사람들을 함께 묶어내는 능력을 발휘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참된 해답과 해법을 찾기 위해 심지어 전통적인 정치적 경계와 구분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신앙과 영성은 정치보다 우리를 더욱 깊은 차원으로 이끌어 도덕적 헌신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평상시의 이념적 논쟁을 초월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바로 개인적⋅정치적인 변화 모두가 일어날 기회로 충만한 순간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진실로, 개인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는 상호 의존적이 된다.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우리의 공적 삶과 정치적 담론에 도덕적 중심이 세워지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공공의 선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최근 상당히 유행하고 있는 보다 중도적인 정치를 주장하는 또 하나의 입장이 아니다. 나약한 정치적 중립은 해답이 아니며, 현재의 다양한 정치적인 성향이 당장에 드러내는 차이를 그저 분열시킬 뿐인 모호하고 타협적인 중도주의는 사람들의 마음을 결코 붙들기 어렵다.

오히려, 전미를 돌며, 전 세계를 돌며 만난 이들의 말을 경청해 보면, 그들은 우리의 정치적 논쟁 저변에 있는 도덕적 선택과 과제들을 더욱 잘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좌’로도 ‘우’로도 가기를 원치 않으며, 더 깊어지기를 원한다. 새로운 정치적 합의가 세워지고 더 나은 결정이 마련될 수 있는 도덕적 기반을 발견하고자 애쓰는 노력이, 심약하고 영혼이 부재한 중도주의보다 훨씬 더 큰 호소력을 지닌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공의 선에 기반을 둔 정치가 개인의 이득과 이익 단체들에 의한 정치를 대체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정치는 여전히 붕괴된 상태이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그것을 느낀다. 나는 실제로 정치가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위기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강력한 신앙과 영성이 일으켜내는 힘과 헌신과 희망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노예제 폐지와, 미국의 시민권 운동의 구심이었던 흑인 교회의 지도력, 그리고 공산주의 전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폴란드의 자유 노조 운동에 끼친 가톨릭의 영향, 이러한 것들이 영적 부흥을 통해 가능했음을 이제 기억할 때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어떻게 새로운 민주주의를 열어젖혔는지를 기억할 때이며,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남아프리카 교회들이 어떻게 인종차별정책을 무너뜨리는 승리를 고취시켰는지, 달라이 라마가 어떻게 수백만의 티베트인들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개발도상국에서 성장하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들이 어떻게 전 세계 경제의 부정의함에 대항하는 힘들을 모아내고 있는지를 생각할 때이다.

나는 그와 같은 운동이 다시, 바로 지금 여기 미국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나는 우리가 이 땅의 육중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영적 부흥 또는 영적 각성이 이제 막 일어나려는 찰나에 서 있음을 믿는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모습의 정치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본다. 이 정치는 개인적인 행동과 책임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며, 인간의 생명의 고귀함을 소중히 여기는 강력한 도덕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가족의 유대를 중시하며 그에 깊이 헌신되어 있다.

동시에 이 정치는 경제 정의와 공평에 관해서는 또한 철저히 대중적이며, 사회적 책임성에 있어서는 상당히 공산주의적이며, 환경에 대해서는 돌보아야 할 깊은 책임을 느끼며, 국제 정책에 대해서는 점점 더 반전의 입장을 취해가고 있다. 이 새로운(그리고 아주 오랜) 정치적 선택에는 개인적인 윤리와 사회적 정의를 갈라놓는 것을 거부하고 이 둘을 총체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입장이 그 중심에 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헌신은 놀랄 것 없이 많은 미국인들의 종교적 가치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성실과 충실과 연민과 관대함, 국내에만 머무는 협소한 시각이 아닌 보다 세계적인 시각이 그것이다. 의회를 이루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옛 틀이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관료들이 선출되고 있다. 사회적으로 보수적이고, 경제적으로는 대중적이며, 전쟁에 반대하는, 이러한 입장들은 더 이상 상호간 배타적이지 않다.

절박한 선택 가운데 처한 이들을 고립시키지 않으면서 생명의 신성함을 지킬 수 있다. 낙태는 언제나 도덕적인 비극이지만, 저소득층 여성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예방 정책이, 비난하고 범죄화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결혼과 가족제도의 중요성을 강력히 옹호하면서도 성 소수자들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다. 결혼이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과 상호 관계에 대한 진실한 헌신을 지니는 것이라 보며, 부모의 역할은 가족의 가치를 지켜내는 관건임을 우리는 깨달아가고 있다.

개인적인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환경을 보존하고 우리의 취약한 행성에 가해지는 위협을 막아내면서도 경제 성장을 촉진하여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제하는 일이 가능하다. 한 나라의 실수를 인정하고 보다 높은 기준을 고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자신의 나라에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악의 현실성과 적의 존재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고, 전쟁을 취하는 습관을 넘어 갈등 해결 기술과 정의에 부합하는 조건을 선호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모든 것들이 진실로 가능하며, 원칙적인 보수주의와 진보적인 자유주의의 가장 좋은 본능들을 결합하면서 자유와 공동체성의 가치를 균형 있게 실현해갈 수 있다.

이제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라는 배타적인 낡은 범주를 뛰어넘을 때가 아닐까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일 것이다. 굳이 부른다면 ‘보수적 급진주의’(the Conservative Radical)라 할 수 있겠다. 보수적(conservative)이란 전통과 신앙과 핵심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급진적(radical)이란 또한 깊이 뿌리내림을 의미하는 것으로(‘급진적인’[radical]은 ‘뿌리’[root]를 뜻하는 라틴어 ‘라딕스’[radix]에서 나왔다.), 이러한 입장은 세상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제시한다. 따라서 보수주의와 급진주의 둘은 모순적이지 않고 실은 깊은 차원에서 상호 보완적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보수적인’ 가치와 책임에 뿌리를 두고 실제 세상에서 바로 그러한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급진적’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공평과 정의(보수주의적 목표)라는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러한 가치들은 타락한 세상에 급진적으로 적용(자유주의적 목표)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가톨릭 노동자 운동>(the Catholic Worker)의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보수적 급진주의자로, 자신의 신앙적 가치들을 삶으로 살아냈다. “그녀는 진리를 살아내기에 충분히 그 진리를 사랑했다”라고 전해진다. 마더 테레사가 그랬고, 마틴 루터 킹이 그랬고, 디트리히트 본회퍼가 그랬듯이, 모두가 보수적인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그 뿌리로 인해 그들은 세상에서 급진적이 되었다.

우리가 ‘예’라고 말하는 것과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에 의해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인식하고 판단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보수적 가치들에 대해서 ‘예’라고 말하며, 그러한 가치들을 위해 필요할 때 급진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한다. 보수적 급진주의자는 현대의 정치적 범주나 선택 중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일에 기여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해결에 이를 수 있고, 심지어 아직도 전쟁 중인 정치적 문화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 가장 큰 도덕적 문제들의 해결을 가로막는 정치적 난국과 대중의 반감을 약화시켜야 한다. 개인과 교회 회중과 지역 공동체가 이를 위해 헌신한다면,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 역할을 감당해낸다면, 우리는 그러한 커다란 문제들의 ‘임계점’에 이르러 마침내 진정한 해결책을 향해 돌파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손상된 정치적 과정들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흥이 필요하다. 단지 새롭고 더 나은 정치적 의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올바로 짚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옳은 내용이 제시되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않다. 적절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정치를 변화시켜낼 유권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앙이 일으키는 힘과 권능과 희망이 필요하리라 믿는다. 가장 선한 생각과 가치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일어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가장 깊은 신앙의 샘에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이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정의의 부흥’이라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과거의 강력한 전통 속에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 시대 커다란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명에 사무쳐 있다. 밤에는 영혼을 울리는 강력한 연설과 음악이 흘러나오고, 낮에는 대로에서 큰 무리가 행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빌리 그레이엄의 전통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전통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신세대 젊은이들이 횃불을 들고 자신들의 은사와 재능과 삶을 바치며 사회정의를 위한 새로운 영적 운동에 헌신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러한 부흥 운동이 도시의 주요 회합의 중심지에서 일어나면서도 수천 개의 소모임들이 지속적인 제자훈련을 벌여가고 있는 모습을. 미몽에서 깨어난 신앙인들이 이방인으로서의 수년간의 삶에서 돌이키고, 한편으로는, 진리를 추구하던 자들이 처음으로 신앙의 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신앙의 부흥이 편파적인 복지를 이끌어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신앙 공동체 간의 존중어린 대화로 이어지고,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종교간 협력이라는 결실로 맺어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정치가 그러한 영적 부흥까지 감당할 순 없지만, 의당 자신의 도덕적 책무를 인식해가게 되는 것을 상상해보라. 영적 부흥에서 발현된 사회 운동이 실제로 우리 문화와 정치 모두의 풍향을 바꿔놓고 있음을 상상해보라. 예언자 아모스의 말이 우리 시대에 실현되는 것을 상상해보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상상해보라!

글·짐 월리스(<소저너스> 대표) /  번역· 최봉실

* 이 글은 <대각성 운동 : 포스트-기독교 우파의 미국에서의 신앙과 정치의 부활>(Harperone, January 2008)에서 발췌한 것으로, 2008년 2월호 <소저너스> 표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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