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축복은 승자 독식의 원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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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기문
  • 승인 2008.02.12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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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의 자본주의적 해석 (4)

다음 호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창세기에 나타난 족장들의 치부와 재산상속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하기에 앞서서 이번에는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의 자본주의적 해석에 있어서 한 가지 원론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축복과 치부(致富), 그 끊기 어려운 해석학적 고리

신불신을 막론하고, 돈 많이 버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내가 번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싫어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실 창세기 12~50장의 중요한 이슈는 (반드시 우리의 논의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재산상속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창세기의 자본주의적 해석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고려해보아야 할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즉 족장들이 얻었던 물질적인 부가,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을 의미하는가? 혹은 구원의 표(혹은 보증)인가? 족장들이 부자가 되고 그가 획득한 부를 자식에게 대물림해주는 것이 소위 혈통 구원의 정당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사실 토지에 근거한 재산(財産, 성경에서는 가축과 농산물을 포함해서 ‘토지의 산물’이라고 부른다)이란 하나님의 것이며, 가부장의 것이다. 또한 가족 모두의 생계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족장시대에 재산상속은 족장권의 상속과 유무형의 물질적 축복을 얻는 것으로 대표되었다. 족장시대에는 족장의 권한의 상속이라는 것은 자손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과 저주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갖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특별히 족장시대에 가부장이 가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리도 소유하였던 것처럼 보인다(일종의 제사장의 역할).

우리가 족장시대의 예들을 많이 보았듯이 주로 족장들의 재산상속은 생전에 행해졌다. 유언, 즉 자식에 대한 축복은 평생에 한번 행하는 것으로 한번 행해지면 철회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기원(祈願)이면서 또한 선언(宣言)이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장자권의 승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여 그의 뜻과 승인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는 이삭과 에서가 서둘러 장자권을 물려주고 받으려고 노력하던 와중에 아버지에게서 자신에게 장자권과 축복이 전달될 수 있도록 있도록 어머니와 모의하였으며 또한 그의 아들들의 경우에도 요셉이 자기 아들들을 데려왔을 때 장자 대신에 차자를 장자로 대우하는 일은 자신의 초기와 말기의 삶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단순히 생각하기에 장자가 장자권을 승계하는 것이 원칙인 것 같지만, 족장시대와 그 이후 시대에는 장자보다 (족장이 선호하는) 다른 아들들이 장자권을 잇는 예외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은 큰아들 이스마엘이 아니라 작은아들 이삭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었고, 이삭은 작은아들 야곱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었으며, 야곱은 11번째 아들인 요셉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장자권의 승계는 지나치게 자의적이어서 가족 간의 선한 유대관계를 해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낳았다. 즉 아버지와 어머니가 편애로 남용한 경우(야곱과 에서), 형제 간에 매매한 경우(야곱과 에서), 아버지가 고의적으로 변경한 경우(에브라임과 므낫세의 경우, 다윗의 아들 솔로몬, 아비야, 므라리 자손 중에서 시므리)가 있다. 또한 야곱은 르우벤의 장자권을 빼앗아 요셉에게 주었다(49:24~26).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족장시대의 사람들은 인간의 생사화복이 어떤 특정한 권한이나 자격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줄 믿었고 부모와 형제지간에 극단적인 음모와 대립과 갈등 그리고 심지어 죽음의 위협까지도 감수해야 했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족장시대와는 달리 신명기 21:15~17에서는 법적으로 장자의 권리를 보장하였지만, 재산분배에 있어서는 상당히 제한하고 있겠는가? (아버지 재산의 2/3[슥 13:8]) 그러나 이후에도 장자가 아닌 자들에게 장자권을 승계한 경우들도 나타난다는 점은 장자권이라는 권리의 문제에 있어서는 부모나 자식들 사이에서 불공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역대기가 장자권의 취득자의 순서가 아니라 출생의 순서에 따라 족보가 기록되었다는 점(르우벤은 장자였지만,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권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족보에는 장자권에 따라서 기록되지 않는다[대상 5:1])은 역대기의 저자가 당시의 관행에 반대하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여기서 필자가 이러한 이야기들을 길게 언급하고 있는 이유다. 많은 독자들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쉽게 도달한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그런 일이 있었고 그렇게 되었고 하나님의 별다른 혹은 직접적인 반대가 없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거나 결과적으로 승인된 것이 아니겠는가? 더 나아가서 가족 간에, 부족 간에, 혹은 지파들 간에,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들 간에, 방법론의 정당성과는 상관없이 마지막에 승리한 자가 옳다는 의미가 아닐까?

성경의 언급을 자세하게 살펴본다면 우리의 자본주의적 해석이 결코 합리적이거나 당연한 것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오랫동안 학술적으로 연구한) 필자의 결론이다. 앞서 말한 대로 족장 이야기라고 하는 본문을 자본주의적 해석의 전제를 갖고 읽으면, 또 그렇게 원하는 대답이 나온다. 이것이 해석학의 순환논리다. 그렇기 때문에 족장의 물질적 부의 취득의 과정, 동기, 절차 그리고 그 결과를 본문을 통하여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고대 근동의 물질적 부의 취득과 상속에 관한 관습들과도 면밀한 대조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http://www.cyworld.com/moses_torah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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